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이 소설 '각시붕어'

다음 일요일이 돠자 박중양은 송화자의 부모님과 남매들을 만나기 위해, 말쑥한 정장차림을 하고 순천역 역전다방에서 송화자와 녹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박중양이 “부모님을 만나면 절은 어떻게 하고, 질문이 나오면 대답은 어떻게 해야 할지? 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오빠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등 필요한 예절과 가족관계 등 알아두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물어보자, 송화자가 “걱정 말라”했다.

박중양이 오늘 새벽에 산등부락 앞 갯벌에서 잡아온 싱싱한 꼬막을 인부를 시켜 지게에 지워 가지고, 송화자의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갔다. 

“나중에 기회가 되는 대로 원하는 대학에 보내 훌륭한 문인이 되도록 뒷바라지를 해주라” 

송화자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은 아버지가 교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순천여고 옆의 교장 사택에서 살고 있었다. 큰오빠는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큰언니는 광주에 사범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며 셋째인 동생은 광주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박중양이 대문을 열고 잔디가 깔린 마당에 들어서자, 송화자의 부모님들이 나와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어 오빠와 언니, 동생이 따라 나와 인사하며 반갑게 맞았다.

가져온 꼬막을 토방에 내려놓고, 거실로 들어가 부모님들께 큰절을 올렸다. 가족들에게도 한 분 한분 인사를 드리고 소파에 앉아 가족의 구성원, 살아온 과정, 현재하고 있는 일, 본가주위의 환경, 재산정도, 산등부락에 가는 방법 등 질문에 답했다.

송화자의 부모님이 박중양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더니 “송화자가 막내딸이라 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살았다. 문학을 좋아해 대학을 보내려고 했는데 자네가 좋다고 시집을 가겠다.”고 고집을 피워 부득이 시집을 보내니 “나중에 기회가 되는 대로 원하는 대학에 보내 훌륭한 문인이 되도록 뒷바라지를 해주라”고 했다.

박중양이 그러겠노라고 힘주어 약속하자 “3개월 안에 결혼식을 준비하라” 말했다. 송화자의 어머니와 가족들이 잘 차려놓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환담을 나누다 송화자의 어머니가 꼬막을 맛있게 삶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았다. 박중양이 “꼬막을 씻는 방법은 찬물에 한번 씻어준 후에 천일염을 한 움큼 넣고 버러버럭 문질러 씼어 준 후에, 흐르는 물에 5번 이상 깨끗하게 씻어 갯뻘과 불순물을 제거하여야한다.

그 후에 물을 팔팔 끓이다 찬물을 약간 부어 물의 온도를 100도에서 70-80도정도로 낮춘다. 약간 식은 물에 꼬막을 넣고 한쪽방향으로 저어준 후, 꼬막이 익어서 몇 개정도가 입이 벌어지면, 삶은 꼬막을 바구니에 부어 물을 빼낸다. 그리고 식기 전에 까먹으면 맛이 제일 좋습니다.” 하고 삶은 순서에 따라 자세히 설명해 드렸다.

다음주 일요일 아침에 박중양은 벌교 역전에 있는 다방에서 송화자를 만나서 산등마을에 있는 집으로 데려갔다. 박중양의 부모님과 가족을 비롯한 문중 어른들에게 인사 시키고, 어른들은 송화자에게 가족관계 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며 흡족해 했다.

결혼식은 부모님들과 함께 3개월 후인 11월 말로 예정 날짜를 정하고, 양가 부모님과 가족들은 다음 주 일요일에 벌교역전 앞 꼬막 전문점에서 만나기로 정하였다.

송화자와 박중양, 틈틈이 손 잡고 로렐라이 언덕으로 산책을... 

양가 부모님들이 만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11월말에 순천여고 대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살림집은 산등부락에 대궐처럼 크게 지어 놓은 박중양의 집으로 정하였다. 송화자가 아직 어려 살림을 해본 경험이 없어 가정부를 두고 송화자를 돕도록 해, 송화자가 그동안 해왔던 문학 등 여가 생활을 하도록 했다.

11월말에 화려한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최고의 신혼여행지인 하와이 와이키키비치로 갔다. 비치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파도를 따라 서핑보드나 보디보딩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태양을 받으며 여유를 즐기는 연인들이 바글바글한 백사장을 1주일 동안 거닐며, 미래에 대한 설계를 하고 돌아왔다.

박중양이 산등부락에 대궐처럼 크게 지어놓은 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송화자와 박중양은 틈틈이 둘이서 손을 잡고 로렐라이 언덕이라고 불리며, 빨간 모자를 쓴 하얀 등대가 서있고 바다와 맞닿아 파도가 치고 있는 곳으로 산책을 나갔다.

마을 사람들도 두 사람의 신혼부부가 손을 잡고, 파랗게 자라고 있는 콩밭이나 고구마 등 밭작물이 자라고 있는 농로를 걸어가는 모습이 배우처럼 예쁘다고 했다.

