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미완의 친일 청산(32)
부안지역에 남아 있는 '친일 잔재' 첫 번재 편이다. 대표적인 친일 잔재로 분류된 이완용 선정비와 김상만 고택, 구 부안 금융조합을 차례로 소개한다.
이곳에 소개되는 곳들은 2020년 12월 '전라북도 친일 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 용역 결과 '친일 잔재'로 분류되었다.
이완용 선정비

이완용 선정비는 1898년 그가 부안군수로 있을 당시에 발생한 수해를 수습하는 활동을 한 것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1899년에 제작한 선정비다.
광복 이후, 비에 대한 훼손이 발생하자 1973년 줄포면장이 비를 구입해 줄포면사무소 뒤편에 세워두었다. 1994년에 시행된 ‘나라 바로 세우기 및 일제 잔재 없애기 운동’ 당시, 선정비를 뽑아 줄포면사무소 창고에 보관하게 했다.
현재까지도 줄포면사무소에서 보관중이다. 이완용은 을사5적 중 한 사람이자, 대표적인 친일반민족 행위자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 이완용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기에 선정됐다.
이완용은 누구?
이완용은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이호석(李鎬奭)의 아들로 태어나 11세때 먼 일가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호준(李鎬俊)에게 입양되었다.
이호준은 명문 양반으로 노론파의 후손이고 대원군과 가까웠던 인물이다. 서형(庶兄) 이윤용(李允用)은 대원군의 사위이다. 이러한 가정 환경에서 13세때 명문 가문인 조병익(趙秉翼)의 딸과 혼인했다.
그러나 훗날 그는 수많은 친일 행적으로 '을사5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중심 인물로 남게 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기록된 그의 대표적인 친일 행적은 다음과 같다.
1898년 3월 전북 관찰사 재직시 직무태만으로 감봉 처분을 당하였고 거액의 민재(民財)를 착복하여 관찰사직에서 파면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그해 12월 징계 특면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계속 외직에서 지내며 시세를 살피다가 1901년 2월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관계로 복귀하였다. 이후 국내외 정세 변화와 함께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하였다.
1905년 9월 학부대신이 되어 9년 만에 다시 대신의 자리에 앉았다. 같은 해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기 위해 대신들을 위협하며 조약 체결을 강요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을사5적’ 가운데 한 명으로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한 스승’으로 떠받들었다.
조약 체결에 앞장선 공으로 의정대신임시서리 및 외부대신서리에 임명되었다. 1907년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농상공부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까지 겸하였다. 이 해 6월 이른바 내각관제가 공포되자, 내각총리대신으로 매국 내각의 수반이 되었으며,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하였다.
1907년 7월 내각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일제의 요구에 부응하여 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황제의 강제 양위를 주도하였다. 이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정미7적’ 가운데 한 명으로 지탄을 받았다. 조약체결 직후에는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1907년 의병장들을 중죄로 처벌하고 미체포한 의병부대 지휘관들을 체포할 것을 순종 황제에게 요구하였다. 1909년 7월 12일에는 통감 소네아라스케(曾禰荒助)와 함께 ‘한국사법 및 감옥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에 내각총리대신의 명의로 서명함으로써 사법권을 일본에 위임하였다.

같은 해 7월 26일에는 ‘한국중앙은행에 관한 각서’를 조인하여 중앙은행의 운영과 권리에 대한 집행 및 감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도록 하고 한국 재정 및 경제권을 양도하는 데 앞장섰다. 이와 같은 매국적 행위로 인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암살 1급 대상자로 지목되었다.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회당(鐘峴天主敎會堂)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그달 17일 사망)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가 독립운동가 이재명의 피습을 받아 치명상을 입었으나 운좋게 살아났다. 1910년 8월 3대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 체결 협상을 벌이고, 동년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 순종황제를 압박하여 합병조칙을 받아냈다. 이에 마침내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게 넘어가고 ‘경술 9적’ 중 1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1910년 10월 7일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합병에 관한 공로로 백작의 작위를 받았고, 1920년 12월 28일 후작으로 올라갔다. 사후 손자 이병길이 작위를 물려 받았다. 1910년 10월부터 1912년 8월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과 중추원 부의장을 지내면서 총독의 자문에 응하였다. 1916년 8월 4일 『매일신보』에 왕세자의 혼인과 관련하여 “병합하여 한 국가가 된 후에는 황족간의 결혼은 당연한 일”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내선융화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게재하여 만세운동을 ‘망동’이라 비난하고 저항운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후작이 되고, 농림주식회사고문·교육조사위원·총독부산업조사위원·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조선사편찬위원회고문 등의 명예직을 두루 겸하며 일제의 식민정책에 협력하였다.
1924년 4월 항일운동에 대항하여 일선융화(日鮮融和)를 내걸고 결성된 친일단체 동민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2월 11일 이재명 의사의 칼에 폐를 다친 후유증으로 앓던 해수병이 악화하여 사망하였다. 전북 익산에 묻힌 그는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특히 일제에 협력한 공로로 1907년 10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고, 한일합병조약 체결 직후인 1910년 8월 금척대수장을 받았다. 1911년 1월 1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1912년 8월 합병에 대한 공로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 11월 다이쇼 일본왕 즉위시 참석한 공로로 대례기념장을 받았고, 1918년 4월에는 정3위에 서위되고 사망 후 정2위와 대훈위 국화대수장에 추서되었다.
이완용의 일제 강점기 활동은 「일제 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3·4·6·7·9·13·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33~57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부안 김상만 고택

김상만 고택은 1895년 지역 지주이자 김성수의 양아버지 김기중에 의해 지어졌다. 인촌 김성수가 소년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김상만 고택인 이유는 김성수의 장남 김상만의 집이 됐기 때문이다. 인촌 김성수는 동아일보 설립자이자 일제 강점기 시기 교육인, 기업가였다. 뒤에서 일제와 협력 하며 전쟁터로 조선인들을 내몬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김성수의 어린 시절 행적이 담겨 있는 곳이기에 친일 잔재로 선정됐다.
구 부안 금융조합

구 부안 금융조합은 일제 강점기 금융기관으로 건축됐다. 이 건물은 일본인 들의 경제 수탈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소규모 금융조합 건물로 곡창지대인 부안 지역에서 생산된 쌀을 반출해 가는데 선봉적인 역할을 했다.
부안 역사문화관으로 활용될 예정인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부안 지역 생산물을 수탈했음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계속)
※참고 자료 :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 결과보고서 (2020.12)
/박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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