[기획 특집] 미완의 친일 청산(18)

정읍지역의 친일 잔재 두 번째 편으로 충열사 이순신 영정과 신태인읍에 있는 화호자혜진료소, 다우에 농장 사무실을 비롯한 화호리 일대 일제 강점기 수탈 현장을 차례로 소개한다. 

특히 화호리 일대는 일제 강점기에 지역 농민들이 피땀 흘려 생산한 쌀과 농산물들이 일제에 의해 수탈됐던 대표적인 곳으로 많은 친일 잔재들이 남아 있다.

정읍 충열사 이순신 영정 

정읍시 수성동 615-1
정읍시 수성동 615-1

친일 화가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영정이다. 초대 정읍 현감으로 부임했던 충무공 이순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충열사에는 이순신의 영정과 위폐가 봉안되어 있다.

해당 영정은 1973년 지정된 표준 영정인데 이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작가 장우성이 그렸다. 장우성은 친일화가 김은호의 문하생으로 1941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푸른전복'으로 총독상을 받았고, 1942년과 1943년에 창덕궁상을 받았다.

그는 1943년 6월 조선 총독부에서 열린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에서 시상자로 “총후(銃後)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하여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하기도 했다.

1944년 3월 결전미술전에 참가해 연합국을 굴복시키자는 의미를 담고 있는 <항마(降魔)>로 입선하였다. 해당 작품은 친일파와 관련한 것으로 친일 잔재로 분류된다.

화호자혜진료소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766-4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766-4

1935년에 세워진 화호자혜진료소는 구마모토농장 소작인을 위한 무료 진료소이다. 세브란스 의전 출신인 이영춘 박사가 1934년 구마모토 리헤이를 만난 후 농장의 의사로 내려와 이곳에서 진료를 하였다.

구마모토 리헤이(1880~1968)는 나가사키 현 출신으로 1902년 농장 지배인의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1903년부터 전라북도 옥구군 박면 내사리와 태인군 화호리 일대의 토지를 매입해 농장을 개설하였고 이후 ‘주식회사 구마모토 농장(株式會社熊本農場)’을 1937년에 창설하였다.

곡물생산이 풍부하고 정읍, 김제, 부안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던 화호리 지역에 농장 사무실, 대형 쌀 창고 5동, 관리인 사택, 합숙소, 화호 진료소 등을 세웠다. 당대 농장에 소속된 진료소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다우에 농장 사무실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333(출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333(출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정읍에 터를 잡은 일본인 지주의 사무실이다. 재촌지주였던 다우에 다로는 상업구역과 가까운 곳에 2층집을 지어 1층은 자신의 농장사무실로 2층은 살림집으로 사용하였다.

다우에 다로는 1913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조선으로 이주했다. 화호에 정착해 식산은행에서 저리로 돈을 빌려 소작농들에게 빌려준 후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재산을 불렸다.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모아 농토를 사들인 이후 25정보의 토지를 소유하고 농장관리인을 5~6명을 두며 50여명의 소작인을 거느린 대지주가 되었다. 재조 일본인 지주의 농장사무실을 볼 수 있었으나 현재 다우에 농장 사무실은 소유주에 의해 철거된 상태이다. 

화호리 일제 강점기 수탈현장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입구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입구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에 친일 잔재가 유독 많다. 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이곳은  ‘식민지 속 식민지’라고 불릴 정도로  일제와 인연이 깊은 지역이다. 

화호리 일대는 원래 마을 주변에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먹을 것이 풍부한 풍요로운 지역으로,  정읍, 김제, 부안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영구적으로 식민지화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필두로 농업 이민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으며, 그 중 화호리는 정책 초기 이주지로 선정되면서 다수의 일본인이 이주했고 대규모 농장이 개설됐다.

화호리의 많은 농지와 대지 소유권은 구마모토 리헤이 등 많은 일본인에게 이전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자영농이었던 토착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구마모토 리헤이가 화호리 지역에 세운 농장 사무실과 미곡창고 등은 유명한 친일 잔재로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에서 지역 농민들이 피땀흘려 생산한 쌀은 일제에 의해 수탈돼  군산항을 거쳐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참고 자료 :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 결과보고서 (2020.12)  

/박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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