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전북대학교 고(故) 이세종 열사가 '5·18 민주화운동 첫 희생자'란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무려 44년 만이다. 이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이 광주·전남에서 전북을 포함한 전국적인 민주항쟁으로 시간적·공간적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평가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의 중심인 광주의 변방 취급을 받아왔던 전북지역에서 첫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점이 공식 인정됨으로써 전북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묻혀진 과거 진실들을 다시 발굴할 가치가 높아졌다.
11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980년 5월 18일 민주화운동 당시 최초 희생자가 전북대학교 농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이세종 열사(당시 20세)인 것으로 조사돼 ‘5·18민주화운동 사망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에 등재했다고 밝혔다.
5·18 최초 희생자, '5월 19일 오전 11시 사망 광주시민 김경철 열사' 아닌 '5월 18일 새벽 1시 40~50분 사망 이세종 열사' 뒤늦은 인정

그동안 5·18 민주화운동 사망 사건 최초 희생자는 광주시민이었던 고 김경철 열사로 알려져왔다. 기존 최초 희생자로 알려졌던 고 김 열사는 1980년 5월 19일 오전 11시 광주시 금남로 제일은행 인근에서 계엄군 폭행에 의해 사망했던 청각 장애인 제화공으로 당시 23세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최초 희생자가 전북지역에서 있었다는 사실이 44년 만에 밝혀진 것이다. 고 이세종 열사의 사망 시기는 1980년 5월 18일 오전 1시 40~50분 경으로 최초의 희생자 명단에 올랐다. 1980년 5월 17일 전북대 제1학생회관에서 ‘비상계엄 철폐 및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이 열사를 비롯한 당시 전북대 학생들은 18일 0시부터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계엄군이 교내로 진입하자 학생회관 옥상으로 피해 달아났다.
그 뒤 이 열사는 18일 오전 6시쯤 학생회관 옆에서 온몸이 피투성이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이 열사의 사인을 '단순 추락사'로 봤다. ‘전두환 퇴진’과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농성하던 전북대 농과대 2학년에 제학 중이던 이 열사는 온몸에 멍과 핏자국이 있었지만 수사기관은 학생회관 옥상에서 단순 추락한 것으로 발표했고, 1998년에야 비로소 '5·18 관련 사망자'로 인정받았다.
44년 만에 5월 민중항쟁 전북지역서 첫 희생자...‘광주 변방’ 인식 전환, '전북 민주화운동' 재조명 필요

그런데 최근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공개한 조사 결과 보고서에서 이 열사를 '첫 사망자'로 명시함으로써 5월 민중항쟁의 전국 최초 희생자가 전북대 재학생이던 이 열사란 사실이 44년 만에야 공식 인정된 것이어서 그 의미가 크다. 이상욱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관은 "당시 사망 시각을 조사한 결과 기존 첫 희생자보다 하루가 빠른 1980년 5월 18일 새벽 1시 40분에서 50분 사이로 보기 때문에 첫 희생자로 볼 수 있다"며 “목격자 진술과 계엄군 작전일지 등을 볼 때 이 열사가 전북대를 장악하려던 계엄군에게 폭행당하고 추락해 숨졌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 열사의 이러한 사실이 공식 인정돼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은 물론 5·18 민주화운동 역사의 의미와 파장이 클 전망이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민주화의 획기적인 디딤돌이 된 5·18 민주화운동이 다행히도 이제야 역사의 제자리를 찾는 듯하지만 미완의 과제들이 산적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민주화운동이자 민중항쟁이지만 지금도 미완의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미완의 규명 아직도 산재...이세종 열사 사망 관련 정확한 경위 등 재조명 필요

더욱이 산재한 미완의 규명 중 광주와 인접한 전북에 대한 당시 상황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 그동안 늘 아쉽게 지적돼 왔다. 특히 전북은 5·18과 직접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민중항쟁의 발화지점이었음을 여러 자료와 기록들에서 찾아볼 수 있음에도 광주의 변방에 머물며 해마다 5월이면 추모식과 관련 기념행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왔다.
1980년 5월 당시 희생자들 명단은 대부분 광주에 한정돼 있는 데다 그마저도 오류가 많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특히 사망자 명단이 당시 검시 대상자만을 대상으로 해 초기에는 이세종 열사마저 포함되지 않았다. 더구나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이세종 열사가 옥상에서 떨어진 경위와 누구에게 폭행을 당했는지는 아직 의문”이라며 “지금이라도 누군가 양심 고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혀 앞으로 5·18 민주화운동의 최초 희생자에 대한 기록 및 자료 발굴과 역사적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돌이켜보면 이 열사의 의로운 죽음이 세간에 알려지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열사는 이후 적어도 전북대에서는 민주화의 화신이자 시대의 양심으로 여겨졌지만 유감스럽게도 열사는 무려 20여 년 만에 광주 망월동에 안장됐다. 김제시 월촌면 연정리에 누워있던 열사는 1999년 4월에야 광주 망월동으로 옮겨졌다. 전북대 학생회관 옆에 열사의 비가 세워지는데 5년이 걸렸고, 명예졸업장을 받는데 15년이 필요했다.
전북지역 5·18 관련 사건 매우 다양...민주화운동 역사 제자리 찾기 노력 시급

계엄 확대 조치와 그 일환으로 진행된 각종 체포와 구금이 바로 5·18의 서막이라고 볼 때, 이세종 열사의 죽음은 5·18과 관련한 첫 희생자였음에도 이민규 순천향대 교수가 2000년에서야 한 학술 세미나에서 “5·18 최초의 무력진압은 바로 전북대이고, 5·18 최초의 희생자는 바로 이세종 열사”라고 밝히면서 학계에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전북지역에서 5·18과 관련된 사건은 매우 다양하다. 당시 전북대 시위현장에서 체포, 구금된 사람이 35명에 달했다. 현장에서 사망한 이세종 열사와 체포된 문희선 씨, 김성숙 씨 등도 포함된다. 비단 전북대 뿐만 아니라 전북공전 장우섭 씨, 원광대 성경환 씨(MBC 전 아니운서), 한일장신대 김명희 씨, 원광대 강익현 씨(전 도의원), 원광대 총학생회장 라경균 씨, 군산대 총학생회장 최병렬 씨, 전주대 총학생회장 심영배(전 전주시의원) 씨 등은 온몸으로 항거했다.
이러한 전북 민주화운동의 재조명이 이제라도 적극 이뤄져 광주와 인접한 전북에 대한 당시 상황이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그러기 위해위해서는 전북특별자치도와 전북대학교, 지역 정치권은 물론 학계와 시민사회단체들이 적극 관심을 갖고 함께 발굴하고 조명해 나가는 일이 시급해 보인다. 이는 한국 민주화의 획기적인 디딤돌이 된 5·18 민주화운동이 역사의 제자리를 찾는데도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박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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