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 여명기②

한국인으로 구성된 팀끼리 펼쳐진 최초 야구 경기는 1906년 3월 15일 훈련원(조선 시대 무과 시험장이자 군사훈련장)에서 개최된 황성 YMCA 야구단-덕어학교(독일어 학교)의 일전이었다. 경기 결과는 덕어학교가 3점 차로 승리. 이날 경기는 장비와 포지션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엉성했고, 선수들은 갓만 벗었을 뿐 무명고의적삼에 짚신 차림이었다.
경기장도 훈련원 넓은 마당에 선을 그어 다이아몬드를 만들었고, 게임도 지금처럼 9회까지 진행하지 않았다. 투수 플레이트(투수판)도 없었으며, 루심이나 선심이 없이 심판관(주심) 한 사람이 경기를 진행하였다. 그라운드가 고르지 못해 선수들이 자주 상처를 입었으며 주자가 슬라이딩(도루)도 할 수 없었다.
외야수는 좀처럼 글러브 맛 보기 어려웠고, 맨손으로 공 받아
당시엔 총알 같은 안타를 치는 타자보다, 공을 높이 띄우는 선수가 강타자로 인정받았다. 공을 높이 띄우면 수비수들이 영락없이 못 잡았으니 진루율이 100%에 가까웠다는 것. 또한, 객석이 없는 관계로 관중이 많을 때는 심판과 선수들이 경기장을 정리하면서 시합을 치르는 등 그야말로 ‘동네 야구’ 수준이었다.
시합 중간에 운동장을 정리하느라 경기 소요 시간이 길어졌다. 배트와 포수용 미트는 한 개 가지고 양 팀이 돌려가면서 사용하였다. 외야수는 좀처럼 글러브 맛을 보기 어려웠고, 맨손으로 공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로, 파울볼에 맞아 다치는 사람이 늘면서 야구는 축구보다 위험한 운동이라는 의식이 확산된다.
휘문의숙(徽文義塾: 휘문고등학교 전신)은 1907년 국내 사립학교 중 가장 먼저 야구부를 창단한다. 이후 황성기독청년회(YMCA) 야구팀에 거듭 연패하다가 어렵사리 한 번 이기자 <황성신문>은 ‘휘승청패’(徽勝靑敗:휘문의숙 팀이 황성기독청년회 팀을 이겼다는 뜻) 제목을 붙여 보도하였다.
그동안 ‘휘승청패’란 제목의 보도가 국내 최초 야구경기 기사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글로 된 최초 야구 규칙과 경기용어집 <야구규칙(野球規則)>(1947년 최상준 저)이 발견됨으로써 1년 앞당겨졌다. 용어집에 소개된 1906년 2월 17일 치 <황성신문>에서 ‘타구성회·打球盛會’(황성기독청년회-덕어학교 경기에서 덕어학교 승리)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견해낸 것.
운동경기에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 일반 독자와 양반들은 야구경기 관련 기사를 보며 ‘신문에 게재할 게 얼마나 없으면 젊은 사람들과 학도들이 장난한 것을 보도하느냐’며 비웃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모든 운동경기를 ‘밥지랄’ 한다고 비하하며 선수들을 ‘운동꾼’, ‘놀음꾼’ 등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싸늘한 냉대와 무시를 당하면서도 야구는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시기 조선 청년들의 의기를 북돋워 줬다. 단순한 스포츠 그 이상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08년 8월 19일에는 고종황제 요청으로 선수들을 불러 어전(御前)에서 시범경기를 치르기도 하였다.

심판도 선수도 한복 차림으로 경기에 임하던 시절, 처음 보는 희한한 복장
1909년 7월 21일 일본 유학생들이 야구단을 조직하여 고국을 방문한다. 그들은 유니폼에 스파이크를 신고 황성YMCA 팀과 열전을 펼쳤다. 이 대항전은 한국 야구사에 ‘제1차 동경 유학생 모국방문 경기’로 기록된다.
심판도, 선수도 한복 차림으로 경기에 임하던 시절. 유학생 선수들 옷차림이 처음 보는 희한한 복장이어서 구경꾼이 많이 모여들었다. 유학생 야구단과 경기를 치르면서 기량을 터득한 황성YMCA 팀은 이듬해 평양, 개성, 선천, 안악 등지로 원정 다니며 전국으로 야구붐을 일으키는 데 공헌한다.
1910년, 그해 황성YMCA 야구단은 최초로 ‘YMCA’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나선다. 선수들은 경기를 치를수록 실력이 급성장, 강팀으로 변모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활동하는 일본팀과 야구를 보급한 미국 선교사 팀까지 연파하면서 국내 야구를 평정한다.
1912년 가을에는 원대한 꿈을 품고 ‘일본 원정’ 길에 오른다. 당시 이를 보도한 일본 언론들은 투지 넘치는 선수들 모습을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과 같았다’고 묘사하였다.
1910년대는 한국 야구의 여명기로 선수를 지도하고 감독할 통일된 기관이 없는 데다 규칙(rule)도 엉성하였다. 도로 사정이 열악하고 기차 요금도 엄청나게 비싸 규모가 큰 대회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지방 경기도 친선경기나 대항 경기가 산발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경기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피압박 민족의 설움과 울분을 터뜨리는 한풀이 마당의 성격이 강해진다.
황성 YMCA야구단은 1913년 이후 그라운드에 오를 수 없게 된다. 일제의 탄압이 야구장까지 손을 뻗쳤던 것. 그해 6월 조선총독부가 ‘105인 사건’을 문제 삼아 질레트 선교사를 국외로 추방하고 리더들이 유학을 떠나면서 활동이 위축되고 그해 10월 팀이 해체된다. 그 후 야구단이 이뤄놓은 영광도, 선수들 얼굴도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된다.
덧붙임: ‘105인 사건’은 1911년 일제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을 일컫는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 회원과 기독교인 수백 명이 잡혀가 고문당하고, 그중 105명이 감옥에 갇힌다.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을 지켜본 질레트는 ‘105인 사건’은 조작 날조된 사건이라는 내용으로 세계선교사 위원회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한다. 국제사회에 폭로하려 했던 것. 그러나 이를 알아챈 조선총독부가 질레트를 강제 추방하였다. (계속)
/조종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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