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이 소설 '각시붕어'

결혼 축하객들은 모두 떠났다. 신부 김영심은 신랑 고석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자시를 넘어 축시에 접어들어 가자, 머슴들이 고석병을 찾아 나섰다.

집안 곳곳을 찾아보니 고석병은 소 외양간 뒤에 있는 앵두나무 밑에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다. 칠복이가 흔들어 깨워 보았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정신없이 있었다.

술을 워낙 좋아하는 고석병은 결혼식장에서부터 하객들이 따라주는 술을 모두 마셨다. 하객들이 돌아간 뒤에는 아예 술병을 가지고 혼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막내머슴 칠복이가 인사불성이 된 새신랑을 등에 업었다. 신부 방으로 가면서 “우리 어여쁘고 착한 영심 아씨가 참으로 가엾다.”하며 눈물을 흘렸다.

꿈속에서 영심은 마음속에 그리며 보고 싶어 눈물 흘렸던 짝사랑을...

영심은 신부복과 족두리를 벗지 않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심은 술을 먹고 쓰러져 등에 업혀온 새 신랑을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영심은 신랑이 술 깨기를 기다리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꿈속에 자신이 고석병이 아닌 누군가? 애타게 사랑했던 기억이 안개처럼 희미하게 떠올랐다.

꿈속에서 영심은 베를 짜는 일을 열심히 돕고 있었다. 그 다음 기억 속에 아주 잘생긴 남자를 마음속에 그리며, 보고 싶어 눈물을 흘렸던 짝사랑의 시절이 생각났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자세히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알 수 없었다. 천상에서 하계로 내려 올 때, 서왕모가 남자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렸기 때문이었다.

밖에서는 전래풍습에 따라 “문에 붙어있는 창호지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고, 신랑이 신부의 족두리를 벗긴 후에 신부복을 벗기는 장면”을 몰래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신랑이 술에서 깨어나지 못하자, 구경꾼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혼자서 날을 지센 영심이 신방 문을 열고 쳐다보니, 담장 밑에 붉은 “꽃무릇”이 피어있었다. 답답한 마음을 부여안고 “연인을 찾아 피눈물을 흘리는 꽃무릇 시”를 읊었다.

꽃무릇

사랑을 못 잊어

그리운 마음 한가득 담아

캄캄한 흙무덤을 뚫고

촉촉이 내리는 빗속에서

시리도록 새빨간 화장을 하고

가녀린 목을 내밀어

임 찾아 먼 산을 바라보며

날이 지새는 줄 모른다

기다리다 지쳐

방울방울 그리움의 피를 토하고

점점 희멀건 얼굴 되어

마침내 스러져 버리는

나는 꽃무릇 이다. 

영심을 짝사랑 하면서도 겁이 나서 말을 못한 칠복이...

신방 앞을 떠나면서 칠복은 홀로 눈물을 훔쳤다. “예쁘고 착한 영심을 술주정뱅이한테 보낼 바에는, 영심을 좋아한다고 김병만에게 이야기할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영심이 장애인이 되어버린 후, 급한 일이 생기거나 면소재지에 크레용, 연필, 공책 등 문방구류를 사러갈 때마다 칠복이 업고 다녔다. 어느 틈에 정이 들어버렸다.

이렇게 칠복이 영심을 짝사랑 하면서도 그 당시의 관습이 “머슴이나 종은 주인댁의 누군가를 연모하면, 덕석말이를 한 후에 내쫒는다.”고 겁을 주어서 말을 못했다.

칠복이 혼자서 부엌에 들어가 술 한 병을 가지고 나왔다. 집 옆으로 흐르는 개울가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술을 마셨다. 하늘을 쳐다보니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칠복은 원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버지는 유학자라 일은 않고, 도포를 입은 채 책만 읽고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양식을 구해 왔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먹여 살리려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 왔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칠복은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과거에 양반일지라도 가세가 기울어 일을 하면서 살아가면, 그때부터 농민으로 전락 해 버렸다. 아무도 양반대접을 해 주지 않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칠복은 어렸을 적부터 가난한 양반집에서 살아왔다. 배고픈 설움을 뼈저리게 겪어왔다. 자신이 양반의 후예임을 감추고 농부처럼 머슴을 살면서 지내오게 되었다.

김병만, 고석병에게 "결혼식 날부터 사흘밤낮으로 술만 먹었다는데 몸은 괜찮으냐?"

새신랑 고석병은 누구하고 어울리거나 대화를 하지 않았다. 신방에 들어앉아 매일 밤낮으로 눈만 뜨면 “술을 가져오라” 했다. 사흘밤낮을 혼자 마시며 지내고 있었다.

칠복이가 술을 가져다주면서 고석병에게 “술은 그만 드시고 집안이라도 한번 둘러 보시죠”하고 권했다. 그러자 고석병은 “머슴 주제에 까불지 말라”고 화를 내었다.

김병만을 비롯한 모든 집안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 했다. 영심을 생각해 꾹꾹 참아내면서, 고석병이 요구하는 대로 술시중을 들기에 급급하였다.

