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이 소설 '각시붕어'

영심은 아버지 김병만이 전국 각지에서 구해온 값이 비싼 한약을 먹었다. 겨우 건강을 회복해 정신을 차렸다. 하체가 마비돼 장애인으로 지낸지도 10여년이 지났다.

영심은 여전히 일어서지 못했다. 화장실을 갈 때에도 상체만 일으킨 체, 두 팔로 몸을 끌면서 기어갔다. 방을 나오면 마루위에 매달려 있는 줄을 잡고 내려 다녔다.

이렇게 애처롭게 마당을 기어 다니는 영심을 보았다. 아버지 김병만은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에 쌓였다. 농사일은 상머슴에게 맡겨놓고 전국으로 약을 찾아 나섰다.

먼저 조성 장터에서 각종 생선을 파는 주인을 만났다. “광주에도 생선을 팔러 다니는데, 광천교 옆에 있는 광천당 한약방이 용하다고 소문이 났다”고 말해주었다.

기차 안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아프리카 흑인처럼 새까맣게... 

김병만이 광천당 한약방을 여기저기에 수소문 해보았다. 아침도 먹지 않은 체 덕촌부락 집을 나섰다. 커다란 아외나무가 있는 조성역으로 가, 광주행 기차를 탔다.

기차는 조성역을 출발해 예당역을 지나갔다. 득량면에 있는 높은 산마루고개인 “그럭재”를 넘어가야했다. 힘이 들어 연신 꽥꽥거리더니, 끝내 넘어가지 못했다.

예당역까지 후진했다. 예당역에 있는 물 탑에서 기차에 물을 넣었다. 연료로 사용되는 석탄도 가득 실었다. 계속 불을 때, 수증기 압력을 높여서 간신히 넘어 갔다.

무척이나 긴, 그럭재의 터널을 지나갔다. 기차가 고개를 넘어가면서 힘들다고 연신 석탄가루를 내뿜었다. 새까만 석탄가루가 눈가루처럼 객실 안으로 날아왔다. 터널을 지나자, 기차 안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아프리카 흑인처럼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높은 산마루에는 인적이 끊기고 숲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곳에 철로는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나가는 나이 들어 보이는 차장에게 물어보았다.

차장은 질문을 받고 “이렇게 험한 산속에는 우리나라 인부들은 위험하다고 오지 않는다. 임금도 싸고 일을 가리지 않는 중국꾸리(인부)들이 공사를 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시절, 중국은 인구는 많은데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다. 일을 할 수 있는 직장도 부족했으며, 전쟁이 자주 발생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중국의 가난한 농민을 비롯해 중국인들은 일자리가 없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꾸리라 불리며 위험한 일을 많이 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공사 기간 동안, 그럭재 밑에 있는 여러 마을에서 반찬을 얻어먹었다. 특히 대밭골에서 된장과 양파를 얻어갔다. 빵과 함께 먹었다”고 설명하였다.

보성역에 가까워지면서부터 차창 주변으로 논.밭이 많은 평야지대가 계속되었다. 시장기를 느낀 김병만이 떡장수를 불러 떡을 사 먹었다. 떡장수가 삼각형으로 된 비닐팩에 노란물이 담겨진 “오렌지 물”을 주었다. “목마를 때 같이 먹으라.”하였다.

마침 목도 마르던 터라, 김병만이 오렌지를 받아 마셨다. 떡장수가 “오렌지 물값은 별도이니 돈을 달라”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양반체면에 군소리 못하고 돈을 주었다.

보성역을 출발해 천천히 달렸다. 기다란 철교가 나오고, 철교 밑으로는 넓고 깊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옆 사람에게 “이게 무슨 철교 입니까?”하고 물어보니, “광곡 철교”라고 대답했다. 섬진강 줄기인데, 보성평야의 농사를 짓는데 사용되고 있었다.

