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이 소설 '각시붕어'

먼저 토공들이 흙을 깎고 약간 경사지게 물매를 잡아 집터를 다듬었다. 그 위에 안채가 햇빛이 잘 들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남향집을 짓기 위해, 석공들이 대목수의 말에 따라 주춧돌을 놓고 차례로 집의 모형을 배치해 나갔다.

목수들이 기둥으로 사용할 나무와 마루판, 서까래 등에 사용할 나무를 톱과 대패, 끌, 짜구 등 기구를 사용해 하나하나 갈고 닦아 만든 다음에 주춧돌 위로 놓았다.

다음에 도리와 도리 사이에 서까래를 걸쳐놓아 지붕틀을 만들고 물매가 잡히자 기와가 미끄러지지 않고 보온이 되도록 진득진득한 황토 흙을 깔고 기와를 얹었다.

우리나라는 원래 나무로 기둥을 세운 다음 흙과 볏짚으로 벽을 만들고, 짚으로 지붕을 얹은 초가집을 짓고 살았으나 벌레가 생기고 짚이 썩어가 기와집으로 바꿨다.

김병만, 어머니가 인정이 많아 부처님이 커다란 복을 내려주신 덕택에 부자가 되고...

한 달 후에 덕천부락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큰집이 지어졌다. 대궐같이 큰집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정정숙이 인사드리며 음식을 대접했다.

집구경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은“어머니가 인정이 많아 부처님이 커다란 복을 내려주신 덕택에, 부자가 되고 아들 김병만이 장가를 들게 되었다.”고 소곤거렸다.

김병만은 평소에 알고 지내던 김복동을 상머슴으로 데려왔다. 추가로 쓸 머슴 둘은 김복동에게 뽑도록 맡겼다. 행낭어멈을 들여 어머니 정정숙의 시중을 들게 했다.

여기에 더해서 집안을 돌보고 일을 거들어줄 종들을 2명 두어, 말과 소 등 가축을 기르며 각종 과일나무를 심었다. 농사철에는 김복동을 도와 농사를 짓도록 했다.

새로운 집이 지어지자, 김병만은 양반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말을 한 마리를 샀다. 외출을 할 때에는 종에게 말의 고삐를 잡게 하고, 자신은 선비처럼 말총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검정색 갓을 쓰고 말위에 앉아 양반의 위엄을 지키며 천천히 다녔다.

비 오는 날 외출을 할 때에는 종들이 나무를 깎아 만든 높다란 나막신을 가져다가 댓돌위에 올려놓고 김병만이 진흙땅을 밟고 다녀도 발이 물에 젖지 않도록 하였다.

장가를 들기로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김병만은 의관을 정제하고 벌교 역전에 살고 있는 아저씨와 함께 장암리 산등부락 웃나루에 있는 송화자의 집으로 향했다.

송화자의 집에서는 남편을 잃고 재가를 떠나는 이별의 슬픔을 달래주고, 김병만과 잘 살기를 바라는 조촐한 결혼식을 올려주려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박선장이 고깃배로 고기를 잡아오면 집집마다 나누어줘 고맙게 생각

잔치가 끝나자 김병만은 그동안 송화자를 보살펴줘서 감사하다고, 장인 장모를 비롯한 일가 분들에게 한분한분 정중히 인사 올리고 웃 나루를 떠나 집으로 향했다.

송화자가 떠나는 길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루터까지 전송을 나와“잘 살으라.”고 소리치며 눈물을 흘렸고 송화자와 영문도 모르는 아기도 큰소리로 따라 울었다.

마을사람의 대부분은 떠나버린 박선장과 일가친척이 되었고, 박선장이 고깃배로 고기를 잡아오면 집집마다 나누어줘 고맙게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더욱 슬퍼했다.

어머니 정정숙은 김병만이 집으로 돌아오면 결혼식을 치러 주려고 며칠 전부터 종친 어르신들, 지인들, 마을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비록 김병만이 처녀장가를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존경을 받고 있는 정정숙의 체면을 생각해서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이 축하해 주며 성황리에 마쳤다.

다음날 동이 터오자 마자 송화자는 김병만과 함께 시어머니 정정숙에게 아침인사를 드리고, 부엌으로 나가 행낭어멈과 함께 아침식사를 지어 시어머니에게 올렸다.

송화자는 시어머니가 아침식사를 마칠 동안 밥상 곁에 다소곳이 앉아만 있었다. 시어머니가 말을 시켜보아도 대답 없이, 웃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바라만 보았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시어머니는 송화자가 아직 전남편의 주검을 잊지 못하고, 슬픔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잘 살아야한다”고 덕담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시어머니는 머나먼 타향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덕촌부락으로 시집온 송화자의 마음을 위로해 주려고 송화자를 데리고 마을 구경을 시켜주었다.

먼저 마을 앞에 있는 언덕으로 송화자를 데리고 갔다. 끝없이 펼쳐져있는 조성평야에 노랗게 황금색으로 익어가는 벼들을 보며 김병만의 논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자식들, 자라서 정상적인 생활 하지 못하고 속을 썩이면서 불행한 나날 

그러면서 시어머니 정정숙은 며느리 송화자에게 “ 모든 만물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성장하면 짝을 만나서 결실을 맺고, 자식들을 잘 키워 떠나보낸 후에 자신은 소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해 어린 딸을 잘 키우고 서방님에게 잘하고 이웃들과 잘 지내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타일렀다.

이렇게 시어머니는 송화자를 틈틈이 마을 공동우물터, 봉두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선녀탕, 아낙들이 길쌈하는 곳, 팽나무 밑 쉼터 등 여러 곳을 데리고 다녔다.