이렇게 사흘을 지내고 아침이 되어 신랑을 찾아보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김병만은 상머슴 복동을 비롯한 머슴들에게“ 찾아 보라”고 했으나 찾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김병만이 벌교역전 근처에 살고 있는 아저씨에게 “사위가 된 고석병이 살고 있는 장수저수지 마을로 가, 집에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사람을 보냈다.

김병만의 아저씨가 고석병의 집을 찾아갔다. 이엉으로 엮어 놓은 담장너머로 집안을 살펴보았다. 고석병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마당에서 닭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김병만의 아저씨가 고석병을 불러내“결혼식 날부터 사흘밤낮으로 술만 먹었다는데 몸은 괜찮으냐?”고 물었다. 고석병이 웃으며 “무탈 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어서 아저씨가 “장모가 시가집에 인사 음식을 보내려고 준비를 해 놓았는데, 말없이 떠나버려 전달하지 못 했다”고 “섭섭해 하더라고 말했더니, 괜찮다”하였다.

아저씨가 고석병에게 “장모 송화자가 인사음식을 보내고 싶다고 전하더라.” 했다. 고석병이 “아저씨가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노부모와 본래부인과 딸 셋이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영험한 절에가 치성을 드리는 것 밖에 없다”

“노부모는 손주를 보려고 새장가를 보내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도 시앗을 보면 돌아앉는다.”는 옛말처럼 “본부인이 싫어할 것입니다.”하며 반대를 하였다.

김병만은 벌교 아저씨로부터 “고석병이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더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송화자와 가족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송화자는 사위 고석병이 언제쯤 영심을 보러올지 궁금해졌다. 김병만에게 “그러면 사위는 언제쯤 다시 온다고 했나요?”하고 물으니 “가을 추수가 끝나고 온다.”했다.

송화자는 사위 고석병이 마음을 다잡고, 영심에게 자주 올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영심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은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고 생각하였다.

주위의 지인들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영험한 절에가 치성을 드리는 것 밖에 없다.” 고 말했다. 수소문해 본 결과 순천에 있는 “송광사”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후 송광사에 가는 길을 알아보았다. “주소는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로 되어 있지만, 보성이나 벌교 또는 순천에서 갈 수 있고 벌교에서 가야 가깝다.” 했다.

새벽에 쌀 다섯 되를 머리에 이고, 조성역으로 가 벌교행 기차를 탔다. 벌교역에 내려 우마차를 얻어 타고, 한 번도 본적이 없던 많은 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갔다.

산에는 커다란 청룡과 황룡이 서로 껴안고 뒤엉켜서 하늘을 나르며, 구름을 희롱하는 것 같은 길 다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서 있었다. 소나무들 옆으로는 도토리 6형제라 불리는 떡갈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들이 사이좋게 자랐다. 그 나무들은 제 각각 모양새가 다른 열매들을 매달고 있었다.

그렇게 하늘높이 자라고 푸르른 나무들을 쳐다보며, 영심이도 하루빨리 임신을 해서 많은 아들 딸을 낳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영심이 아들만 낳으면 모든 근심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하시라도 빨리 부처님에게 달려가 “영심에게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백팔 배를 올리고 싶었다. 마음이 바빠졌다.

우마차는 추동을 거쳐 흙먼지를 잔뜩 일으키며, 자갈로 포장된 꼬불꼬불한 산길을 힘들게 갔다. 월암을 지나 이읍에 도착 해, 그곳에 내려 송광사 앞으로 걸어갔다.

남성으로 태어나 모진풍파를 겪고 살다 세상을 떠난 영가

아무도 다니지 않는 산길을 지나 절 앞에 도착했다. 송광사에 오는 분들은 먼저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의미를 지닌 “무소유”라는 조용한 산길이 이어져 있었다.

높이 솟아 있는 커다란 참나무 위에는 까치들 몇 마리가 앉아 있었다. 어미를 잃고 찾아 헤매는 고아들처럼 “까악, 까악” 귀가 따갑게 큰소리로 울어대고 있었다. 송화자는 까치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영심이 떠올랐다. 영심에게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부처님께 빌기 위해 지쳐버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이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처음으로 반겨주는 것은 신성한 영역이 시작됨을 알리는 일주문이었다. 조선후기 건축양식으로 특이하게 편액이 종서로 쓰여 있었다. 조금 더 가니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라는 돌 표지판이 언덕아래 홀로 서있었다. 계속 걸어가니 좌측에 “조계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었다.

물위로 커다란 돌을 하나하나 깎아서 정성스럽게 만들었을 것 같은, 조그마한 돌다리가 나왔다. 다리위에 “청량각”이라는 조그만 전각이 외롭게 홀로서서 반겼다.

청량각은 송광사 입구에 있어 “맑고 시원하게 씻어주는 문설주란 뜻을 가지고 있다.”했다. 계곡 물위에 홍예(무지개)다리를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올려 만들었다.

청량각을 지나 오른쪽에 관욕처인 “세월각과 척주당”이 보였다. 죽은이의 위패를 모셔두고 속세의 때를 씻어내, 영혼이 구천을 떠돌며 고통을 겪지 않게 해주는 곳이었다. 여성으로 태어나 삶을 살다 어려움을 겪었던 여성들의 영가는 세월각에 두고, 남성으로 태어나 모진풍파를 겪고 살다 세상을 떠난 영가는 척주당에 모셨다.(계속)

/이용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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