"두꺼비 섬 자를 붙여 섬진강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섬진강은 전라남도와 북도, 경상남도 등 3도에 걸쳐 흐르고 있다.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팔공산 계곡에서 발원해, 북서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섬진강의 이름은 모래가 곱다고 하여 붙여졌다. 두치강, 모래가람, 모래내, 다사강, 사천 등으로 불리었다. “고려 우왕시대에 섬진강하구로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었다. 왜구가 놀라 광양 쪽으로 피해갔다. 이때부터 두꺼비 섬 자를 붙여 섬진강으로 부르게 되었다. 는 전설이 내려왔다“고 말했다.

기차가 광곡 철교를 지나 간이역인 명봉역에 도착했다. 아름드리 고목이 된 벚나무와 빨간 꽃의 키가 큰 칸나, 봉숭아, 백일홍 등을 비롯해 많은 꽃이 피어있었다.

명봉이란 이름은 “명봉천을 사이에 두고 암, 수 봉황이 서로 그리워 우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형국이라, 풍수지리학적 지명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 설명해주었다.

남녀가 유별이라 만나기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광주, 보성읍 등 도시에 사는 젊은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경치가 좋은 명봉간이역에서 비밀히 만남을 즐겼다.

명봉역 근처에 사는 농부들은 봄철부터 맛있는 딸기를 키웠다. 수확 철에 찾아오는 남녀들에게 비싼 값에 딸기를 팔았다. 시골이지만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명봉 간이역을 출발해 “이양”이라는 역에 도착했다. 지명이름이 이상해 물어보니 “이양마을은 배가 많이 생산되었기에, 오얏골이라는 명칭에서 전래되었다”고 했다.

“예전부터 전라남도 장흥군과 보성군의 갈림길에 있었다. 주막과 여관이 많이 있었고, 이에 따라 장이 형성 되 상업이 발달했다. 장터라 불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양역을 출발해 지석천을 끼고 한참을 달려갔다. 높다란 메작골산과 충신봉이 보였다. 지석천 건너편으로 높이 솟아있는 개머리산이 보이는 “능주역”에 도착했다.

능주면은 화순군의 중서부에 있었다. 지석천이 흐르는 주변으로 펼쳐진 평야지대는 밭이었다. “맛좋은 복숭아들이 많이 생산 되, 광주 등지에 인기가 높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인조왕의 생모, 인헌왕후의 관향이었다. 인조 즉위 후 목으로 승격, 정삼품 목사를 파견했고, 목사골로 불려 위세를 떨치는 지역이 되었다.”고 했다. “능주에는 조선시대 문화유산이 많이 있다. 선조 26년에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충의공 최경회 장군, 지평 문홍헌장군, 을묘왜변 때 왜적과 싸우 다 전사한 장군들의 충정을 기리는 삼충각 등 꼭 한번 가 볼만한 곳이다.”고 알려주었다.

기차는 능주역을 지나갔다. 지석천의 맑은 물에 투영되어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려놓은 듯 한 영벽정이 나타났다. 김병만은 빼어난 경치에 찬사를 보냈다.

그래서 김병만이 앞자리에 앉은 분에게 “영벽정이라는 이름은 왜 붙여 졌을까요?”하고 물어보니 “영벽정은 맞은편에 있는, 구슬이 연이어 있는 듯 한 모습의 연주산이 지석천의 맑은 물빛에 비춰지며 자태를 뽐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했다.

화순역에 도착했다. 김병만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역전에는 많은 철로가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화순이 무엇으로 유명해, 기차가 많이 다닙니까?” 물었다. 

"어려운 일에 봉착해 소원을 빌고 싶을 때 치성을 드리면 효험이 높다"

그랬더니 “화순은 광주와 보성, 순천, 장흥 등 남쪽의 시, 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다. 교통, 상권이 발달해 사람이 많이 모인다. 관광자원도 많이 있다”고 했다.

