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탐구] 주시경-'오늘의 한글’을 존재케 한 선각자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언어생활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덕분이라고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문자를 만들어낸 세종의 위대한 업적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말과 글의 체계를 찾고 법을 세운 이는 단연 한힌샘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이다.

그는 이미 만들어진 한글을 과학적으로 개척한 원조였으며 ‘오늘의 한글’을 있게 한 선각자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맞춤법’의 뼈대는 모두 그의 연구에서 비롯되어 체계화됐다. ‘한글’이라는 말 역시 1908년 주시경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국어연구학회’의 우리 말 명칭 ‘배달말글몯음’이 ‘한글모’로 바뀐 데에서 연원한다.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선각자 주시경의 일생을 통해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한글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말과 글을 빼앗긴 어둠의 시대에 우리 말과 글의 체계와 법을 세우는 일에 일생을 바친 주시경 선생의 높은 뜻을 되새기고자 한다. 나아가서 우리 문화의 위인 주시경을 기억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소중한 우리네 말을 꾸준히 갈고 닦으며 겨레말의 특질을 밝히는 데 더 한층 힘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 <편집자>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 주시경의 저서 <국어문전음학> 중에서

주시경(1876-1914)은 국어학자이며, 언어 민족주의자이다. 호는 ‘한힌샘’, ‘한흰매’이며 초명은 ‘상호(相鎬)’이다. 주시경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 민족의 정신이 담긴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다.

“나라말과 글을 잃으면 민족이 망한다”

“나라말과 글을 잃으면 민족이 망한다. 너희들은 이 뜻을 알겠느냐?”

1911년 어느 날 저녁 경성 중부 박동, 지금의 조계사 자리에 있는 보성중학교 작은 교실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예!”

씩씩하고 힘찬 대답이 메아리쳤다.

이날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선어강습원 교사 주시경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우리 말글연구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어린 시절 이름 ‘상호(相鎬)’를 ‘늘 경을 읽는다’는 뜻으로 시경(時經)으로 바꿨으며, 백천(白泉)이라는 아호도 순 한글 ‘한힌샘“으로 고쳤다.

젊은 날 독립협회에 가입해 독립신문에서 회계와 교정 일을 보던 그는 1898년 10월만민공동회 사건에 연루돼 이승만, 서상대, 이동녕, 양기탁 등과 함께 투옥됐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이듬해 1월30일에는 그때까지 감옥에 있던 동지 이승만을 탈출시키려고 육혈포를 건네주기도 한 열혈 행동파였다.

이후 한동안 미국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의 한국어 교사를 지낸 주시경은 명신학교, 이화학당, 휘문의숙 등 10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다 1910년 대한 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조선강습원을 열고 제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한글’이라는 말부터 주시경이 지은 이름이다. 한글을 창제한 건 세종대왕이지만 그때는 ‘한글’이라고 하지 않았고 ‘훈민정음’ 또는 ‘언문’이라고 했다. 심지어 소위 선비들 사이에선 ‘암클’[여성을 뜻하는 ‘암ㅎ’에 글이 붙은 말. 즉,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라는 뜻]이라는 모욕적인 멸칭이 많이 쓰였다.

한글이 우리 나라글로 자리잡은 것은 1894년 대한제국 칙령 1호로 ‘법률명령은 다 국문(國文)으로 본을 삼고 한문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한다.’라는 한글 전용 법령공포 이후부터다. 그 때까지도 ‘국문(國文)’이라 부르던 우리 글자를 주시경은 1913년 ‘한글’이라 이름지었는데 한글의 ‘한’은 ‘하나’ 또는 ‘큰’을 의미하여 우리 글자의 권위를 세웠다. 참으로 뛰어난 창의적 작명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말글, 민족혼 지킨다면 반드시 일제 굴레 벗는 날 올 것”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주시경은 제자들에게 식민 치하에서도 꿋꿋하게 우리 말글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단호한 어조로 설명했다.

“피곤하더라도 두 눈을 부릅떠야 한다. 자기 말글을 잃고 일본의 일개 현 오키나와(冲繩)로 전락한 류큐(琉球)를 보거라. 우리의 처지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 말글과 민족혼을 굳게 지킨다면 반드시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날이 올 것이다.”

확신에 찬 그의 훈시 앞에 김두봉, 장지영, 최현배, 권덕규, 이병기, 염상섭, 변영태, 현상윤, 신명균, 이규영 등 조선의 영재들이 눈빛을 반짝였다. 장차 이 땅에서 어문학계와 문화계의 주역으로 활약할 인재들이었다.

