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이 소설 '각시붕어'

어머니 송화자는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 장애인의 몸으로 어린 딸을 키우고 있는 영심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조그만 집과 약간의 전답을 구입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유산으로 남겨주려고 아무도 모르게 틈틈이 조금씩 돈을 저축해왔었다.

이렇게 돈을 모아 온지도 30년의 세월이 흐르자, 집 한간과 논 10마지기를 구입 할 수 있는 돈이 되었다.“세상을 떠날 때 편히 눈 감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대학을 나와 읍내에 있는 회사에 취직을 한 장남이 술을 좋아했다. 매일 술집에 가서 술을 먹고 외상값이 쌓여나갔다. 술집주인들이 송화자가 살고 있는 집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서 외상값을 내 놓으라고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노름에 빠져 많은 빚을 지게 되자, 빚쟁이들이 찾아와“마지막 남은 집을 팔아가겠다”고 집문서를 내 놓으라 했다. 협박과 행패를 부리는 날이 늘어 갔다.

빚쟁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시달려온 송화자에게“빚을 갚아 주지 않으면, 갚아줄 때까지 자신들이 본가에 들어와서 살겠다.”고 하며 덩치가 매우 큰 장정들이 몰려와 안방을 점령하고 앉아“술 가져 와라, 밥 가져 와라” 고함치며 주인행세를 했다.

밥상을 차려다주면 반찬이 형편없다고 시비를 걸며 밥상을 집어던지기 일쑤였고, 가족들을 쫓아내려고 옷가지와 가구들을 마당으로 내던지며 소란을 피워 대었다.

하는 수없이 송화자가 면장에게 부탁해서 조성지서에 신고를 하고 경찰들이 출동을 하였으나, 폭력배들 중의 한명이 마을 입구에 있는 언덕위에 의자를 갖다놓고 망을 보고 있었다. 빚을 받으러 온 일당들은 6.25때 지리산 속으로 몰려들어 주변의 수많은 민간인을 괴롭히던 공비들 같았다. 경찰이 보이면 집으로 달려와 일당들을 데리고 봉두산에 들어가 숨어 지내다가 땅거미가 지고 경찰들이 지서로 돌아가면 다시 집으로 쳐들어왔다. 밤새도록 행패를 부리는 날이 하루하루 반복되어 갔다.

평소에 김병만과 송화자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오고 존경해오던 마을사람들은 송화자를 보호하려 애를 썼다. 폭력배들에게 찾아가“빚진 돈은 아들에게 받아야 한다. 여자들만 살고 있는 집에서 행패를 부리면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다.”고 꾸짖었다.

그러나 폭력배의 대장이 나서서“우리들도 행패를 부리고 싶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빚을 받아다 주어야 전주가 봉급을 주기 때문에 먹고 살려고 이런다.”했다.

이 말을 듣고 난 마을사람들도 폭력배들에게 할 말이 없어졌다. 더 이상 제지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면서“송화자가 복이 없어 다 늙어서 고생을 하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하면서“자식들은 많은 돈을 들여서 상급학교에 보내봐야 나쁜 짓 만 많이 배워, 이기주의가 되어 집안을 망해먹고 부모에게 불효한다.”고 수군수군 하였다.

믿고 의지했던 시어머니 정정숙이 세상을 떠났고, 이어서 남편 김병만까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장남이 술과 노름빚으로 속을 썩였다. 혼자서 어린 딸을 데리고 살아나갈 영심에게 주려고 모아놓았던 돈마저 빚쟁이들에게 빼앗겨 버리게 되었다.

영심, 매일 아침 "어머니를 낫게 해 주십사”하고 정성껏 축원을 드렸지만...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아들이 속을 썩여, 송화자의 건강은 나날이 나빠져만 갔다.송화자는 음식은 먹지 못하고 담배만 줄기차게 피워댔다. 남편이 잠들어 있는 봉두산을 쳐다보며 눈물로 지새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영심이 조성면 소재지에 있는 용하다는 한약방에서 한약을 지어다 먹이며, 병구완을 했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매일아침 일찍 일어나 부처님과 관음보살님께“어머니를 낫게 해 주십사”하고 정성껏 축원을 드렸지만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영심은 마지막으로 의지하고 있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버리자, 살아갈 앞날이 막막하여 어린 딸을 데리고 빈소를 떠나지 못했다. 밤 세워 울면서 날을 지새웠다.

영심이 정신을 차리고 송화자 영정사진 옆에서 깜박거리며 불을 밝히고 있는 촛불을 보았다. 어머니가 그리워“촛불 속으로 날아간 어미새”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

촛불 속으로 날아간 어미 새

나는 흰 뼈가

타는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타오르는 모습이

마치 새가 날아가려고

날개 짓 하는 것 같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홀로 두고 떠나 가야할

새끼 새를 못 잊어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참아왔던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내 어머니를 닮은 어미 새. 

불행 중 다행으로 마을 사람들이“평소에 마을의 대.소사에 많이 베풀어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던 분이 돌아가셨다.”고 애달퍼 했다. 행랑채에다 송화자의 빈소를 마련해주고, 장사에 필요한 물품 등을 준비해 주었다.

집으로 들어온 장남, 어머니 빈소에 들려 절도 하지 않은 채, 안방에 앉아 술만... 

그러나 장남은 면목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술을 먹느라고 못 오는 것인지, 어머니의 임종에도 참석하지 않고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마누라를 데리고 나타났다.