“특히 화순적벽은 높이 80미터에 직각으로 깎아지른 듯 솟아있다.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는 모습이 중국의 적벽에 버금가게 예쁘다”고 자랑스럽게 설명을 해주었다.

“적벽은 동복천의 상류인 창랑천유역과 무등산에서 발원한 영신천이 합류되어 흘러간다. 그 물줄기가 태고의 절벽을 깎아내, 강 유역에 크고 작은 수려한 절벽들을 만들어 내었다”고 적벽의 역사와 태동하게 된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다음으로 신선들이 내려와 천개의 불, 탑을 만들었다는 운주사가 있다. 만들다가 새벽이 되어 돌아가야 해, 앞산 중턱에 있는 한 쌍의 와불은 미처 세우지 못 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깊은 산속에 천개의 불탑은 누가 세우려 했을까? 정말 신선들이 세우려고 했는지, 아님 우주에서 날아온 어떤 외계 문명인이 세우려 했는지? 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아무튼 천불 천 탑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진 운주사는 화순군 도암면의 천불동 계곡에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어려운 일에 봉착해 소원을 빌고 싶을 때 치성을 드리면 효험이 높다”고 알려주었다. 기차는 한 시간 동안에 걸쳐 화순역에서 물과 석탄을 가득 넣었다. 휴식을 취한 다음에 남평역으로 출발했다. 남평은 넓은 평야지에서 배추, 열무, 무 등 많은 야채를 재배하고 있었다.

남평역에 도착했다. 밭에서 갓 수확해서 싱싱한 야채를 팔려고, 커다란 보자기에 넣어 머리에 이고 아낙네들이 왔다. 먼저 기차에 오르려 시끄럽게 다툼을 벌였다.

기차에 오른 아낙네들은 광주 시장으로 야채를 팔러 가는 길이었다. 야채가 매우 싱싱했다. 기차에 타고 있는 승객들과 사고파느라 때 아닌 북새통을 만들었다.

남평역을 출발한 기차는 터널과 다리를 건넜다. 간이역처럼 조그마한 효천역이 나왔다. 광주학교에 가는 학생들이 자취생활에 필요한 김치항아리 등을 들고 탔다.

효천역을 지나 얼마가지 않아 광주역에 도착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좌측 편 멀리에 무등산이 높이 솟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높다란 빌딩들이 많이 보였다.

역원에게 “광천당한약방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역원이 “광천당한약방은 전국에 소문이 나,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길을 알려 주었다.

영심은 20살이 되었지만 일어서서 걷지 못해...

역 전 앞에서 광천동 가는 길을 물었다. 넓은 도로변에 즐비하게 서있는 빌딩숲을 지나 한참을 갔다. 광주의 명동이라고 불리는 넓고 잘 정리된 충장로가 나왔다.

충장로를 지나 광천동에 도착해, 광천당한약방을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이 “광천동동사무소를 지나, 광천교 쪽으로 가면 언덕아래 광천당한약방이 보인다.”고 말했다.

광천당한약방을 들어가 보니 전국에서 찾아온 환자들이 붐비고 있었다. 한의원을 도와주는 보조의원 2명과 약을 제조하는 약사2명, 약을 써는 한의사 2명이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조의원이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영심의 아픈 상태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병증의 내용을 적어가지고, 한의원의 진료실로 안내했다.

먼저 한의원이 조수가 정리한 병증을 읽어 보았다. “영심의 나이와 언제부터 아팠는지, 약은 무슨 약을 썼는지” 자세히 물어보았다. 처방전을 써주며 설명해 주었다.

영심은 20살이 되었지만 일어서서 걷지 못했다. 두 팔을 다리삼아 기어 다녔다. 학교도 다니지 못하는 장애인이 된 것을 슬퍼하며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조성면장이 김병만의 집을 방문 했다. 영심이 장애인의 몸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을 애처롭게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글이 시처럼 예쁜 것을 보고 “읽어보라” 했다.(계속 이어짐) 

/이용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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