“자, 이제 책을 펴라.”

제자들은 스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책상 위에 「조선어문법」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책은 1910년 주시경이 저술한 현대문법의 종합서 「국어문법」을 수정하고 제목을 바꿔 다시 낸 한글교과서였다. 나중에 제자들이 만든 한글맞춤법통일안의 기본 이론서가 된 책이다. 순 한글 문법 용어를 사용한 이 책은 그 무렵 중학교 학생들과 조선어강습원 수강생들의 교재였다.

주시경이 조선어강습원으로 이용하던 보성중학교는 구한말 정치가 이용익이 설립했고, 노백린 장군이 2대 교장으로 재임했다. 노백린은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윌로스 지역에 비행학교를 설립한 독립투사다. 주시경은 그이 도움을 받아 민족의 얼을 깨우고 지키기 위한 어문 독립운동에 몸과 마음을 바쳤다.

그 무렵 중국인들도 자기 말글에 위기의식이 있었다. 아편전쟁 패배, 영불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 이어진 청일전쟁 패배로 큰 충격을 받은 중국 지식인들은 어려운 한자로는 정치개혁과 국민 계몽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표음 위주의 문자개혁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중국의 대문호이자 선각자 루쉰(魯迅)이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漢字不滅 中國必亡)”고 했겠는가.

중국의 상황이 이런데도 유림을 비롯한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한글을 업신여기고, 여전히 한자를 최고의 문자로 떠받들었다.

주시경은 이같은 사대풍조를 개탄하면서 제자들에게 우리 말글을 아끼고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사랑하는 지름길이라고 가르쳤다.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므로 이지러짐 없이 반듯하게 자리를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킬 수 있다. 글은 또 말을 닦는 기계라서 기계를 닦은 뒤에라야 말이 잘 닦인다. 말과 글이 거칠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이 다 거칠어지고, 말과 글이 다스려지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이 잘 다스려지는 법이다. 너희는 우리 말글을 아름답게 가다듬어 후손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주시경은 서구 열강의 패권주의를 흉내 내면서 아시아를 어지럽히는 일본의 기세가 쉽게 수그러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사실이 분통터졌고, 그들이 앞으로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할지 상상하면 가슴이 아렸다. 그럴수록 우리 민족은 근본을 굳게 지키며 자주독립의 기회를 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조선어강습소에 있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했다.

“너희는 일본인인가, 조선인인가?”

“조선인입니다.”

“그렇다. 조선인은 조선의 말글을 익히고 써야 한다. 식민지 조선의 백성으로서 이보다 시급한 일은 없다. 언어를 빼앗기면 민족의 얼을 빼앗긴다. 그 일을 바로 너희가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스승의 뜻에 감동한 학생들은 저마다 조선 문화의 지킴이라는 긍지를 가슴에 품었다. 주시경은 그들과 함께 언문(諺文), 정음, 반절(反切) 등으로 불리던 우리 말글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한민족이라고 불렸다. 한이란 말은 ‘크다’ ‘으뜸이다’라는 뜻과 ‘하나’ ‘바르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한민족의 글이자 세계에서 으뜸간다는 뜻이 있는 한글은 어떠하냐?”

“한글?”

“그렇다. 우리 민족의 글인 동시에 잃어버린 대한제국의 글이라는 뜻이니 멋있지 않으냐.”

“멋집니다. 그럼 이제 한글이라고 해야겠군요.”

그때부터 제자들은 언문으로 부리던 우리 말글을 한글이라고 고쳐 불렀다.

얼마 후 역사학자 최남선이 귀중한 고전을 보존하고 편찬하여 국민을 깨우치겠다는 취지로 조선광문회를 만들었다. 주시경은 조선 광문회에 참여하여 국어 관련 서적의 보존과 편찬을 도우면서 제자 김두봉, 신명균, 권덕규 등과 함께 필생의 사업으로 삼은 말모이 편찬에 뛰어들었다.

“힘껏 조선의 말을 모으자. 튼튼한 말광에 보관하면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

첫 국어사전 원고, ‘말모이’와 한글연구서

주시경은 우리의 정신이 담긴 말과 글을 연구하는 것이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는데 매진했다. 1911년부터 주시경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최초의 국어사전 원고 ‘말모이’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말모이는 1911년부터 시작돼 어휘 수집에서 주해까지 진행됐다. 그렇게 4년 남짓 노력이 영글어 가던 1914년 7월 어느 날, 주시경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제 겨우 38세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제자들은 넋을 잃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선생님이 안 계시면 우리가 이 큰일을 매조질 수 있기나 하겠는가?”