집으로 들어온 장남은 어머니 빈소에 들려 절도 하지 않은 채, 안방에 앉아 술만 먹기 시작했다. 다음날 면장을 비롯한 문중의 어른들이 찾아와 빈소에 들러보니, 맏

상주인 장남이 보이지 않자 장남을 불러서 “어머니 빈소에는 절을 올렸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어이가 없어 “마지막 가시는 어머니에게 절을 올리고, 상주 자리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으라”고 부탁하며 모두 빈소를 떠나버렸다.

보통 사람들은 전통적인 상가 예법에 따라 습이 끝난 후, 빈소에다 돌아가신 분의 혼백이나 신주를 모셔 놓았다. 제상에 술과 과일, 향안. 향로, 향합을 두고 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문상객의 조문을 받았다. 아침저녁으로 상식, 초하루, 보름에는 삭망전을 지내 세상을 떠난 망자를 위로하고 머지않아 먼 길 떠남을 애도했다.

그러나 장남은 정좌하여 문상객들을 받지 않고 술만 먹고 있어 마을 사람들이“집안을 망해먹고 어머니 속을 많이 썩였으니, 마지막으로 효도를 조금이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며“많은 돈을 들여 대학까지 보내 주었는데 배우지 못한 사람 보다 더 불효를 하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불효자식이 나와 큰 벌을 받을 것이다.”고 수군거렸다.“장남을 봐서는 문상을 오기 싫은데, 송화자가 불쌍해서 왔다.” 하였다.

후일 말이 씨가 되었는지, 장남이 낳은 3남2녀 자식들이 모두 어릴 적부터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만 좋아하였다. 대학을 가는 자식은 하나도 없고 술을 먹고 사고를 치거나, 심지어는 아버지와 싸움까지 하면서 아버지의 불효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효자 집안에서 효자가 나오고 불효자 집안에서 불효자가 나오는 것처럼, 자식은 아비를 보고 자라므로 아비가 잘해야 한다.”고 수군거렸다.

교장 사택에서 부유하게 부모님과 형제 사랑을 듬뿍 받고 공주처럼 예쁘게 자란 송화자... 

영심이 장애인의 몸이라, 예전에 집에서 같이 살았던 행랑어멈의 도움을 받았다. 조문객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등 노심초사 하고 있을 때, 뜻밖에 조성국민학교에 다닐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정선미 선생님이 찾아왔다. “몸이 불편한 제자 영심이 도와줄 사람도 없이, 혼자서 어머니 상을 치르느라 고생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왔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제자 3명을 데리고 일을 도와주러 왔다.

정선미 선생님은 어렸을 적부터 독실한 천주교신자였다. 남에게 베풀고 도와주는 봉사활동에 앞장서왔다. 선생을 하면서도 조성면을 비롯해 보성군에 있는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데 일생을 바치고 있었다. 시집도 가지 않고 좋은 일만 해오고 있어, 모든 사람이“마치 성모마리아가 현신한 것 같다.”하며 존경하는 훌륭한 분이었다.

영심을 보는 순간 정선미 선생님은 눈물로 껴안으며“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을 지고 태어나고, 그 짐을 다 벗으면 하늘에 계신 마리아님 곁으로 가게 된다.”“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좋은 일 하며 잘 살아야 한다.”고 타일렀다.

이러한 위로의 말씀에 같이 찾아 온 친구들도 영심을 위로하며 문상객들을 맞이하여 빈소로 안내하고, 음식도 날라주고 여러 가지 일을 거들어주며 3일장을 치렀다.

3일장이 끝나고 봉두산 밑에 있는 문중묘지로 상여가 출발했다. 자식들을 비롯한 일가 분들, 멀리서 문상을 온 지인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상여의 뒤를 따라갔다.

빈소에서 쓰러져 있던 영심이 문을 열고 쳐다보았다. 집안이 망해버려 할머니 상을 치를 때처럼 예쁘고 화려한 장식이 달린 꽃상여도 만들어 드리지 못했다.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의 슬픈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어머니 송화자는 아버지가 순천시 저전동에 있는 순천여고 교장을 지낸 교육자 집안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순천에서 국민학교를 다니기 전부터 교장 사택에서 부유하게 지냈다. 부모님과 형제의 사랑을 듬뿍 받고 공주처럼 예쁘게 지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에 순천공립고등여학교로 설립되었다가 1950년에 순천여자중학교와 순천여자고등학교로 분리된 순천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당시 순천여고의 순수와 정결을 상징하는 흰색교복을 입고 고등학교에 다녔다.

특별활동으로 문학반을 선택하여 시, 소설, 수필 등 문학에 관한 가르침을 많이 받고, 도서관에 있는“중세의 암흑을 깬 영혼의 시인이자 신곡을 통해 르네상스 문학의 지평을 열었다.”는 단테를 비롯한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베니스의 상인 등 영국의 시인, 극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셰익스피어 문학 작품 등 많은 책을 읽었다.

여고를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벌교에 사시는 중매인아저씨가 송화자의 아버지를 뵈러왔다. 장성한 송화자를 보고 송화자의 아버지에게“요즈음은 조혼이 대세인데, 마침 벌교 산등부락에 잘생기고 마음씨도 고운 밀양박씨 집안에 셋째아들이 있다. 배를 3척 가진 부자이니 중매를 서겠다.” 고 설명했다.(계속) 

/이용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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