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이 소설 '각시붕어'
아버지 김병만은 사랑하는 딸 영심이 어려서 몸이 아파 전국에 좋다는 한약은 모두 써보고 갖은 애를 썼다. 치료하지 못하고 불구자가 되어 버려 가슴이 아팠다.
영심을 처녀귀신을 면케 해주려 백방으로 알아보고 많은 돈을 써가며, 사위를 골라 시집을 보냈으나 딸을 낳았다고 신랑에게 구박을 받고 생이별을 당해버렸다.
그 시절에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농사일을 돕게 했다. 김병만도 자식을 6남매 두었으나 장남만 순천에 있는 농업전문대학에 보냈다. 장남에게 가문의 모든 희망을 걸고, 나머지 자식들은 국민학교를 마치고 머슴들과 함께 농사일을 해나갔다. 그리고 소, 돼지, 닭 등 가축을 돌보는 일을 해야 했다.
"부처님이 계신다면 장남이 정신을 차려 술과 놀음을 끊고 새로운 삶을 살아, 예전처럼..."
이렇게 장남은 자라나면서 부모로부터 형제, 자매들과 다른 특별대우를 받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보내주고, 좋은 옷과 책가방, 자전거를 사주었다. 중학교 때 부터는 학교 옆에 하숙집을 정해주고 용돈을 많이 주었다. 집안 행사가 있을 때나 다른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가져오면, 아무도 모르게 감춰놓고 장남에게만 주었다.
그러나 장남은 이런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겉으로 내색은 못했지만 같이 자라고 있는 형제. 자매에게“매우 미안하다”생각하고 장남이 된 것을 후회하며 살아왔다.
여기에 남동생이 형님만 계속해 학교에 보내 주고, 자신은 머슴들과 같이 지내면서 농사를 지으라하며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데 불만을 품고 형님과 의절해 버렸다.
장남은 후회가 지나쳐 주체하지 못하고 말을 잃은 채 지내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아버지 몰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 어머니의 우울증을 닮아 혼자서 대성통곡 하였다. 대학 졸업 후 읍내에 있는 직장에 다니면서부터는 마음 놓고 술과 노름에 빠져, 친구와 직장 동료들을 불러 밤새도록 놀아나며 재산을 탕진하였다.
김병만이 장남에게 노름을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장남의 노름빚은 매일매일 늘어갔다. 빚쟁이들이 김병만의 집으로 찾아와“아들 빚을 갚아달라”고 행패를 부렸다. 하는 수 없이 김병만은 빚을 갚아주기 위해, 목숨처럼 아껴오던 논을 한 마지기씩 한 마지기씩 팔기 시작했다. 죽기 직전에는 모든 논을 팔아버려 빈털터리가 됐다.
김병만은 논을 모두 팔아버리고 절망에 잠겨있었다.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고 있던 차남이, 장남만 학교에 보내주고 자신은 국민학교밖에 보내주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했다. 더 이상 배울 수 없다는 운명을 한탄하며, 28세가 되던 해에“미래에 희망이 없다”고 절망에 빠져 스스로의 삶을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첫째 딸과 둘째 딸은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서 많은 고생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막내딸은 신랑 집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해가지고 이혼을 하였다.
이렇게 삶이 어려워지자, 김병만은 머슴들을 모두 내보내고 마누라와 함께 농사를 지어 생계를 지탱해 보려고 애를 썼다. 장남은 정신을 못 차리고 술에 빠져 지냈다.
김병만은 하늘을 쳐다보면서“남들에게 매정하게 한 적도 없고 어려울 때 베풀면서 살아왔는데, 부처님께서 이다지도 가혹한 벌을 내리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부처님이 계신다면 장남이 정신을 차려 술과 놀음을 끊고 새로운 삶을 살아, 예전처럼 집안을 일으키고 동생들을 돌보며 존경받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제는 누구를 믿고 살아가야 할지, 앞날이 '캄캄'
김병만이 평소에 해보지 못한 농사일을 하면서, 남들이 쳐다보면 기가 막혀 말도 못했다. 생가슴만 앓다가 몸이 점점 쇠약해져 결핵균이 침범해 나날이 말라갔다.
어느 날 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데, 지나가던 한의원이 김병만에게“폐병이 온 것 같으니 잘 먹으면서 치료를 잘 받아야 살아갈 수 있다.”하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김병만은 가족들에게, 한의원이 해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혼자서 폐병을 치료하려고, 들판에 나가 '독사'를 잡아 병에 넣고 소주를 부어 밀봉을 했다.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니는 대문 앞에 100일 동안 묻어둬 '사주'를 만들어 약으로 먹었다.
폐병에 좋다는 여러 약초를 구해와 삶아먹고 갖은 애를 써 보았다. 해보지 않은 농사일을 해가며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 장남은 정신차리지 못하고 술과 노름을 계속했다. 많은 빚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속을 썩였다.
김병만은 56세가 되던 해 가을,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해주었다고, 부락 사람들이 행낭채 안에 빈소를 마련해 주었다.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장남은“내가 불효를 해서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다”며 가슴을 치고 통곡을 했으나, 여전히 노름빚이 많아서 헤매고 있었다.