말모이 편찬사업은 주시경의 타계와 함께 표류했다. 김두봉, 장지영, 신명균 등이 앞장서서 방향타를 잡으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스승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다.

그 무렵 일제는 식민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어 교육을 적극 장려하고 나섰다. 교육, 행정, 사법, 학술 등 주요 분야에서 일본어를 쓰게 함으로써 조선어는 배워도 쓸모없는 2등 언어가 되어갔다. 뿐인가.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해 일본인 교사와 경찰, 관리들에게 반드시 조선어를 습득하도록 했다. 1920년에는 관변학자들을 동원하여 「조선어사전」까지 펴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주시경의 제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일본인이 어찌 우리말 사전을 펴낼 수 있단 말인가?”

“이대로 있다가는 죽어서도 선생님을 뵐 낯이 없을 것이다.”

장지영, 최현배, 신명균 등은 마음을 다잡고 조선어연구회를 만들어 한글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교묘한 견제가 이어지자,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바꾸고 전열을 정비했다.

말모이는 출간되지 못했지만 이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로 이어져 우리말 사전 편찬의 기틀이 됐다.

우리 말글을 지키려면 ‘말모이’를 만들자

일본은 조선을 손아귀에 넣은 뒤 이 땅을 대륙침탈의 전진기지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일찍부터 그런 일본의 야심을 꿰뚫어본 주시경은 그들이 한반도를 완전한 일본땅으로 만들기 위해우리 말글을 파괴하려는 책동을 벌이리라 예상했다. 때문에 그는 틈만 나면 제자들에게 말모이 편찬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보아라. 지금 강도 일본이 우리 강토를 침략했으니 앞으로 한민족의 근본을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문화요, 그 문화를 지탱하는 것이 언어다. 그러므로 저들은 제일 먼저 우리 말글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우리 말글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말모이를 만들어야지. 그래야 뒷날 어떤 일이 생겨 우리 말글을 쓰지 못하더라도 되살릴 수 있는 힘이 된다. 이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너희가 힘을 합쳐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어떤 희생이 따르든 해내야 하는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 퍼져 있는 우리말 어휘를 모으는 것이다.”

덜렁봉에 닿은 하늘 만져보러 올라간 여덟살 주시경

여덟살 때(고종 20년, 1883년) 일이다. 서당에서 강(講)을 마치고 난 3월13일에 금방 동무들과 놀다가 하늘이 남쪽에 솟은 덜렁봉 위에 닿음을 보고 하늘이 어떠한가 만져 보러 산에 오르게 됐다. 중턱에 이르니 꽃들이 만발하여 여러 동무들은 꽃 꺾기에 정신이 팔려 묏부리에 오르기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주시경은 가파르고 높음을 무릅쓰고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았다. 하지만 거기에 가 보아도 하늘은 닿은 것이 아니요, 거기서 끝없이 높음을 깨달았다. 하늘이 산봉우리에 닿은 것처럼 보임은 눈의 착각임을 깨달았다. 의심나는 환경의 사물에 대한 지식욕, 연구력에 대해 철저한 의지력을 가졌음은 이같이 어린 때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주시경 선생 전기>, 김윤경

주시경은 ‘한힌샘’이라고 불리는 한글 정책가이고 연구자이며 동시에 교육자였다. 근대 한글 연구에서 주시경을 빼고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공헌이 크다. 한힌샘 뜻은 ‘크고 흰 샘’이라는 의미다. 백의민족이라는 말과 잘 어울렸다.

1896년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만드는 일을 도와 대중들을 깨우치게 하고, 1908년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하여 한글 연구의 기초를 마련했다. 1911년부터는 첫 우리말 사전 원고인 ‘말모이’ 집필을 주도했으며, 우리나라 글자에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어 처음으로 퍼뜨리며 한글 보급에 힘썼다.

1910년 전후의 주시경은 국어 문법의 기초를 세웠고 한글을 체계화하여 현대 한글의 아버지가 됐다. 그러나 39세에 너무나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죽었기에 일제의 독살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1914년 주시경이 사망하고, 광복 후 우리 학자들은 외래 음운 이론에만 매달려서 주시경이 크게 재조명되지 못했다. 무관심 속에 주시경의 친필 원고는 헌책방을 떠돌기도 했다. 심지어 201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였다. 한글 창제에 세종대왕이 있었다면 현대 한글에 주시경이 있지만, 국가와 학계는 그를 소홀히 다루었다.

