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큐레이터 시선

오늘은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3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민주화의 획기적인 디딤돌이 된 5·18민주화운동이 다행히도 이제야 역사의 제자리를 찾는 듯하지만 미완의 과제들이 산적하다. 

당시 상황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점점 사라져 

전북대학교 '민주광장'에 위치한 고 이세종 열사 추모비와 영정 사진.
전북대학교 '민주광장'에 위치한 고 이세종 열사 추모비와 영정 사진.

누가 시민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는 지금까지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학살을 승인했던 미국의 책임 역시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는 사망 155명, 상해 후 사망 112명, 행방불명 85명, 상이자 2,505명, 기타 및 재분류 123명 등 2,980명에 이른다. 모두가 평범한 시민들이다.

이처럼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민주화운동이자 민중항쟁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왜곡되고 그 가치가 축소됐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민주화를 향한 긴 도정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43주년을 맞는 지금도 ‘광주의 살육’을 주도했던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광주와 인접한 전북에 대한 당시 상황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점점 사라지고 있다.

흔히 '5·18민주화운동'하면 광주만을 떠올리기 쉽다. 이웃인 전북은 5·18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한낱 '변방'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북은 5·18과 직접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5·18민중항쟁의 발화지점이었음을 여러 자료와 기록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북대에서 최초 5·18 희생자 발생

전북대 민주광장에 세워진 고 이세종 열사 추모비.
전북대 민주광장에 세워진 고 이세종 열사 추모비.

전북이 5·18 발화지점이란 흔적과 기록은 전북대학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80년 5월 17일 밤 10시 이후 전북대 제1학생회관에서는 학생들 약 40여명의 모여 철야농성을 하던 중 학내에 진입한 계엄군에 쫓겨 전북대 학생 한 명이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바로 5·18 첫 희생자가 전북대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세종 열사(당시 20세, 전북대 농과대)가 학생회관 아래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사건이다. 이 열사는 당시 호남대학총연합회 소속 연락책임자를 자임하며 전북대 제1학생회관에서 농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집회에서 나눠줄 유인물 등사(복사)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자정께, 검은 베레모를 쓴 공수부대원들이 착검한 M16 소총과 긴 곤봉을 들고 학생회관에 들이닥쳤다.

그 직후 18일 새벽 1시께 전북대 학생회관 옆 바닥에서 온몸이 멍들고 피투성이가 된 채 이 열사가 발견됐다. 당시 경찰과 정부는 단순 추락사로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부검의였던 이동근 박사(전북대의대 병리학과 교수)는 유족들이 요청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용 의견서’에서 “이세종 군의 두개골은 광범위한 복합골절 양상을 보였고 안면부, 흉부, 복부, 사지 등에 많은 타박상이 존재했다. 손상 가운데 상당 부분은 추락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고 기록했다.

이세종 열사, 1998년 '5·18민주화운동 최초 희생자' 인정

올해로 43주년을 맞은 이세종 열사 추모식이 17일 전북대에서 열렸다.(사진=전북대 제공)
올해로 43주년을 맞은 이세종 열사 추모식이 17일 전북대에서 열렸다.(사진=전북대 제공)

이 같은 내용은 비단 이 열사의 사인이 단순한 추락사가 아니며 옥상에서 떨어지기 전 이미 계엄군에 의해 무차별 폭행을 당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 열사의 의로운 죽음이 세간에 알려지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열사는 이후 적어도 전북대에서는 민주화의 화신이자 시대의 양심으로 여겨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무려 20여 년 만에 광주 망월동에 안장됐다. 

이후 이 열사는 1998년 5·18민주화운동 최초 희생자로 인정받았다. 김제 월촌 연정리에 누워있던 열사는 1999년 4월에야 광주 망월동으로 옮겨졌다. 전북대 학생회관 옆에 그의 비가 세워지는데 5년이 걸렸고, 명예졸업장을 받는데 15년이 필요했다.

