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 여명기①

이길용 ‘동아일보’ 기자가 1930년 4월 2일 치 신문에 조선 최초 야구경기로 소개한 사진. 1910년 3월26일(음력) 훈련원에서 열린 YMCA-한성학교 경기 장면으로, YMCA 허성(許城) 포수와 한성학교 이영복(李永複) 타자, 심판은 다카하시(高橋)한성학교 교사다./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이길용 ‘동아일보’ 기자가 1930년 4월 2일 치 신문에 조선 최초 야구경기로 소개한 사진. 1910년 3월26일(음력) 훈련원에서 열린 YMCA-한성학교 경기 장면으로, YMCA 허성(許城) 포수와 한성학교 이영복(李永複) 타자, 심판은 다카하시(高橋)한성학교 교사다./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우리나라에 서구식 체육(야구, 축구, 농구, 배구, 체조 등)이 처음 들어온 시기는 고종(高宗) 임금이 ‘교육입국조서’를 공포하는 1895년 2월 2일 이후로 전해진다.

조선 정부는 교육입국 정신에 따라 그해(1895) 4월 한성사범학교 관제를 공포하고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등 각종 관립학교를 설립한다. 고종은 지(知)·덕(德)·체(體)를 3대 강령으로 삼고, 체육 활동으로 몸과 마음을 튼튼히 하여 무병장수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권장한다. 이에 따라 각 학교에서는 체조를 정규 과목에 포함시킨다.

고종은 아관파천(1896) 때 영어학교 학생들이 체조하는 모습을 돌아본다. 당시 조련사는 영국 해군 관원이었고, 학생들은 군복차림이었다. 근대적 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고종은 현역 무관을 관립학교 체조 교사로 보낸다. 체조 교사 가운데는 훗날 독립운동가가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모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노백린(1875~1926)도 있었다.

한편, 서양 선교사들이 설립한 미션스쿨 교사들과 개화된 일부 지도층에 의해 화류회(운동회)가 성황리에 열리고, 각종 구기 종목이 전수된다. 그중 야구는 1904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초대 총무 질레트(Gillett) 선교사가 회원들에게 경기방식을 가르친 것이 시초이다. 당시 야구는 ‘서양 공치기(서양 굿)’, ‘서양식 격구’, ‘서양식 타구’ 등으로 불리었다.

야구가 처음 보급된 해로 기록되는 1904년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그 해이자 을사늑약 1년 전으로 한반도는 세계열강들이 패권 다툼을 벌이는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특히 일제 침략이 가시화되던 격변의 시기였다.

             질레트 선교사(출처: KBS)
             질레트 선교사(출처: KBS)

질레트는 ‘한국야구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우리나라에 농구, 스케이트, 복싱 등도 보급하였다. 개화기 체육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그는 1895년 배재학당 기독교계 학생회로 출발하여 사회단체로 발전한 협성회(協成會)가 YMCA 세계본부에 간사파견을 청원하여 1901년 한국에 온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식 이름 길예태(吉禮泰)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YMCA의 다른 이름은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기독교청년회 전신)였다. 질레트가 대한제국 황실에서 하사한 지원금과 뜻있는 내외국인들 성금으로 1903년 10월 28일 지금의 서울 종로에 설립한 기독교단체였던 것. 설립 목적은 교육·계몽·선교였으며 합동 연설회와 토론회 등을 개최하였다.

질레트는 체육의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YMCA 회원들에게 틈틈이 야구 기초를 가르쳤다. 캐치볼을 하는 회원들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조선인들은 ‘서양 굿’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시설이 갖춰진 운동장 하나 없던 이 땅에 최초로 ‘황성 YMCA 야구단’이 창단되고, 각 학교와 애국 청년회마다 야구팀이 구성되면서 한반도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하는 통감정치 기간(1906~1910)에 결성된 스포츠 단체는 10여 개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스포츠 불모지나 다름없던 나라에서 이 같은 비약적인 발전은 당시 정치·사회적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황성기독청년회 야구단. 앞줄 맨 오른쪽이 질레트 선교사./출처=군산 야구 100년사 
 황성기독청년회 야구단. 앞줄 맨 오른쪽이 질레트 선교사./출처=군산 야구 100년사 

경술국치(1910) 전후 운동경기, 특히 야구는 서구 문명을 효과적으로 받아들이는 통로 역할을 했으며, 항일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고종의 <교육입국조서> 공포 후 서울에서는 미국, 영국 등 외국인들의 야구 경기가 열렸다. 인천 등 항구도시에서는 캐치볼을 하는 외국인 선원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일본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도 야구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는 2002년 제작되어 야구팬들의 관심을 모았던 영화 <YMCA 야구단>에도 잘 묘사되고 있다.

1896년 4월 25일 서대문 밖 모화관 근처 공터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미국인들 경기(미국인팀-미 해병대팀)가 열렸다. 이 경기에서 미 해병대팀이 1점 차로 승리하였다. 이는 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치른 최초 야구 경기로 기록된다. 그해 5월 2일에는 훈련원에서 미국인팀-영국인팀 경기가 열려 영국인팀이 4점 차로 패하였다.

그해 6월 23일 치 <독립신문> 영문판은 25일(화) 오후 3시 훈련원에서 열리는 야구 경기(미 해병대-미국인팀) 예고 기사를 싣는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서재필 박사가 제이 손(Jai sohn)이라는 미국인 신분으로 미국인팀 6번 타자 겸 중견수로 출전한 사실이다. 서 박사가 미국 시민권자이긴 하나 기록에 나타난 최초 한국인 야구선수가 되기 때문이다. 이날 경기는 미 해병대팀이 23-16으로 승리하였다. (계속) 

/조종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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