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야구대회 개최..라디오 청취대회도 열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창간된다. 1927년 4월에는 본사 사옥(지하 1층, 지상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신축한다. 사옥 낙성식 때는 전국 주요도시에서 남녀궁술대회, 웅변대회, 체육대회(축구, 야구, 정구 등), 독자(讀者) 위안회, 영사(映寫) 대회, 라디오 청취대회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군산(群山)에서도 군산지국이 주최하는 음악회, 강연회, 웅변대회, 라디오 청취대회, 소년야구대회 등이 성황리에 열린다. 그중 라디오 청취대회는 독자들에게 우대권까지 발급했으나 기상 악화와 전류방해로 부득이 연기되고 음악회, 강연회, 소년야구대회 등은 예정대로 진행된다.

그중 소년야구대회는 그해(1927년) 4월 29일 군산 공설운동장(현 서초등학교 자리)에서 개최되었다. 대회를 앞두고 참가팀들이 맹렬히 연습 중이라고 전하는 신문 보도에서 당시 군산의 야구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군산공원 아래에서 찍은 소년야구대회 우승팀 기념사진. 왼편으로 해망굴도 보인다. (1927년 5월 4일 자 '동아일보')
군산공원 아래에서 찍은 소년야구대회 우승팀 기념사진. 왼편으로 해망굴도 보인다. (1927년 5월 4일 자 '동아일보')

아래는 군산 소년야구대회 결과 알리는 그해 5월 4일 치 <동아일보> 기사다.

“군산 소년(群山 少年)들은 대회 기일(大會 期日)을 압헤(앞에)두고 우승(優勝)의 월계관(月桂冠)을 획득(獲得)하랴고 각 방면(各 方面)에서 맹렬(猛烈)히 강습(講習)하여오던 바 참가(參加)팀은 활승소년군(活勝少年軍), 기독소년군(基督少年軍), 군보교군(群普校軍), 신흥소년군(新興少年軍) 사(四)팀이었다. 대회당일(大會當日)인 29일(二十九日) 오전 11시(午前 十一時)부터 군산공설운동장(群山公設運動場)에서 개전(開戰)케 되었다.(아래 줄임)”

보도에 따르면 소년야구대회는 성대한 입장식과 활승소년군의 우승기 반환에 이어 김수복(金守福), 김완(金完) 두 심판원의 심판 하에 기독소년군, 군보교군, 신흥소년군 등 네 팀이 자웅을 겨뤘다. 어린 선수들의 불꽃 투혼은 관중을 열광케 하였으며, 우승의 월계관은 기독소년군이 차지하였다.

소년야구대회는 ‘동아일보’ 군산지국 총무 박 준(朴 濬)씨의 우승기 수여와 1·2·3등 외(外) 상품을 전달한 후 우승팀 기념촬영을 마치고 오후 7시경 막을 내렸다.

경기 시작에 앞서 ‘활승소년군의 우승기 반환이 있었다’는 대목은 소년야구대회가 1년 전에도 치러졌음을 암시한다. 대회를 앞두고 참가 신청을 받은 것에서도 당시 군산에 소년 야구팀이 4개 팀 이상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참가선수 나이는 18세, 신장은 5尺 2寸(약 155cm) 이하로 제한을 둔 것도 눈길을 끈다.

라디오방송 청취 대회도 열려

‘동아일보’에 실린 무선전화 시험방송 모습(1925년 6월 26일)
‘동아일보’에 실린 무선전화 시험방송 모습(1925년 6월 26일)

일제는 1924년 11월 ‘반도 민중의 문화를 계발하여 복리를 증진시킨다’는 명분으로 조선총독부 체신국에 무선실험실을 설치하고 첫 방송 전파를 발사한다. 이후 2년 3개월여에 걸친 시험방송을 거쳐 1926년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을 설립하고 이듬해 2월 16일 경성방송국(호출부호 : JODK)을 개국한다.

전화기(電話機)도 신기하게 여기던 당시 사람들에게 전파 미디어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신문들은 20세기 문명은 ‘라디오 문명’이라 논하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를 통해 신세계를 접한 청취자들은 ‘라디오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라디오가 문명의 무대를 독점하면서 신문지 몰락의 시대가 닥쳐올 거라고 예고하는 지식인도 나타났다.

경성방송은 개국하는 그해(1927)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조선실업야구 쟁패전(8월 28일~9월 1일) 실황을 일본어로 중계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 야구 중계방송으로 전해진다. 일제의 라디오 방송은 효율적인 한반도 식민통치와 정신 및 문화적 침투가 목적이었다.

군산 지역 주민들은 언제부터 라디오방송을 청취하기 시작했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군산에서 가까운 이리방송국(현 전주 KBS)이 개국하는 1938년 10월 1일 이후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20~30년대 신문과 기록들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1927년 4월 19일 치 ‘동아일보’ 광고란이 눈길을 끈다. 경성(서울)에 본사를 둔 합자회사 구미양행(歐米洋行)은 라디오 지방특약점 모집 광고를 내면서 한일은행 각 지점의 기계 가설을 기념하기 위해 군산, 함흥, 원산, 강경 등지에서 주문하는 고객에게는 5월 16일까지 특별 할인하겠으니 기회 놓치지 마시라고 홍보한다.

경성방송이 개국하는 해 군산에서 ‘라디오 청취대회’가 열리고, 1929년 12월 연말을 맞아 옥구군 임피면(현 군산시 임피면)에 사는 이완식 씨가 200여 원의 가치를 가진 라디오 한 대를 대야보통학교에 기증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도 보인다. 이는 군산 주민들도 경성방송국 개국 시기에 맞춰 라디오방송을 청취했음을 뒷받침한다. (계속) 

/조종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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