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미완의 친일 청산(4)
전주시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기린봉에는 대표적인 친일 인물인 이두황의 묘와 묘비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두황은 동학농민혁명군을 전주에서 대패시키고 많은 동학군을 살육한데 이어 명성황후 시해에도 가담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배려로 중추원부찬의가 되고 전라북도 관찰사 겸 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국권피탈 이후에도 전라북도장관으로 죽을 때까지 재임했으니 그의 친일 행각은 두텁고 질기기도 하다.
또 전주 오목대 동쪽 건너 언덕에는 박영근과 그 집안 관련 건물과 비석이 있다. 역시 친일파 집안이다. 이밖에 전북대에 세워져 있는 덕진공원지비(德津公園之碑)는 비신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 앞면에 1934년 전주읍장이었던 후지타니 사쿠지로(藤谷作次郞)가 지은 ‘덕진운동장건설비(德津運動場建設費)’가 있고, 뒷면에는 1929년 덕진공원을 조성하면서 만든 ‘덕진공원개요(德津公園槪要)’가 있다.
당시 덕진 운동장 조성 관련 친일파 박기순(朴基順)의 치적이 기술되어 있다. 이 외에 전주초등학교에도 친일 잔재가 있다. 이두황 묘 및 묘비, 박영근 묘 및 묘비, 박영근 자서비, 전북대 덕진공원지비, 전주초등학교 봉안전 기단양식2를 차례로 소개한다.
이두황 묘 및 묘비

대표적인 반민족 친일 인물이었던 이두황(李斗璜, 1858~1916)의 묘와 묘비가 전주시 기린봉에 위치해 있다.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서울 출생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뒤 무과에 급제, 친군좌영초관(親軍左營哨官)을 시작으로 수문장 등의 무관직을 거쳐 1889년 흥해군수를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으로서 동학군과 많은 전투를 하였다.
특히 북접(北接)들이 제2차 봉기에 참가하여 보은장내에 모였을 때 기습을 하였고, 김개남(金開南)의 동학군을 목천 세성산에서 격파하였으며, 패퇴하는 동학군을 추격하여 해미·유구·노성·논산 등지에서 많은 동학군을 살육하였고, 전주에 재집결한 동학군을 대패시켰다.
이듬해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하여 광화문 경비를 맡았다가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1907년 특사가 되어 귀국, 친일파를 심으려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배려로 중추원부찬의가 되고 전라북도 관찰사 겸 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국권피탈 이후에도 전라북도장관으로 죽을 때까지 재임하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서위와 거액의 상여금을 일제로부터 받았다. 현재 이두황의 묘와 묘비에는 단죄비가 설치되어 있다.
박영근 묘 및 묘비

전주 오목대 동쪽 건너 언덕에 박영근(朴永根)과 그 집안 관련 건물과 비석이 있다. 『조선신사보감』에 따르면 박영근은 1872년생으로, 전주 대화정(大和町), 즉, 지금의 전주 웨딩거리에 거주했던 인물이다.
박영근은 주식회사 전주농공은행장을 역임하고, 전주여자잠업전습소장으로 근무하는 등 전주지역 친일 인물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박영근의 묘 옆에는 ‘관청음밀양박공영근지묘(觀淸音密陽朴公永根之墓)’라고 새긴 비석이 있다. 이 외 다른 내용은 새겨져 있지 않아 자세한 건립 경위는 알 수 없다.
박영근 자서비

전주 오목대 동쪽 건너 언덕에 박영근(朴永根)의 묘와 함께 자서비가 있다. 박영근 자서비에는 ‘나이 칠십이 되어 세간의 나이를 잊고자 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박영근 본인의 칠순을 기념하여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설립연도는 훼손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경진(庚辰)이라는 간기를 보면 1940년으로 추정 가능하다.
덕진공원지비

덕진공원지비(德津公園之碑)는 현재 전북대학교 학생회관 인근에 위치해 있다. 비신(碑身)에 ‘덕진공원지비’가 새겨져 있고, 비신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 앞면에 1934년 전주읍장이었던 후지타니 사쿠지로(藤谷作次郞)가 지은 ‘덕진운동장건설비(德津運動場建設費)’가 있고, 뒷면에는 1929년 덕진공원을 조성하면서 만든 ‘덕진공원개요(德津公園槪要)’가 있다.
이 가운데 ‘덕진운동장건설비’에 일제강점기 당시 덕진 운동장 조성 관련 친일파 박기순(朴基順)의 치적이 기술되어 있다. 박기순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였던 중추원 참의를 비롯하여 전주 면협의회원, 전주도시금융조합 조합장 등으로 활동했던 친일 행적이 있다.
전주 봉안전 기단 양식2

전주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독립기념비는 1945년 1월 15일 일제 강점기 교내에 있던 봉안전 터에 세워진 유적이다.
‘봉안전’은 ‘어진영’이라고도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 당시 각 학교마다 배치돼 학생들이 일본 천왕의 얼굴을 기억하게 하고 일본 식민주의 정신을 교육하는 데 이용됐으며, 봉안전에 경례하는 것을 게을리 하거나 이를 해하게 되면 형법상 불경죄로 처벌받았다.
2015년 기존의 독립기념탑을 새 단장했지만 기념비의 기단 양식을 일제 봉안전의 기단 양식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참고 자료 :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 결과보고서 (2020.12)
/박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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