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야구심판협회 창립과 ‘전의용’ 심판원
)](https://cdn.jbsori.com/news/photo/202105/4038_6707_4239.jpg)
1923년, 그해 여름 야구(野球) 규칙 연구와 심판 기관의 통일을 목적으로 ‘조선야구심판협회’가 결성된다. 당시 전국의 학교 및 관련단체 대표들은 그해 6월 21일 오후 8시 종로 중앙기독청년회(YMCA) 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허성(許城)을 회장으로 선출한다. 심판원은 윤치영, 이원용, 허성, 마춘식, 전의용, 박천병, 현홍운, 러들러(Ludlow) 등 8명이 선임된다.
그중 전의용(全義鎔·1897~?) 심판원이 눈길을 끈다. 그는 서울 출신으로 고베고등상업학교(神戶高等商業學校) 시절 야구선수로 활약하였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17년 7월 안재홍, 김도연 등과 제4차 도쿄유학생 선수단 일원으로 모국을 방문하여 마산, 대구, 서울 등지에서 경기를 가졌다.
1922년 고베고등상업학교 졸업 후 조선식산은행에 입행한다. 식산은행에 1년 남짓 다니다가 1923년 12월경 사임하고 서울에서 한양상회(漢陽商會) 운영하다가 1930년 폐업한다. 그는 은행에 근무할 때도, 사업을 하면서도 ‘배재고보 운동부장’과 ‘조선체육회 심판원’ 자격으로 각종 야구대회 심판을 맡는다.
그는 1925년 2월 25일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 체육잡지 <조선체육계(朝鮮體育界)>(제3호)에 ‘최신야구규칙(最新野球規則)’을 비롯해 ‘야구야화(野球野話)’, ‘야구선수의 어깨(肩) 양성법’, ‘싸인은 몇 가지나 쓰일까’ 등을 집필하는 등 야구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다.
1930년 8월 군산으로 이주한다. 이어 군산야구팀 선수 겸 매니저로 활약하며 지역의 경제, 사회, 교육, 체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33년 군산 야구구락부 재조직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군산신탄주식회사 사장, 환어운송주식회사 취체역(이사), 군산수산주식회사 전무, 양영학교(사립) 이사, 조선매일신문 호남 지사장, 군산체육협회 축구부장, 부회의원(府會議員 3선) 등을 지냈다.
전의용은 1936년 6월 군산 공설운동장에서 성황리에 열린 ‘전조선 남녀자전차대회(남녀자전거대회)’ 대회장을 맡아 행사를 주관하였다. 아래는 자전차대회 결과를 보도한 1936년 7월 11일 치 <동아일보> 기사다.
“전조선 남녀자전차대회(全朝鮮 男女自轉車大會)를 지난 6월(六月) 27일(二十七日), 팔(八) 량일에 개최한다함은 기보한바어니와..(중간 줄임) 전조선 각지에서 모인 70(七十)여 선수들의 정열로 대회장 전의용(全義鎔) 씨의 대회사를 비롯하야 장엄한 입장식을 마친 후 경기는 시작되자 예선(豫選)을 행하게 되엇는데...(아래 줄임)”
경성(서울), 신의주, 조치원, 광주, 대전 등 전국 각지에서 70여 명이 참가한 자전차대회는 우천(雨天)으로 이틀 연기되어(29~30일) 진행됐다. 첫날 예선을 치르고, 30일 오전 10시 경기를 재개, 각류(各流: 일류, 이류, 삼류, 혼합, 연합, 고스타, 여류 등)의 예선을 거쳐 최종 우승팀을 가렸다.
수천 관중의 흥미와 탄성을 자아낸 결승에서 일류(一流) 1위 김은호, 2위 이윤백, 3위는 장기석 선수, 혼합(混合) 1위 방소자, 2위 양기순, 3위 오동실 선수, 여류(女流) 1위 박길순, 2위 손영숙, 3위는 문정숙 선수가 각각 차지했다. 시상은 우승기 외에 기록상(상금 50원)도 수여하였다.
야학 및 빈민층 삶의 질 향상에도 기여

전의용은 부회의원 시절에도 냉철한 판단력과 날카로운 질문으로 일본인 부윤(府尹)을 곤혹스럽게 하였다.
그는 1934년 3월 25일 열린 부(府) 의회에서 ‘군산의 시장(지금의 구시장) 시설은 군·면 단위 시골 시장과 별다른 차이가 없음에도 가난한 상인에게 과중한 사용료(매년 6천300원)를 부과하는 것은 등한시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며 인하를 촉구하는 등 부윤의 업무 태만과 인식 부족을 지적하였다. 과중한 사용료는 조선인 차별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1935년 5월 시행된 전조선 14부(군산부 27명) 선거에서 재선 의원이 된다. 이듬해 3월 23일 부청 회의실에서 열린 그해(1936) 예산심의에서 가난한 조선인이 모여 사는 동네에 의료시설이 없는 것을 지적한다. 이어 군산 행려병자구호소는 일본 내지인보다 조선인 환자가 많은 곳이니 그 촉탁의는 조선인 의사(醫師)를 발령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1938년 3월 24일 의회에서는 ‘조선인 주거지역(지금의 개복동, 둔율동, 신흥동, 신풍동, 창성동 등) 도로와 하수구 시설을 절실히 희망하였음에도 철저히 외면하고 예산을 편성한 것은 부청 당국의 무성의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소등된 곳곳의 가로등을 1년이 되도록 방치하고 있어 통행에 방해되고 있다’며 통렬히 비판하였다.
당시 군산은 일본인과 조선인 주거지에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일본인 거주 지역은 도로, 상하수도 등이 잘 정비되어 있었으나 조선인 동네는 도로가 협소하고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1930년대 상수도 보급률이 일본인은 82%인 반면 조선인은 18%에 불과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특히 조선인 주거지역은 오물처리가 되지 않아 악취와 위생문제로 일제강점기 내내 사회문제로 논란이 됐다.
전의용은 군산부 횡전정(지금의 신창동)에 거주하면서 군산체육발전과 운영이 어려운 조선인 야학 및 빈민층 구제, 달동네 생활환경 개선 등에 기여했다. 광복 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하였고, 대한체육회 이사와 대한야구협회 회장(1964년 2월~1966년 1월)을 역임했으며, 1970년 국가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계속)
※참고문헌: 조선인사 흥신록, ※자료출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2019년 12월 6일 자 <OSEN>([한국야구사 재발견](8)
/조종안 기자
관련기사
-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10)
-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9)
-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8)
-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7)
-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6)
-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12)
-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13)
-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14)
-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15)
-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16)
-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17)
-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