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교포 학생 야구팀 군산 방문.. 대대적 환영 행사 열려

하와이 교포 학생 야구단의 군산 도착을 알리는 1923년 8월 15일 자 ‘동아일보’ 기사
하와이 교포 학생 야구단의 군산 도착을 알리는 1923년 8월 15일 자 ‘동아일보’ 기사

“포와학생단일행(布哇學生團一行)은 예정(豫定)과 여(如)히 거(去) 5일 오후 11시에 영광(靈光)으로부터 군산(群山)에 내착(來着)하얏는대(중간 줄임) 군산역두(群山驛頭)에는 미선조합(米選組合) 양악대(洋樂隊)를 선두로 하야 오륙백명(五六百名)이 열(列)을 작(作)하야 성대(盛大)한 환영(歡迎)이 유(有)하였다. (줄임)”

1923년 8월 15일 자 <동아일보> 기사(제목:<布哇學生團 群山에도 盛況·하와이학생단 군산에서도 성황>)이다. 신문은 단장(團長) 및 교사, 학생야구팀, 남녀합창단 등 총 26명으로 구성된 하와이교포 고국방문단(단장 민찬호)이 그해 8월 5일 늦은 밤 군산역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다.

하와이교포 방문단이 도착하자, 광장에서 기다리던 환영객 600여 명은 미선조합 양악대(밴드부)를 선두로 거리 퍼레이드를 화려하게 펼쳤다. 신문은 군산 주재 중앙지 기자들과 각 단체 대표들은 교포들을 맞이하기 위해 이리(익산)역까지 출영(出迎) 나갔다고 보도하였다.

조선인의 하와이 이민은 1903년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해마다 이민이 증가하였고, 하와이에 정착한 교포들은 20년쯤 지난 1923년 여름 고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하와이에는 한국인 5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영명중학교 운동장에서 야구경기 개최

하와이 교포 학생 야구단 모습(출처: 동아일보)
하와이 교포 학생 야구단 모습(출처: 동아일보)

민찬호(閔璨鎬) 단장은 인터뷰에서 고국산천을 처음 대하는 이가 12명이고, 그 밖에 학생들은 어려서 고국을 떠났으므로 조선 사정을 잘 알지 못하거나 기억에 없다고 하였다. 하와이에서 태어나 성장했다는 여학생 일곱 명은 하나같이 밤낮으로 간절히 그리던 모국 땅을 밟게 되어 무엇보다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와이교포 고국 방문단은 이튿날(6일) 오후 2시 개복동 영신여학원 교정에서 열린 시민환영대회에 참석하였다. 홍종익 환영회장 사회로 열린 환영회는 이수현씨 환영사(歡迎辭)와 최영순·장태임 양의 환영가(歡迎歌), 민찬호 단장의 답사 순으로 진행됐다.

환영회가 끝나고 학생 야구팀은 곧바로 구암리 영명중학교 운동장으로 이동, 군산 야구팀과 경기를 펼쳤다. 경기 결과는 하와이 학생야구팀이 큰 차이로(20-1)로 승리를 거둔다.

하와이교포 학생단 야구팀 진용은 김영우(매니저), 유진봉(주장), 유 진·조해리(투수), 김원도·신영근(포수), 김학성(1루수), 이경수(2루수), 한기찬(3루수), 김천용(유격수), 위인선(좌익수), 공도연(우익수), 김영의(중견수) 등으로 짜여있었다. (그해 7월 4일 서울 배제고등보통학교와의 경기 명단)

한옥 한 채 값에 버금가는 성금 전달

하와이 교포 학생 음악대 모습(출처: 동아일보)
하와이 교포 학생 음악대 모습(출처: 동아일보)

야구 경기 끝나고 고국 방문단은 선교사회 초대에 응했다가 ‘군산좌’에서 열리는 음악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오후 8시 반(午後 八時 半)부터 군산좌(群山座)에서 음악강연회(音樂講演會)를 개(開)하얏는대 정각 전(定刻 前)부터 쇄도(殺到)하는 군중(群衆)은 순간(瞬間)에 만원(滿員)을 성(成)하야 팔백여명(八百餘名)에 달(達)하얏으나 임장(臨場)하얏는 경관(警官)의 금지(禁止)로 기외(其外)에는 입장(入場)치 못한 사람도 다(多)하야 일대유감(一大遺憾)이엿다. (줄임)”- (1923년 8월 15일 치 <동아일보>)

신문은 남녀학생 음악연주가 끝나고 민찬호 단장과 김 노듸양(교사)의 강연이 있었는데, 청중들은 무한한 느낌을 받은 듯했다고 전하였다.

이날 모금된 동정금은 모두 670원으로, 이는 한옥 한 채 값과 맞먹는 거액이었다. 모금에 참여한 단체(5원~10원)는 군산 유학생학우회를 비롯해 형평사, 경신구락부, 군산청년회, 삼우사, 구암 여자기독교청년회, 구암 남자기독교청년회, 군산신탄조합, 유년학당, 인접노동조합, 군산좌, 영신여학원 등이었다.

문명진, 이원형, 조덕하, 최봉국, 김종선, 윤주병, 차영선, 육기병, 박인구 등 개인으로도 많은 성금이 답지했다. 안학선, 신소도, 함기화, 장월색, 김산월, 최비취, 김운선, 강산월 등 보성권번과 군산권번 기생도 10여 명 동참하였다. 이상은 2원~5원을 낸 사람으로 1원 50전이나 1원 이하를 낸 기생도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1920년대 초 군산은 번창 일로에 있었다. 인구도 10년 전보다 두 배 가까이 증가한 상태였다. 일제는 밤에도 내항 곳곳에 전등을 대낮처럼 밝히고 전라·충청 일대에서 생산된 쌀을 주야로 실어 날랐다. 빈 선박 화물 운임이 30% 내외여서 군산항은 일본 상품을 반입하는 주요 항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기생을 취하려면 평양 부윤, 권세를 누리려면 한성 부윤, 돈방석에 앉으려면 군산 부윤’이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해마다 무역액이 증가함에도 조선인들은 궁핍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이 ‘부(富)’를 쌓을수록 조선 백성은 더욱 피폐해지는 식민지 경제구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하와이 교포들을 따뜻하게 환영하고 거액의 동정금까지 전달하였다. 

덧붙임: 일제강점기 군산상업회의소가 조사한 지가(地價) 통계에 따르면 1924년 당시 군산의 심장부로 통하는 본정(本町)은 평당 100원, 명치정 경찰서 부근은 55원~100원, 조선인 거리(개복정 서쪽)는 3원~15원이었다. 또한, 한옥(韓屋) 기준으로 가정집은 한 채에 700원을 호가했다. (계속) 

/조종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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