계엄 확대 조치와 그 일환으로 진행된 각종 체포와 구금이 바로 5·18의 서막이라고 볼 때, 이세종 열사의 죽음은 5·18과 관련한 첫 희생이다. 이민규 순천향대 교수가 2000년에서야 한 학술 세미나에서 “5·18 최초의 무력진압은 바로 전북대이고, 5·18 최초의 희생자는 바로 이세종 열사”라고 밝히면서 학계에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를 목격했던 전북대 총여학생회장 문희선 씨(64. 당시 사학과 3년)와 김성숙 씨(64. 당시 국문과 2년)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5월 17일 밤 10시 이후는 기억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라고 표현했다. 학생회 간부들은 “학생회관에서 체포된 약 35명의 학생이 차 한대에 정확히 새벽 3시 30분까지 갇혀 있다가 전주경찰서에서 4시부터 조사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5·18 이후 이뤄진 전국 최초의 전주신흥고 학생들 시위

다큐 영화 '5·27 불꽃' 한 장면(사진=김종관 감독 제공)
다큐 영화 '5·27 불꽃' 한 장면(사진=김종관 감독 제공)

전북지역에서 5·18과 관련된 사건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 전북대 시위 현장에서 체포·구금된 시민과 학생이 35명에 달했다. 현장에서 죽은 이세종 열사와 체포된 문희선 씨, 김성숙 씨 등도 포함된다. 비단 전북대 뿐만 아니라 전북공전 장우섭 씨, 원광대 성경환 씨(MBC 전 아니운서), 한일장신대 김명희 씨, 원광대 강익현 씨(전 도의원), 원광대 총학생회장 라경균 씨, 군산대 총학생회장 최병렬 씨, 전주대 총학생회장 심영배(전 전주시의원) 씨 등은 온몸으로 항거했다. 

또한 5월 18일 직후 전주시내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광주 살육 작전' 유인물을 배포하고 민주화를 외친 사람들이 있었다. 한상열 고백교회 목사, 노동길 전 도의원, 이승희 씨 등이 바로 이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신흥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였다. 

5·18 이후 이뤄진 전국 최초의 신흥고 시위는 5월 27일 발생했다. 당시 고교생이었던 이강희 씨, 이우봉 씨 등은 구속되면서 제적됐다 13년 만인 지난 1994년 2월에야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들이 한반도를 정복하고 전국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돌던 그 때, 유일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전주신흥고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뛰쳐나와 시위를 일으켰다. 이들의 용감무쌍한 행동들, 그러나 현재의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이다.

신흥고 3학년 때 전두환 비판했다 옥살이한 이우봉 씨··42년 만에야 “국가가 1억 배상” 판결 

이들 중 5·18 당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전두환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가 옥살이를 하고,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이우봉(62) 씨는 43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지난 4월 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34단독 홍은기 판사는 이씨와 그의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위자료 소송을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이씨에게 약 4,924만원, 이씨의 부친에게 1,200만원, 이씨의 형제자매들 5명에게 각 933만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이씨는 총 1억 2,000만원의 위자료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부는 이씨의 손을 들어줬다.

1980년 5월 전북 신흥고 3학년이던 이씨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동기들과 함께 총궐기를 계획했다가 군 병력에 가로막혔다. 이씨 등은 그해 6~7월에 국군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과 군부의 광주 진압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전주 시내에 배포했다. 해당 유인물에는 ‘전두환은 정권을 잡기 위해 서부전선에서 대치 중이던 병력을 빼돌려 안보를 위협하였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이씨는 사전 검열 없이 유인물을 출판해 계엄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이씨는 같은 해 11월 전교사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장기 9개월 단기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1981년 4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고 풀려났다. 이후 이씨는 재심을 청구해 2021년 서울고법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고, 검찰이 이에 항소하지 않아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다. 

‘5·27 신흥고 민주화운동' 다룬 최초 다큐 영화 ’5·27 불꽃‘ 김종관 감독, “5·18은 광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김종관 감독
김종관 감독

이와 관련 김종관 다큐멘터리 감독은 2018년부터 전주신흥고등학교 민주화운동에 관한 취재를 하여 2020년 3월 단편 버전 '나와 5·18, 꺼지지 않는 불꽃'에 이어 2022년 ‘5·27 신흥고 민주화운동'을 다룬 최초 다큐 영화 ’5·27 불꽃‘을 제작·발표했다. 