그러면서 송화자가 마음을 다잡아서 과거의 아팠던 상처를 잊고 잘 살아 가도록 위로해, 낯선 땅에서 잘 적응해 나가도록 많은 격려도 하고 배려도 하여주었다.

이러한 어머니 덕택에 김병만은 송화자를 매우 사랑했고 부부간의 금실도 좋아 2남4녀의 자녀를 두며 행복하게 살아, 마을 사람 모두 금실이 좋다고 부러워했다. 인생만사 호사다마라고 하는 것처럼 아버지 김병만은 행복하게 살아 왔지만, 자식들은 자라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속을 썩이면서 불행한 나날이 되어갔다.

여기에 믿고 의지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장남이 재산을 탕진해, 상머슴 김복동을 비롯한 머슴들과 종들도 집을 떠나고 직접 일을 하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렇게 불행했던 아버지의 과거를 회상하며 사흘 동안을 제각을 떠나지 못한 채,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날이 밝아오자 상여꾼들이 모여 채비를 하고 상여가 나갔다.

송화자와 자식들을 비롯한 일가 분들과 지인들, 동네사람들이 상여의 뒤를 따라가며 곡을 하였다. 영심은 불구의 몸이라 따라가지 못하고 슬픔에 혼절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 하늘을 쳐다보니 하얀 '낮달'이 떠있어 아버지를 회상하며 시를 읊었다.

빛에 가린 달

어릴 적부터 사랑을 주던

아버지가 보고 싶어

푸른 하늘 쳐다보니

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희미한 미소 짓고

나를 반기네

하얀 삶의 무게에 등이 휘어

빛에 가린 얼굴이

내 아버지 같은 낮달이네.

송화자, 마지막 재산 털어 발인하기 전날 밤 꽃상여 예쁘게 만들어 

상여는 사람이 주검을 맞이하고 나서 사후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매개채로 회화, 조각, 매듭공예, 지승공예가 집약된 종합예술품이었다. 보통 상여는 마을사람 공동으로 쓰기 위해 만든 목상여, 장강을 빼고 불살라 버리는 일회용 꽃상여가 있었다.

공동으로 쓰는 상여는 마을 상조계에서 마을과 멀리 떨어진 상여 집에 보관했다. 송화자는 마지막 재산을 털어 발인하기 전날 밤에 꽃상여를 조립해 예쁘게 만들었다. 상여꾼을 뽑아 밤을 새워 뒷소리를 하고 발을 맞추는 예행연습을 해 나갔다.

송화자는 김병만이“좋은 곳으로 가시라는 염원을 담아”꽃상여 장강위에 대나무 몸틀을 세우고 그 둘레에 오색 지화와 흰 지화를 달아 화사하게 치장해 주었다.

김병만의 상여가 나가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 했다. 먼저 관을 상여에 결박해서 어깨에 메고 집을 떠나면서 망자의 애통함을 표현하는 서창소리를 했다. 그리고 상두꾼들이 상여를 메고 길을 가면서 부르는 행상소리, 장지에 이르러 상두꾼들을 재촉하는 등 상여 나가기 종반부에 부르는 자진상여소리, 관에 흙을 덮고 다지며 부르는 달구질소리 등을 부르고 중간에“에헤 에헤야 어화넘자”등 소리를 넣었다.

송화자는 뒷산에 있는 봉두산의 가족묘지에 김병만의 산소를 마련했다. 조상묘지의 동북쪽에 자리를 마련해 육전, 어전, 떡, 면 등 제수를 차려 산신제를 지냈다.

산신제는 후사토라고도 하는데 조상묘지가 있는 산의 신에게 새로운 사자가 왔으니, 잘 대해 보살펴 달라고 지내는 제사로서 묘사나 상주 등이 제주가 되어 지낸다.

산신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하에 있으므로 분향은 하지 않고, 먼저 강신으로 뇌주재배를 했다. 다음에 참신재배를 하고, 초헌(헌작, 정저, 부복, 독축, 초헌재배) 아헌을 거쳐 철주, 종헌, 하저, 사신재배 등의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진행하였다.

산신제의 제주는 벌교역전 앞에 살고 있는 김병만의 아저씨가 맡아서 해 주었다. 산신제를 지내고 나서 꽃상여를 불태우고 귀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묘를 손질하고 있는데, 장남이 많은 술을 먹고서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져 통곡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아버지의 속을 많이 썩여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며 묘 앞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어대자, 많은 사람들이 말렸으나 해가 넘어 갈 때 까지 울고 있었다.

김병만,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주검을 맞이한 후에도 장남은 노름만 

김병만이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주검을 맞이한 이후에도, 장남은 노름을 그만두지 못했다.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탕진해 버리고, 결혼한 딸들도 이혼을 하거나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 죽도록 고생하는 등 자식들은 계속해 송화자 속을 썩였다.

견디다 못한 송화자는 답답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며, 몸이 자꾸 쇠약해져 갔으나 어느 누구도 답답한 마음을 헤아려 주는 자식은 없었다.

영심은 자신을 보살펴줄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몸져누워 계신데 오빠는 재산을 탕진해가자, 어린 딸을 데리고 살아갈 길이 막막해져 베를 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린 삼을 구입해가지고, 앉기에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고통을 참아가며 삼으로 실을 만들어 베틀에 앉았다. 발가락을 간신히 끌신에 묶고 삼베를 짜보았다.

아무도 베 짜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어렸을 적부터 베 짜는 방법을 배운 사람처럼 베를 짰다. 어찌나 품질이 좋은지 사람들은 “직녀가 짠것 같다”고 했다.

영심이 베를 짜는 모습을 쳐다본 사람들은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하루 종일 구경하였다. 앞자리에서 자세히 구경하며 베 짜는 방법을 배우려고 자리다툼을 해 댔다.(계속)  

/이용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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