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주의 영화 속으로 :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홍보 포스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홍보 포스터

잘 팔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요상한 반골기질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위 ‘베스트셀러’나 ‘맛집’에 대해 매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이 나이다. 몇 번의 안 좋은 기억들이 영향을 미친 것일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면서 베스트셀러=형편없음+내 취향 아님을 확정짓는 것은 괜한 똥고집에 지나는 것이 아닌지 종종 회의가 들면서도 그것을 철회할 생각이 쉬이 들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신기한 일이다.

어느새 10년 전 영화가 되어버린 <아바타>도 천만이 넘었을 때 마지못해 봐 주마 하는 식으로 꾸역꾸역 갔었다. 장르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고, 영상은 분명 신세계를 열었다고 느꼈지만, 스토리가 뻔한 아침드라마 같았고 중간중간 뭔가 미묘하게 허술하거나 초점이 어긋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반적∙대중적으로는 충분히 훌륭하고 가치 있는 것일 수 있으나, 책이든 영화든 음식점이든, 내가 직접 체험해보아야 그것이 좋은지 어떤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을 재차 했더랬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해도, 내가 별로면 별로인 거다. 남들이 다 싫다고 해도, 내가 좋아서 미치고 팔짝뛰겠으면, 그게 바로 뽠따스틱한 거다. 900만이 넘은 시점, 이번에도 선심 쓰듯 한 번 보러 가줄까 했던 보헤미안랩소디는 다행히도 잘 팔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내게 확인시켜 준 영화였다.

아름답다=퀸

사실 퀸이라는 그룹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나에게 퀸이란 지난 호에 리뷰했던 곰돌이 푸와 같은 존재랄까. 이름은 들어봤고, 유명하다는 건 알겠고, 노래도 엄청나게 익숙하지만, 결론은 잘 모르겠소.

그런 내가 이번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면서 제일 강렬하게 느낀 것은, 목소리도 가사도 멜로디도 정말 ‘아름답다’는 말이 이렇게 딱 들어맞을 수가 있나? 하는 것이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던 프레디에게 매니저 폴이 다가가 키스했을 때, 충분히 그 순간의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물론 아마 내가 폴의 입장이었다면 프레디의 허락 하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 손등 키스 정도로 표현했겠지만.(정말?)

보통 록이라고 하면 먼저 강렬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긴 머리, 가죽 패션, 징, 주렁주렁 액세서리, 전자음, 앰프가 찢어질 것 같은 고음. 음악도 그다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 듣는 편이지만, 록은 간혹 내 귀엔 소음으로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런 편견을 <보헤미안 랩소디>가 와장창 깨뜨려줬다. 록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스타가 아닌 전설

공항의 수하물 노동자로 일하던 이민자 파로크 버사라. 그가 밴드에 들어가면서 시대를 앞서가는 독창적인 음악과 화려한 퍼포먼스로 퀸은 점차 성장한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세계를 무대로 승승장구하던 퀸의 모습을 재현하는 한편, 그들의 무대 뒤 이야기들을 러닝타임 내내 펼쳐 보였다.

퀸의 골수팬들에게는 영화에서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라든지 부족한 점이 눈에 들어와 아쉬울 수도 있겠으나, 나처럼 퀸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는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가 분명히 그들의 존재와 노래를 각인시켜 주었기에 인상적인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스타가 아닌 전설로 남고 싶었던 프레디 머큐리에게는 이 영화가 그 증거가 되지 않을까?

영화를 보면서 퀸의 특별함을 여러 가지 느꼈지만, 이들이 특히 여타 가수들보다 앞서나갔다고 생각이 든 것은, 관중과 호흡을 같이 하려고 한 점이다. 팬들을 막연히 노래를 듣고 바라보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가수와 함께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무대를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동반자로 바라본 것. 어쩌면 영화를 보며 함께 노래 부를 수 있는 싱어롱 상영관이 등장한 것도 그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가수와 함께 호흡하고 싶은 팬들의 열망을 정확히 짚어낸 그들이었기에 무대에서만큼은 외롭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이토록 오랫동안 그들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그룹이자 밴드로, 전설로 남지 않았을까 싶다.

동성애, 에이즈, 죽음, 그리고 가족

<보헤미안 랩소디>는 물론 프레디 머큐리에 집중한 영화지만, 팀 멤버들의 중요성 역시 놓치지 않았다. 프레디의 천재성이 단연 돋보이긴 하지만, 퀸이라는 그룹의 멤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이며 조율자이고,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영화 초반에는 카메라가 홀로 무대를 향해 걸어가는 프레디의 뒷모습을 비추지만, 영화 후반 라이브 에이드에서는 넷이 함께, 아니 가족과 연인, 친구, 사랑하는 팬들이 모두 함께인 장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세계를 뒤흔드는 그들의 소리 또한 말이다.