김 감독은 “5·18민주화운동은 흔히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알려져 있으나, 광주·전남 뿐만 아니라 전북지역에서도 희생자들이 발생했다”며 “1980년 5월 18일 0시에 전북대 학생회관에 들이닥친 군인들에 의해 사망한 당시 전북대 대학생이었던 고 이세종 열사는 5·18민주화운동 첫 번째 공식 사망자였듯 5·18은 광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감독은 "5·18은 '신군부 폭압에 맞선 전 국민적 저항운동'으로 확정시켜야 한다"며 “방대한 당시 영상자료들을 계속 보강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 외에도 당시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 5·18을 알리다가 피습, 징계를 받은 종교계, 교육계, 공무원들도 적지 않다. 당시 여산성당 박창신 신부는 군인에 의해 테러를 당했고 익산(당시 이리)시청 공무원 황세연 씨는 파면을 당하기도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한국민주화운동사 자료에 따르면 전북대 학생운동을 진두지휘하던 김희수 총학생회장(전 도의원)은 3,000여명이 참가한 시가지 집회를 5·18 직전인 5월 2일 주도하다 체포돼 장기간 옥고를 치러야만 했고, 총학생회 부활운동을 주도했던 김남규 씨는 체포돼 선고유예를 받아 석방됐으나 석방 1주일 만에 강제 징집돼 녹화사업(운동권 학생 정신개조)의 희생양이 됐다.

'광주 참상' 알리다 구속·제적...항쟁·고난 전북에서 계속 이어져

1980년 5월 27일 당시 전주신흥고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S자를 그리며 "독재 정권 물러가라"를 외치고 있다.(사진=전주신흥고 제공)
1980년 5월 27일 당시 전주신흥고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S자를 그리며 "독재 정권 물러가라"를 외치고 있다.(사진=전주신흥고 제공)

그런가 하면 김제의 야학팀 등 군 단위에서 광주만행을 알리다 구속된 하연호 씨, 이상호 씨 등도 있었다. 1980년 5·18 이후 신군부는 유언비어 유포와 사회정화라는 명분 등으로 사회 각층의 민주화 인사를 탄압·격리하면서 집권을 위한 체제를 갖춰나갔고, 항쟁과 고난은 계속됐다.

그해 6월 25일 밤에는 익산군 여산면 여산리 여산 천주교회 사제관에 공수부대원으로 보이는 괴한 4명이 침입해 박창신 주임신부와 신도 임을영 씨(당시 26세)를 쇠파이프와 흉기로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 당시 박창신 신부는 5월 21일, 이 내용을 강론하면서 옥외 확성기를 통해 주민들에게 알렸다. 여산성당 마전공소에 다니던 여중생 유영희 씨, 현미숙 씨, 김양순 씨는 이 유인물을 주민들에게 배포하다 충남 강경 경찰서에 잡혀갔고, 신근리 공소의 신도회장 이명구 씨도 대전에 있는 충남 계엄사로 연행됐다.

5·18 이후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인물과 시위가 번지자, 신군부는 이들을 학교에서 쫓아냈다. 1980년 8월 31일 전북대 20여명, 원광대 2명, 군산대 1명이 제적을 당했다. 신군부의 대대적인 숙정(사회정화)으로 인해 전북대에서는 남정길·김용성·이석영·변홍규 교수 4명이 해임 당했다.

또 그해 8월 말에는 이리시청 직원 황세연 씨가 친구에게 광주의 참상을 담은 편지를 보낸 것이 발각돼 2명이 구속됐다. 이른바 '이리시청 직원 반공법 위반 사건'이다. 황 씨는 징역 1년을, 그에게 광주 현장을 목격한 이야기를 한 백화점 직원 이길야 씨는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았다.

다음은 1980년 전북에서 발생한 5·18민주화운동 전후의 사건들이다. 

-5월 17일 밤 9시 40분: 정부, 비상계엄 전국 확대, 대학 휴교 등 계엄포고 10호 발표.

-5월 18일 자정: 계엄 확대, 공수부대 대학 진입, 학생 연행, 첫 사망자(전북대 이세종) 발생.

-5월 27일: 전주신흥고등학교 학생 시위.

-6월 17일: 계엄사 지명수배자 329명 발표.

-6월 25일: 여산성당 박창신 신부 테러.

-7월 3일: 계엄사, "지명 수배자 중 247명 자수, 144명 훈방, 375명 계속 조사 중"이라고 발표. 

-8월 2일: 계엄사, 광주항쟁 관련 조사자 1 62명 훈방.

-8월 31일: 전북대 교수 해직, 전북대·원광대·군산대 시위 관련 학생들 제적. 이리시청 직원 반공법 위반 구속.

-9월 4일: 전·남북 계엄분소, 175명 군사재판 기소. 

/박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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