국어 음운 연구와 국어 문법 등을 짜임새 있게 정리한 최초의 인물.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하였다고 표현해도 된다. 마지막 저술서인 <말의 소리>에서는 서구 언어학보다 앞서간 발견을 하였는데, 구조 언어학적 논리를 자세히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음운론에서 음소에 해당하는 ‘고나’의 발견, 형태론에서 어소로 해당되는 ‘늣씨’의 발견이 그 좋은 예이다. 근대 한국어에서 그 존재가 희미해진 ‘아래아’의 공식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주시경은 근대화에 상당히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배재학당에 입학할 적 가족과 의절까지 하며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앞장서서 머리를 깎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진취적인 성격이었기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이었겠지만...

‘글은 말을 적으면 그만이다’는 생각이 한글 연구 동기

주시경이 국어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한문 강독법에 의문을 품은 데서 비롯된다. 당시 한문 강독법은 한문 원문을 그대로 음독하여 달달 외우게 한 뒤, 나중에 우리말 토를 붙여 무슨 뜻인지 풀어 주는 방식이었다.

이를테면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와 같은 방식의 교육이다.

주시경은 마지막 우리말 단계에서야 애들이 말귀를 알아듣는 것을 보고 한문과 우리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말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길로 국어를 연구하게 됐다.

주시경의 수제자인 한글학자 최현배는 「신천지」9권 6호(1954년)에 ‘한글의 계승자 주시경 스승’이란 글에서 스승의 모습을 이렇게 기렸다.

“스승이 우리말 연구에 뜻하기는 열일곱살 적이었다. 이 때에 서당에서 한문을 배울 때, 그 글 뜻을 풀이할 적마다 우리말로 옮김을 보고는, 속으로 헤아리되, 글이란 것은 말을 적으면 그만이로다. 그러나 적는 방법이 이 한문처럼 거북하고 어려워서야, 이 글로써 온갖 지식을 얻어내기는 참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만일 우리 글로써 이 한문을 갈음할(대신할) 것 같으면 참으로 수고는 적고 거둠은 많을 것이로다. 그러면, 내가 공부해 보리라고 은근히 마음으로 작정한 바가 있었다.

열아홉 때에 서울로 올라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국문도 배우고 영문도 배웠다.”

국어학자 김윤경도 「주시경 선생 전기」에서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열일곱 살(고종 29, 서기 1892년) 되던 때였다. 서당에서 이 진사에게 한문을 배울 때 이 진사가 한문의 뜻을 해석하려면 반드시 우리말로 번역함을 보고, 선생은 속으로 ‘글은 말을 적으면 그만이다’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오르게 되었다. 이것이 한글 연구에 일생을 바치게 한 동기였다.”

이후 주시경은 상경하여 열아홉 살 되던 해(1894년) 머리를 깎고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신학문을 접하여 그때부터 국어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최현배는 또 “5천년이나 묵은 우리 말, 5백년이나 묵은 우리 글의 황무를 열어 이룩하고자 혼자서 괭이를 잡은 스승의 개척자스런 노고는 무엇으로 비유할손가? 어릴 적에 덜렁봉에 올라가고야 말던 그 정신 기백으로서, 스승은 외로운 가운데서도 끝내 그 일을 이뤄내 주었다. 스승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항상 잊지 아니하는 일은 우리 말 연구이었다.……스승은 집에서 밥을 먹거나 길을 다니거나, 언제든지 머리 속에는 항상 우리 글, 우리 말에 관한 문제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라고 스승을 우러렀다.

엄숙하면서도 부드럽고 살가운 얼굴빛

「신생」 2권 9호(1929년)에 주시경 선생 15주기 기념 특집으로 꾸민 ‘주시경 선생 인상기’에서 제자인 가람 이병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 ……좀 갸름한 듯하고 넓으신 선생의 얼굴에는 언제든 엄숙은 하시면서도 보드럽고 살가운 빛이 은은히 나타난다. 특별히 선생의 웃으시는 것도 볼 수 없으려니와 또한 성내시는 것도 볼 수 없다. 그리고 선생님의 눈에는 남다른 애정이 넘치는 듯하며 그 푸대하신 몸피며 중키는 되시는 키며 엄전하신 풍채가 모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경복하는 마음을 나게 한다.

……그 좁고 침침한 교실에서 더운 여름 추운 겨울에 가지가지 괴로움을 다 받아가며 그 수많은 학도들이 조선말을 배우는 것이 반드시 조선말 그것만을 끔찍하게 알고 덤빈 것도 아니니 만일 선생의 타고난 정성이 아니면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다. 그 수많은 학도들이 누가 오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요, 누가 가라고 해서 간 것도 아니다. 제각기 선생 한 분을 믿고 바라온 것이다.