사랑하는 연인이자 지지자인 메리에게 청혼했으나, 그 후 자신의 흔들리는 정체성으로 인해 방황하는 프레디. 그런 그를 언론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출신, 성정체성, 사생활, 모든 것을 걸고넘어지고, 사사건건 캐내려 했다. 뿌옇게 흐려진 화면과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은 프레디의 상태를 말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왜 그들은 프레디의 사생활이 아닌 퀸의 음악에는 마이크를 들이대지 않았는가? 우리가 알아야 할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후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많이 무섭고 외로웠겠지만 프레디는 담담하게 앞을 향해 나아간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불꽃같았던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프레디는 멤버들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며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이 일을 가지고 소란을 떨거나, 우울해하거나, 날 동정하지 말아 줘. 그럴 시간에 음악을 만들자. 남은 시간을 희생자로 보내고 싶지는 않아.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결정해.”

진짜 밑줄 쫙 별표 다섯 개 치고 싶은 대사였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러기에 더 의미가 강렬했다. 그렇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 결정권을 너무도 쉽게 주변 사람들에게 넘겨줘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의든, 타의든 간에.

가끔씩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상황이나 의미, 뭐 여러 각도에서.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 죽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괜찮지 않은가, 하는 생각 말이다. 하기 싫은 일하다가 과로사하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일 하다가 죽는 게 훨씬 행복한 일이라는 것. 천재의 단명이 안타깝기보다는 자신이 잘 하고 좋아하는 일에 미쳐 살다 홀연히 떠나는 것도 행복하겠구나 싶었다. 물론 하고 싶은 일하면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제일 좋긴 하다. 고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은 부분적 수긍 정도로 넘어가보련다.

그냥 해 보자!

나는 음악의 힘을 믿는다. 내가 홀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하염없이 걷고 있다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 때 나를 지탱해준 것이 음악이었고, 모든 감각이 사라져 내가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이 맞는 건지, 기계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 아직 살아 있다고, 고통스럽고 괴롭지만, 아직 심장이 열심히 뛰고 있다고, 펑펑 울 수 있게 만들어 준 게 음악영화였다. 물론 좋은 감정으로 운 것은 아니었다.

시궁창 같은 현실이 하도 원망스럽고 세상도 스스로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워서 운 것이었지만, 그래도 한 번 속 시원히 울고 났더니, 그 시간만큼이라도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위플래쉬> 모든 표정이 사라져 하루에 한두 마디밖에 안 하고, 좀비처럼 죽음 같은 삶을 유지하던 나를 채찍질해 억지로라도 울게 만들었던 영화. 엄밀히 따지면, 눈물이 나올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 초반부터 내 손은 얼굴 닦느라 바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울면서 든 생각은 단 하나다. ‘왜 나는 저 사람처럼 음악에 미쳐서 살 수 없는 거지?’

피 묻은 손이 그렇게 황홀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에게 날아가던 독설이 그렇게 달콤해 보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절규하고 몸부림치는 게 어찌나 아름다워 보이고 부럽던지. 어차피 삶이 고통이라면, 의미는 있는 고통이었으면 했다. 고통을 뛰어넘어 얻는 이득이 있길 바랐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지? 곱씹을수록 그 시기의 내 삶이라는 게 참 개떡 같고 우중충했다.

몇 년 뒤 나는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음악영화를 만났다. 여기도 재능 있는 미친놈이 나온다. 우씨, 또 부럽다. 재능도 감성도 노력도 부럽지만, 원하는 것에 미칠 수 있는 게 제일 부럽다. 얼마 없는 재산을 다 팔고, 시간을 쏟아 붓고, 사람들의 비난이나 폄하, 안될 거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는 그가 부러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나는 저 사람처럼 음악에 미쳐서 살 수 없는 건가?’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지는 않았다.

리뷰마다 영화 제목 앞에 부제를 붙인다. 원래 <보헤미안 랩소디>에는 ‘미쳐야(狂) 미친다(及)'라고 붙이려고 했다. 그런데 이 미친다는 것이 둘 중 어떤 의미든 간에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이 없는 삶이란 바싹 마른 호떡과도 같다.’라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나지만, 밥벌이를 생각하지 않고 문학과 예술에만 미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분명 많을 것이기에. 거기엔 재능이나 노력, 뭐 기타 여러 가지 상황적인 측면이 있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다시 한 번 그 말을 곱씹어봤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말이, 하기 싫은 일만 하고 살라는 말과 같은 말은 아니지 않나? 그와 같은 선상에서,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주절주절 떠들었지만, 결론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더라도, 하고 싶은 것을 하고는 살자는 얘기다. 우리들은 하기 싫은 일을 잔뜩 하면서 살고는 있지만, 하고 싶은 것도 같이 하고 살다보면, 프레디처럼 완전히 음악에 미쳐서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가지는 못하더라도,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미쳐서 원하는 목표에 가까이 손을 내밀 수는 있지 않을까?

나는 매일 미치고 있고, 결국엔 미칠 것이다.

JUST DO IT! WE WILL ROCK YOU!! WE ARE THE CHAMPIONS!!!

/<사람과 언론> 제4호(2019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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