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주의 영화속으로
I’m a beautiful girl
난 beautiful girl
미모는 나의 무기
I’m a beautiful girl
난 beautiful girl
모두들 날 사랑해
I’m a beautiful girl
영화 <마녀>와 마찬가지로 <아이 필 프리티>를 보면서도 여러 영화가 생각났다. 그 중 <미녀는 괴로워>에서 김아중 씨가 부른 발랄한 분위기의 노래 ‘beautiful girl’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속에서 자동반복재생이 되어 흘러나왔다. 하지만 영화의 내용을 보자면, <아이 필 프리티>는 <미녀는 괴로워>보다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 가까운 영화인 듯하다. 외모는 실질적으로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이 달라진 것이니까.
매력적인 성격과 입담, 뛰어난 패션센스를 가지고 있지만, 통통한 몸매 때문에 자존감이 바닥인 ‘르네’. 예쁘고 날씬해지기만 한다면, 자기가 원하는 고급 화장품 회사 데스크 직에도 지원해볼 수 있을 텐데, 현실은 시궁창. 온 마음을 담아 간절히 소원을 빌어 보아도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 우울한 마음으로 스피닝에 열중하는데, 이게 웬 일이야! 르네의 체중을 버티지 못하고 박살난 사이클 덕분(?)에, 바닥에 머리를 쾅 박고 깨어났더니, 거울 속엔 예쁘고 날씬한 ‘워너비 르네’가 있잖아!
다친 머리로 인해 일종의 ‘르네에게만 보이는 콩깍지 효과’로 그런 것이긴 하지만, 르네의 근자감 넘치는 행동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력에 퐁당퐁당 빠져드는 주변 사람들이 이해가 됐다. “저거 완전 미쳤네!”라든지 “제발 좀 그만~oh my god!”을 외치게 만드는 르네에게 어느새 나도 홀딱 빠져버렸으니까. 물론 착각에 빠진 르네와 냉정한 현실의 대비를 통해 웃음을 유발하기 때문에 씁쓸함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것이 불편함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뻐진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던 여타 영화들과는 달리 ‘있는 그대로의 르네’를 보여줬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르네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아름다움과 부를 모두 쥐고 있어도 목소리에 콤플렉스를 느끼는 이도 있고, 실연에 아파하는 이도 있다. 내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부족할 것 없이 완벽해 보이는 이들에게도 약하고 아픈 점은 있는 것이다. 반대로 뚱뚱하고 못생겨 보이는 친구들에게도 그들만의 장점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사실 엄격하게 따지자면, 예쁘다는 것이나 날씬하다는 것의 기준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생기면 예쁜 얼굴인 것이고, 키가 몇 cm에 몸무게가 몇 kg이어야 날씬한 것일까? 어느 시대냐 어떤 사회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인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춘다는 것은 꽤나 어렵고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상적인 형태의 얼굴과 몸매를 갖추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결국 ‘pretty’가 중요한 게 아니라 ‘I FEEL’이 중요한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발판 삼아 나만의 장점을 끌어내어 나를 표현하는 것,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아닐까?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이 많아요. 자신의 부정적인 면에 너무 집착해서 자신의 근사한 점들을 놓쳐버리거든요. 그런데 당신은 자신을 잘 알고 세상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아요.”
세탁소에서 르네를 처음 만나고, 자신에게 작업을 건다고 오해한 그녀가 ‘무서워서’ 반강제적으로 사귀게 된 이든. 하지만 그는 만남을 거듭할수록 자신감 뿜뿜 넘치는 르네에게 빠져들게 된다. 르네가 환상이 깨지고 다시 예전의 추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해서 이든을 피하고 괴로워할 때도, 이든은 여전히 “난 항상 널 보고 있었어.”라고 말해준다. ‘내게도 이렇게 날 있는 그대로 봐 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찾기 보다는 일단 내가 나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주면 어떨까? ‘나는 널 사랑해. 지금 이대로의 너로 충분해. 있는 그대로의 네가 나는 참 좋아.’ 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주변의 관객들과 함께 열심히 박장대소했다. 하지만 웃는 와중에도 중간 중간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아마도 내가 지금의 표정을 되찾기까지 몇 년 동안 겪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자신감, 자존감은 완전히 바닥을 치고, 자기혐오에 몸부림치던 시간들. 죽고 싶은 만큼 동시에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열심히 이유를 찾아 헤매던 순간들.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힘겹지만 차곡차곡 하나둘 열심히 쌓아온 것들로 인해 지금의 나는 웃을 수 있는 것일 테다.
언제였더라.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정말 멋진 석양을 보게 되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하늘의 절반을 채울 만큼 커다랗고 붉은 태양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하루를 마감하려는 그 모습은 정말 내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멋진 장면이었다. 행여 놓칠세라 황급히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화면을 본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그렇게나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는데, 내 손 안의 카메라 화면에는 볼품없는 작은 동그라미가 찍혀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봤다 카메라 화면을 봤다 시선을 왔다 갔다 하기를 한참, 문득 미묘한 깨달음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 내 자신을 바라볼 때에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진 않을까? 현실에서 살아가는 실제의 나는 저 태양처럼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멋진 사람인데, 내가 나만의 왜곡된 필터를 거쳐서 형편없는 나로 바라보고 좌절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언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거나,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내면에 축적되어 온 경험들과 지식들이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사회 환경과 그 속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는 관념들 또한 나의 인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인식하고 바라보고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무조건적인 긍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를 폄하하고 혐오하고 괴롭히는 것에서 벗어나, 일종의 분리된 객체로서 혹은 제3자로서 나 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상담을 받을 때, 선생님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기 자신이, 김명주님이 정말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라고 한다면, 뭐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으신가요?”
난 저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야말로 대성통곡했다. 나 자신을 맨 뒷줄에 세워두고, 그 아이가 계속 다치고 상처받는 데도 미처 살피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온몸이 난도질당한 채 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너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인데. 미안해. 알아채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만약 내가 터널을 홀로 지나오던 그 때 <아이 필 프리티>를 만났다면, 코미디 장르라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아마 펑펑 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르네처럼 될 수 없어. 저건 그냥 영화일 뿐이야. 현실에선 사람들이 그저 비웃기만 할 걸. 저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주인공이 나는 아니야.’라며 땅을 파고 드러누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눈물을 흘리며 좌절하는 대신, 르네와 함께 미소 짓고, 르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었다.
내게서 <아이 필 프리티>를 추천받은 한 지인은,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나도 오늘부터 르네처럼 자신감 넘치게, 당당하게 살 거야!!”라고 말했다.
거기에 덧붙여,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이미 ‘르네’라고.
처음에 언급했던 beautiful girl의 가사를 조금 바꿔서 다시 한 번 불러본다.
I’m a beautiful girl
난 beautiful girl
자뻑은 나의 무기
I’m a beautiful girl
난 beautiful girl
명주야 널 사랑해
I’m a beautiful girl
/김명주(<사람과 언론> 제2호(2018 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