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 야구·축구·정구 보급... 전국 규모 대회도 열려

백열등에 담뱃불 붙이려고 곰방대를 들이댔던 개화기 이 땅의 청년들. 그들의 혼돈은 스포츠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의 마수가 한반도로 손을 뻗치기 시작하던 시기, 서양선교사들을 통해 보급된 스포츠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까지 여명기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화를 남기며 청소년들 사이에 급속도로 전파된다.

평화축구단 소년팀(출처: 군산시)
평화축구단 소년팀(출처: 군산시)

군산은 호남에서 가장 빠르게 스포츠(야구, 축구, 정구 등)가 보급된 도시로 알려진다. 개항(1899년 5월) 이후 서양 선교사들이 지금의 구암동산에 개설한 선교스테이션(구암병원, 구암교회, 영명중학교, 멜볼딘여학교, 안락소학교, 성경학교, 도서관, 선교사 사택, 직원 숙소 등)에 야구와 축구 경기가 가능한 운동장과 정구코트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대한제국은 경술국치(1910) 이후 일본에 종속된다. 그럼에도 청년운동 및 스포츠는 면면히 이어지면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3·1운동을 전후해 군산은 기독청년회, 경신구락부, 미우구락부, 동광청년회, 군산청년회, 평화축구단, 금강체육단 등 다양한 단체가 만들어진다. 구암리 남녀기독청년회에는 체육부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중 평화축구단은 군산 최초 체육단체로 전해진다. 선수들은 영명중학교 운동장, 대형정미소 벼 건조장 등에서 연습하였다.

군산기독청년회는 시대가 요구하는 주제 중심으로 토론회, 강연회, 야학회 등을 열었으며,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2년 10월 창립한 군산청년회는 군산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전국규모 축구대회, 관동 대지진 피해 동포 추모대회, 활사회(活寫會) 조직 등 1920년대 군산 지역 문화 및 체육 발전을 이끈 대표적 민족운동 단체였다.

평화축구단은 1920년 5월 창단된다. 선수는 20여 명, 유니폼도 없는 초라한 팀으로 출발했으나 이듬해 청년단과 소년단을 각각 창설한다. 청년단은 현경남, 이서구, 김서봉, 안수정 등, 소년단은 채금석, 현부남, 박봉석, 이서구 등으로 구성됐다.

그해(1921) 9월에는 하나오카(花岡) 정미소에서 ‘남조선 소년축구대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는 전국에서 13개 팀이 참가, 전남 순천팀이 우승하였다.

채금석이 이끄는 소년단 팀은 1923년 4월 이리(익산)에서 개최된 전라북도 부군대항(府郡對抗) 소년축구대회에서 우승기를 거머쥐는 쾌거를 이룬다.

열정과 기량을 겸비한 선수들은 크고 작은 지방 대회에 참가, 빼어난 실력을 보여주면서 전조선축구대회에 3년 연속(1922년, 1923년, 1924년) 출전하는 기염을 토한다.

1925년 11월 희소관(상설극장)에서 활동사진 및 예기(藝妓) 연주회가 이틀(28~29일) 동안 열렸다. 행사 목적은 평화축구단 회관 건축기금 조성이었다. 보성권번과 군산권번이 후원했으며, 양 권번 소속 기생(妓生)들이 총출연해서 열연을 펼쳤다. 매일 밤 입추의 여지없이 대성황을 이뤘고 많은 의연금이 들어왔다. 이처럼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사랑받았던 평화축구단은 1930년에 출범하는 군산체육회 모체가 되기도 하였다.

스타급 정구 선수도 등장

우리나라 근대식 운동 경기는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구기 종목은 야구(1904), 축구(1905), 유도(1906), 농구(1907), 정구(1908) 순으로 들어왔으며, 초기에는 서울의 몇몇 학교와 선교사가 거주하는 일부 지방 도시에서 행해질 뿐이었다.

