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주의 영화 속으로 : 말모이
오늘도 소리 없는 아우성
영화든 책이든 만화든 딱히 장르를 가려서 보지는 않는 편이다. 하지만 잡식동물에게도 그 나름의 취향은 있는 법이렷다. 먹을 수는 있으나, 선택할 수 있는 경우라면 굳이 그것을 고르진 않겠다고 하는 소소한 고집 정도는 말이다. 두 손을 모아 잡고 눈을 반짝이며 ‘놓치지 않을 거예요.’라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아무래도 볼 자신이 없어지는 영화가 있곤 하는데, 내겐 <워낭소리>나 <귀향> 등이 그랬다.
예고편만 봤는데도 눈물이 홍수가 나서 이건 웬만큼 큰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영화관은커녕 집에서 혼자 다운로드 받기도 무서운 영화구나 싶었다. 다만, 2017년도에 개봉했던 <아이 캔 스피크> 같은 경우는, 예고편을 보고 위안부 내용이 나온다는 것을 짐작은 했으나, 그것을 전면적으로 내세우지 않고 기존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접근방식을 택한 것 같아서 조심스레 관람을 도전했었다.
하지만 역시나라고 할까. 중간 중간 위기의 순간은 있었으나, 무사히 잘 넘겼다고 방심했었다. 그런 나에게 ‘예끼 요 녀석아, 아직 한 방이 남았거늘!’ 하는 듯이 법정에 선 나문희 선생님께서 옷을 들춰 상처를 보여주신 순간, 아이구나 터졌구나!
김명주 님께서 대성통곡을 시전하셨습니다. 정확히는 소리를 애써 억누르고 ‘헉헙흐흡’ 같은 요상한 ㅎ을 날리며 어깨를 들썩거리는 것이어서, 대성통곡보단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문구를 표절하는 것이 내 상태에 대한 보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아니, 이거 <말모이> 영화 리뷰 아니에요? 뭔 사설이 이리 길어? 예, 선생님. 제가 말모이 보면서도 또 그랬다고요. 이번엔 “사장님, 여기 덜덜덜도 추가요.”
눈물의 말모이, 웃음의 말모이!
영화의 배경은 1940년대 초 경성이다. 우리의 말이 점점 사라져가고, 일본어가 점점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자기의 영역을 넓혀가던 시기. 판수는 일하던 극장에서 해고되고, 아들의 월사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매치기를 하다 우연히 조선어학회 대표인 정환의 가방을 훔치게 된다. 우연이 인연이 되어, 전과자에 까막눈이던 판수는 점차 ‘우리말’과 ‘우리글’의 소중함에 대해 알아가고, 정환은 판수를 통해 잊고 있었던 ‘사람의 귀함’을 다시 깨닫는다. 하지만 우리가 모여 우리의 말을 모으는 과정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극장 근처에서 광고판을 어깨에 메고 걸어 다니며 상영 중인 영화를 홍보하는 봉두에게 판수가 전수하던 맛깔나는 문구는 단순명료하게 <말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호흡으로 애절한 듯 처절하게 숨넘어가듯 전하는 ‘눈물의 ~, 웃음의 ~, 기대하시라 개봉박두!’는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짠했다. 그것은 말모이를 향해 걸어가는 과정이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미약하게 알아챘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버무려져서일지도 모르겠다.
말과 글에 담겨진 정신

국어를 공부할 때 앞부분에 나오는 항목이 있다. ‘국어의 특질’ 부분. 특징은 익숙한데, 특질은 또 뭐냐 싶다. 판수가 ‘후려치다’와 ‘휘갈기다’를 온몸으로 설명할 때, ‘엉덩이’와 ‘궁둥이’를 미투각으로 설명할 때, 문득 국어책에서 봤던 한 줄이 주르륵 지나갔다. ‘노랗다, 누렇다, 샛노랗다, 싯누렇다, 누르스름하다, 누리끼리하다,
누르스르무리하다, 누르스르무리쩝쩝하다’ 도대체 저게 무슨 색이냐고 물어보면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여러 가지 색깔을 앞에 들이댄다면, 뭐가 노란 것이고, 뭐가 누르스름한 것인지는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고유어와 감각어가 발달한 어휘상의 특질, ‘나’보다 ‘우리’를 즐겨 사용하는 화법상의 특질. 잊고 지냈던 국어가 “야, 잘 지냈냐? 나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주 혼자 잘 먹고 잘 살더라?”라며 오랜만에 만난 불편한 친구처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인지된 만큼 표현하는 것인가, 표현하는 만큼만 인지하는 것인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란이 될 수 있겠으나, 언어와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식민 지배 시 피식민지 국민들의 육체와 물질을 착취하는 것도 물론 끔찍한 행태지만, 언어를 말살시킨다는 것은 그들의 뿌리를 잡아 채 민족 근간을 뒤흔드는 그야말로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이다.
역사를 담은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항상 조상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들의 피와 땀과 희생으로 지금의 내가 이 시대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헬조선’이라느니, ‘이게 나라냐?’하는 말들도 흔하게 떠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으로, 자유인으로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신분, 성별, 지위 등에 관련 없이 편안하게 읽고 쓸 수 있다는 것, 원한다면 쉽고 자유롭게 책을 구해볼 수 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다.
우리에겐 당연한 일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누군가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혹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한 일일 테니 말이다. 지나치게 단어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우리글과 우리말에 대해 다시금 깊이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들어 준 <말모이> 영화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고.