아버지만 의지하고 살아오던 영심이“이제는 누구를 믿고 살아가야 할지?” 앞날이 캄캄해졌다. 상복으로 갈아입고 빈소에 들어가, 밤새워 울면서 여러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 새벽에 먼동이 터오자, 영심은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었던 은혜에 감사드렸다. 천당에 가시라고 '중천'이란 시를 읊으며 아버지의 일생을 회고해 보았다.
중천(中天)
음습한 물안개 사이로
사막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는
일곱 개의 잿빛 구름장벽
구름의 그물망에 갇혀
지상과 천상 사이에
매달려 있는 영혼들
이승에서 쌓인
시리도록 아픈 상처,
몸부림치는 고통의 시간들
하나의 관문에 이레 동안 머물며
하얀 영혼으로 표백될 때까지
잉태된 악연의 씨앗을 씻어낸다
환생(還生)을 위해 천상계단 오르거나
천인(天人)으로 남기위해 기억을 지우고
또다른 태(胎)를 찾아 떠나는 길.
김병만은 조성면 덕촌부락에서 가난한 유학자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통 유학자로서 집이 가난하였기에 끼니를 굶기 일쑤였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일을 해서 돈을 벌어와, 가족들을 부양 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끼니를 굶더라도 매일 매일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도포를 단정히 입고 정좌하여 책만 읽었다.
어느 가을날 어머니는 수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추수를 마친 논으로 달려갔다. 이삭을 주워 모아 덕석에 널어 말리고 있었다. 도중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선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공부만 해야 한다”
어머니가 밭에서 함께 잡초를 매고 있던 김병만에게“집으로 뛰어가 덕석위에 널어놓은 이삭이 비에 젖지 않도록, 걷어다 마루위에 잘 펴서 널어두어라”고 일렀다.
“집에 아버지가 계시니 비설저지를 해 놓을 텐데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불평을 하면서 집으로 달려갔다. 덕석 위의 벼이삭이 굵은 빗줄기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벼이삭을 주워 나르려고 마루를 쳐다보니, 아버지가 정좌하고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는 김병만이“아버지,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큰소리로 외쳤다. 아버지는“선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공부만 해야 한다.”고 했다.
김병만이 화가 날대로 났다. 아버지에게“소나기가 와 벼이삭이 모두 떠내려 가버리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아갑니까?”하고 언성을 높여 나갈 때 어머니가 오셨다.
어머니는 무책임하게 앉아만 있는 아버지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김병만에게“아버지에게 큰소리로 불만을 토로했으니, 잘못했다고 사과하라.”하고 꾸짖었다.
어이가 없는 김병만이“어버지가 잘못한 것을 보면서도, 저만 꾸중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하고, 아버지가 의무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하나 비판했다.
어머니는“아버지가 유학자라서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니, 절대로 아버지에 대해 잘잘못을 입에 담지 말고 무조건 편안하게 모시라.”했다.
김병만이 마을에 같이 살고 있는 동무들에게 놀러 가면 동무들은“김병만이 떨어지고 더러워진 옷을 입고 다닌다.”고 놀아주지 않고 다른 곳으로 놀러가 버렸다.
아버지를 잘못 만나 집이 가난한 이유로 함께 자라난 동무들에게도 무시당했다. 김병만은 어머니가 걱정하실까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고 혼자 팽나무와 놀았다.
물론 김해김씨의 자자일촌인 덕촌부락에는 일가 겸 동무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사는 김병만을 누구하나 상대해주지 않아 혼자서 지내야 했다.
“딸을 보내면 굶고 살면서 시어머니를 모시는 고생을 한다”
김병만은 어렵게 살아가면서“사람의 가치는 부에 의해서 결정된다. 어떻게 해서나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니를 편히 모시고 커다란 집에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김병만은 굶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아버지가 읽으라는 책은 읽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서 한 푼 한 푼 돈을 모아보았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는 총각이 20세가 넘어가면 장가를 갔지만, 김병만은 장가를 갈 수가 없었다. 낙담을 하고 있던 차에, 벌교역전에 살고 있는 아저씨가“산등부락에 사는 부잣집의 애 딸린 과부를 부인으로 데려가면 많은 돈을 주겠다.” 한다고 연락이 왔다.
작년에 몸이 약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책만 읽으며 지내던 김병만의 아버지가 5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30세 노총각 김병만이 생계를 꾸려갔다.
김병만은 장가가 가고 싶어, 여기저기에 매파를 보내 보았다. 집이 가난하다고 소문이 나“딸을 보내면 굶고 살면서 시어머니를 모시는 고생을 한다.”고 거절당했다.
가난한 집에서 매일매일 일만하며 살아온 김병만은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장가도 들고 돈도 많이 벌기위해, 부잣집 과부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아저씨에게 무능력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신이 노모 한분만 모시고 죽도록 일만 해 왔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형편을 이야기하며 “중매”를 부탁드렸다.(계속)
/이용이(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