정구(庭球)는 1908년 4월, 당시 탁지부(현 재무부) 관리들이 회동구락부를 조직하고, 이듬해 5월 여흥식(餘興式) 대회를 개최한 것이 효시로 알려진다. 이후 농상공부 직원들도 성계구락부를 만들고, 1911년 5월에는 왜성구락부, 한국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여러 팀이 경기를 치렀다. 이후 크고 작은 대회가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 군산에는 군산체육협회 정구부(정구단)와 군산금강정구단을 비롯해 군산기독청년회, 경신구락부, 군산금융조합, 군산농업학교, 군산공립보통학교(군산중앙초등학교 전신), 군산공립고등여학교(군산여고 전신) 등에 정구단이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군산기독청년회-군산농업학교 정구대항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0년 9월 6일)
군산기독청년회-군산농업학교 정구대항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0년 9월 6일)

1920년 8월 31일 군산기독청년회-군산농업학교 정구 대항전이 군산농업학교 운동장에서 펼쳐졌다. 이날 경기는 두 팀이 백열전을 펼쳤으나 12시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하다가, 점심 식사 후 재개되어 기독청년회가 승리하였다. 이후에도 개인(학생 포함) 및 직장팀 대항전 등 다양한 형식의 정구대회가 열린다. 1928년 8월에는 전국 규모 대회도 개최된다.

일본인으로 구성된 군산체육협회는 1921년 6월 26일 명치정(중앙로 1가) 심상고등소학교 운동장에서 정구대회(실업팀-은행팀)를 개최하였다. 수많은 관중의 박수와 환호 속에 펼쳐진 이날 경기(오전 9시~오후 5시)는 접전을 펼친 결과 실업팀에게 승리의 월계관이 돌아갔다.

일반 사회단체와 학교에 정구부가 조직되고, 지방 도시대항 경기가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지역 예선을 거쳐 전국규모 정구대회에 출전하는 스타급 선수도 등장한다.

군산 금강정구팀이 출전했던 제4회 전조선정구대회 광경(1924년 9월 25일 자 동아일보)
군산 금강정구팀이 출전했던 제4회 전조선정구대회 광경(1924년 9월 25일 자 동아일보)

1927년 10월 11일 치 <동아일보>는 “전북 정구계(全北 庭球界)에 패권(覇權)을 가진 군산(群山) 박대준(朴大俊)-신현주(申賢珠) 조(組)는 전북예선전(全北豫選戰)에 우승(優勝)되야 전라북도청(全羅北道廳)의 파견(派遣)으로 금반(今般) 조선신궁경기대회(朝鮮神宮競技大會)에 원정(遠征)케 되엿슴으로 내(來) 십사일야 군산발 10시 열차(十四日夜 群山發 十時 列車)로 상경(上京) 하리라더라”라고 보도하였다.

박대준-신현주 조는 1927년 11월 23일 ‘개벽사 군산지사(開闢社 群山支社)’가 주최한 제1회 개인정구대회에서 패권을 차지한다. 두 선수는 이듬해(1928) 4월 군산금융조합 코트에서 열린 군산 개인정구대회에서도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군산체육협회 정구부가 주최한 이날 대회는 20여 개 조가 참가하여 자웅을 겨뤘으며 선수들의 기발한 묘기에 관람객들은 흥미를 더하였다.

당시 신문들은 박대준, 신현주 두 선수를 전 조선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정구 선수라고 소개하고 있다.

남녀유별 인습이 뿌리 깊었던 시절, 무명 치마저고리 차림에 댕기꼬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여학생 정구 경기는 항상 초만원을 이뤘다. 긴 양말을 신었음에도 학부형과 대회 임원을 제외한 남자는 입장이 불허됐다. 주최 측은 남성 팬들의 시선을 의식해 주변에 차양을 쳤다. 호기심이 동한 청년들은 경기장 부근 나무 위로 올라가 관람하였고, 나뭇가지에 바짓가랑이가 찢어지는 우스운 광경도 연출되었다고 전한다.

[덧붙임]

1919년 2월 일제는 조선의 체육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일본체육협회 조선 지부 형식으로 ‘조선체육협회’를 발족시킨다. 군산에도 일본인 중심의 체육단체(군산체육협회)가 조직된다.

1921년 3월 당시 군산 부윤(宮館)은 시내 유지들과 회의를 열고 부(府) 협의회의원, 학교조합의원, 상업회의소의원 및 은행지점장, 대택회의소 회두, 경찰서장, 판사, 검사, 우편국장, 세관 지서장, 군산일보 사장, 재향군인분회장 등을 발기인으로 촉탁하였다. (계속) 

/조종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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