나는 내 이름이 좋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일제의 탄압은 점점 더 심해진다. 특히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이름을 다 일본식으로 바꾸고, 그들을 소년병으로 강제 징집한다. 전쟁의 희생양이자 방패로 일개 소모품처럼 덧없이 생명을 버리는 것인데도, 황국 신민으로서 그 사실에 대해 엄청난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인지 막걸리인지 모를 소리를 영화 단체관람으로 주입시키는 장면을 보면서, 아이들의 공포감에 이입됐다. 무심코 한국어를 내뱉었다고 선생님에게 후려침과 휘갈김을 당하는 아이들. 살기 위해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내 손으로 버려야 하는 그 공포와 무력감. 그리고 그런 것들이 점점 일상이 되어, 아예 우리말을 잊고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도 잊어버리게 되는 공허함.
영화의 그런 묵직함 속에서 어린 순희는 소담하게 핀 민들레 한 송이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를 떠올리게 만드는 순희는 해맑은 표정으로 사랑스럽게 촌철살인을 던진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 의미도 모르고 나온 ‘빠가야로’에 흠칫하기도 하고, ‘아부지, 또 감옥소 가요?’라는 순진한 말에도 심장을 가격 당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나 이제 김순희 아니고 가네야마래요. 나는 김순희 좋은데.”라며 입술을 비죽이던 아이의 모습이다.
순희와는 조금 다른 의미일 수 있지만, 나는 내 이름이 좋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종종 묻곤 하는데, 나 같은 의미를 담은 이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보통은 할아버지나 부모님, 작명가가 이름을 짓는데, 거의 돌림자를 쓰거나, 좋은 한자를 택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 이름은 조금 다르다.
부모님에게서 여러 번 들은 이야기인데, 부모님께서 결혼하실 때 주변에서 다들 그랬단다. 얼마 못 가 헤어질 거라고. 신혼부부에게 무슨 악담인지는 모르겠으나, 성격이 너무 다른(혹은 너무 같아서 부딪치는) 두 분이라 주변에서 그렇게 생각했나보다. 어쨌든 그로 인해 생긴 약간의 오기와 같은 느낌적인 느낌으로 절대 헤어지지 않겠다는 각오의 표시처럼 두 분의 이름자를 한 자씩 따서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했다. 부모님께 직접 말씀드린 적은 없지만, 나는 그래서 내 이름이 꽤나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내 이름이 다짐의 증표라서. 그 마음이 내 이름에 담겨 있어서. 단순히 한자의 의미가 아니라 두 분의 의지가 내게 닿아 있어서 나는 내 이름이 참 좋다. 서로 지지고 볶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하는 두 분이시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내 나이 이상의 시간을 함께 하시는 것에 내 이름이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소심하게 한 표를 던져본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름은 그 사람의 정신이자 생명일 것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십 억 번 이상 불릴 이름. 그런 이름이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김순희가 아닌 가네야마. 이는 곧 너는 이제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일종의 통보다. 조상들의 끈질긴 저항과 숨은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내 이름 또한 김명주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
인터넷과 휴대폰이 발달하면서, 한글파괴에 대한 우려가 곳곳에서 나왔다. 타자가 대화만큼의 속도를 내야 하다 보니, 일상 언어보다 짧은 줄임말이 등장하고 각종 비속어와 은어가 컴퓨터와 휴대폰 창에 난무하게 되었다. 그 무리에 속하지 않은 이가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도 소리 나는 대로 대충 줄여서 자음만 흩날리는 글자와 문장들이 거꾸로 일상을 침범하면서, 사람들이 맞춤법과 우리말에 점점 무지해져가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그것 좀 모르고 틀리면 어때? 말만 통하면 되는 거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초반에 바로잡지 않으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미처 손댈 수 없는 문제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외계어’라는 말처럼, 어쩌면 일제식민지 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말을 내동댕이치고, 알 수 없는 언어와 정신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정환은 친일파로 돌아서버린 아버지에게 달려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낫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가 아닙니까?”
조금은 생뚱맞지만, 모 CF가 떠올랐다.
“울 아빠는 지구를 지켜요. 미세먼지를 엄~~~청 줄이고, 나쁜 연기를 없애서 공기를 맑게 해 준대요. 소나무를 많이많이 심어서 지구를 시원하게 해 주고요. 북극곰을 살려준대요.”
“아빠가 뭐 하시는데?”
“콘덴싱 만들어요.”
아이의 귀여우면서 능청스러운(?) 대사가 맛깔났던 CF가 <말모이>를 보면서 다시금 떠올랐던 건, 이 CF에 2탄이 있기 때문이다.
“걔네 아빠 짱이지?”
“그거 아빠도 하는 건데.”
“아빠도 콘덴싱 만들어?”
“아빠는 콘덴싱 쓰잖아.”
우리의 글을 만든 사람이 있다. 우리의 글을 목숨 걸고 지켜 후세에 전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걸어간 발자국이 있기에, 우리는 헤매지 않고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그 옆에 발자국을 나란히 해야 한다. 말과 글도 생명이 있다. 그것은 분명 살아 있다.
우리가 소홀히 하고 방치하면, 그것은 어느 순간 바싹 말라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 있을 때 잘하라는 명언처럼, 매일매일 돌보고 물주고 가꾸고 사랑을 주자. 콘덴싱 쓰는 걸로 지구도 지킨다는데, 일상에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올바르게 쓰는 것으로 우리의 정신과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낫다면, 5천만의 한 걸음은 훨씬 대단한 발자취를 남기지 않겠는가.
/<사람과 언론> 제4호(2019 봄)
/김명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