송화자가 시집 온지 일 년이 지난 초 가을날 새벽에 딸아이가 태어났다. 박중양의 집안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온 마을에 백설기떡을 해서 돌리며 기쁜 소식을 전했다.

마을사람들도 거의 친인척 사이였고, 평소에 박중양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했다. 잡힌 고기를 집집마다 나눠 주었기에 모두들 축하해 주었다.

아기가 태어 난지 일 년이 지나자, 박중양과 송화자는 아기를 데리고 로렐라이 언덕이라 불리는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박중양은 마을 장정들이 “고기잡이를 떠나자”고 졸라 고기잡이배 3척을 가지고 바다로 갔다.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는데 그날따라 계획하였던 고기가 잡히지 않자, 장정들이 “고흥 앞에 있는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자”고 이구동성으로 졸라대기 시작했다.

박중양은 하늘을 살피더니 “태풍이 올 것 같으니 멀리가면 안된다, 바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렸으나, 장정들이 오랫만에 고기잡이를 나왔으니 먼 바다로 가자고 했다.

한참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마지못해 고흥 앞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데 현해탄 저 너머에서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물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집채 만한 파도가 박중양이 타고 있는 배를 덮쳐, 박중양과 장정들이 바다에 빠져버렸다.

남편 박중양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송화자는 실신하여... 

나머지 배 2척에 타고 있던 장정들이 밧줄을 몸에 감고 바다에 뛰어들어 물에 빠진 사람들을 간신히 건져 내어, 박중양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숨을 쉬지 않았다.

놀란 장정들이 차례로 인공호흡을 실시하며 살려보려고 애를 썼으나, 회생이 되지 않아 작업을 중단하고 서둘러서 산등마을에 있는 웃나루 선착장으로 귀환하였다.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하자 마을사람들은 “혹시나 사고가 나지 않았을까?”하고 걱정을 하며, 선착장에 나와 기다리고 있는데 배 2척만 돌아오자 눈을 떼지 못했다.

고기잡이 나갔던 가장 연장자가 배에서 먼저 내려, 갑자기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배 1척이 파도를 견디다 못해 난파되어 버렸다. “그 배에 타고 있던 박중양 선장과 장정 10명이 물에 빠져 운명을 달리했다”고 하면서 배 위의 주검을 차례로 내렸다.

남편 박중양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송화자는 실신하여 버렸다. 가족들이 박중양의 주검을 집에 데려와 빈소를 만들어 초상 치를 준비를 하고 부고를 냈다.

박중양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아 5일장을 치르기로 하고, 평소에 알고 지내던 지인들에게 부고를 내어 알렸다. 마을사람들과 벌교 등에 사는 지인들이 문상을 왔다.

이어서 광주, 순천, 보성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평소에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 문상을 오고, 마지막 날에 박중양과 일본에서 수산전문대학을 다녔던 친구들이 왔다.

이렇게 5일간이나 문상객을 받는 동안에 송화자는 식음도 전폐한 채, 딸아이를 껴안고 빈소의 한구석에서 울며 밤을 지새우다 실신해 안방에 옮겨 치료를 받았다.

며칠 후 눈을 뜨자마자 빈소로 달려가 울기 시작하자, 시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식사를 하고 몸을 추슬러 오라고 했으나 발인을 할 때까지 빈소에 앉아 있었다.

상여가 나가는데 송화자는 상여를 붙잡고 통곡을 하다 실신하였고, 며칠 후 정신을 차리자 하얀등대 옆에 묻힌 박중양의 묘로 달려가 밤이 깊도록 한없이 울었다.

시어머니 정정숙과 남편 김병만이 세상을 떠난 후 송화자 우울증 재발 

정신만 차리면 누가 말려도 듣지 않고 2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묘지로 달려가 울기만 하자, 시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은 큰일이 나겠다고 걱정하며 멀리 보내기로 했다.

송화자를 재혼시키기 위해 여기저기 사람을 시켜 알아본 후에, 덕촌부락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노총각 김병만에게 박중양의 전 재산을 팔아 많은 돈을 주겠다. “딸과 송화자 데려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 잘 살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다행히 김병만이 큰돈이 생겨서 부자로 살 수 있고, 거기다가 송화자가 미인이라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겠다” 약속하고 송화자와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울증에 걸린 송화자를 남편 김병만이 잘 보살펴주고, 시어머니 정정숙이 외롭지 않게 위로를 해주며 여러 해가 지나갔다. 송화자도 많이 밝아지고 2남 4녀의 자식을 낳으며 살았으나, 자식들이 장성해 많은 속을 썪여 김병만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시어머니 정정숙과 남편 김병만이 세상을 떠난 후 송화자의 우울증이 재발해, 식사를 하지 못하고 담배만 피우다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계속) 

/이용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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