……오늘날 사람사람이 가갸 자나 알게 되고 한글 운동, 철자 문제 하고 네오 내오 떠들게 된 것도 오로지 그 때 선생 한 분의 마음과 힘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생각하면 더욱 선생의 그 때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한글날에 추모되는 주시경 선생은 ‘세종대왕 이후의 이 한분 뿐’

제자 장지영은 “한글날에 추모되는 주시경 선생은 ‘세종대왕 이후의 이 한분 뿐’”이라는 신문 기고(조선일보 1930년1월 11일자)를 통해 한 줄에 꿴 듯한 스승의 한글 연구를 우러르고 있다. 장지영의 글을 보자.

“한글 기념날을 맞이한 우리로서 이 날에 잊힐 수 없이 문득 생각나는 어른 한 분이 있으니 이는 옛 한힌샘 스승 주시경 어른이다. 이 어른은 그 어렸을 때부터 한글을 찾으며 바로잡기에 뜻을 두어 그가 돌아갈 때까지 한결같은 정성으로 쉼없이 흔들림과 꺾임이 없이 나아갔다. 그리하여 한글을 바로 찾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시었다.

그 어른이 서울 남쪽 창골 구석 게딱지같은 오막살이 집 캄캄한 방 속에 들어앉아 당신의 손으로 책을 베끼어 가면서 연구를 하고 상동청년학원 한 모퉁이를 빌려서 ‘국어강습소’라는 자그마한 문패를 붙이고 ㄱㄴㄷㄹ을 부르짖을 때에는 남들은 그이 마음의 쓰라림과 아픔을 조금도 알아줌이 없이 도리어 ‘쓸데없는 짓을 한다. 미친 사람이다.’ 이처럼 웃고 흉을 보았다. 그렇지마는 그 어른이 열어 놓으신 길을 밟고 나아 온 오늘날에는 그의 생각한 바는 차차 이루게 되어 한글은 그가 터 닦은 대로 바로잡혀 가는 중에 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지어놓으신 뒤에 잘 쓰이어지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짓밟히고 헐리어서 그의 본낯을 잃어버리고 불쌍하게도 그 목숨만을 전하여 오던 것을 이 어른의 손에 이르러 곱게곱게 다듬어 묻혔던 얼굴을 찾아내고 붙었던 때를 떨어버리게 되었다. 세종대왕 이후 그동안에 이 글[한글]에 대하여 연구한 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마는 그네들은 다만 한학의 여가에 한 부속적으로 그 발음이나 어떠니 어떠니 함에 그쳐버리고 이글을 독립적 글로 씀에 그 자체가 어떻다든지 문장이 어떻다 함에는 조금도 생각이 미침이 없었다.

그런데 이 어른은 우리라는 터 위에서 우리가 이 글[한글]을 독립적 문자로 쓰기에 맞는 글을 닦아 세우느라고 힘을 쓰신 것이다. 이 글이 한 번 창조되어 세상에 나온 뒤로 글답게 대접을 받고 우리라는 터전 위에서 독립적 문자로 자리가 잡히기는 이 주시경 어른으로부터 비롯하였나니 나는 감히 이 어른을 가리켜 세종대왕 이후의 한 사람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제자 신영철은 「한글」 4권10호(1936년)에 ‘주시경 선생을 추모하며’라는 글에서 이렇게 돌이켰다.

“나는 주 선생을 오랫동안 가까이 사귀었으므로 그를 여러 가지로 잘 압니다. 그는 감화력을 가졌으므로 남을 잘 감복시킵니다. 그는 친절합니다. 그는 생활이 엄숙하므로 금주 금연을 하였습니다. 그는 뜻을 세운 사람이라 조선어연구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그대로 나아갔습니다. 주 선생 당시의 조선은 그가 혼자 담당하다시피 되었습다.”

주보따리, 인재 모아 한글교육에 힘쓰다

주시경은 자신이 평생 연구해온 것을 뿌리내리기 위해 한글교육에 힘썼다. 전국 각지에 조선어강습원을 세우며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큰 보따리에 교재를 싸서 옆에 끼로 다녀서 사람들이 그를 ‘주보따리’라고 불렀다. 그의 열정적인 교육 덕에 수많은 걸출한 제자들이 배출됐고, 제자들은 그의 정신을 기리며 한글 연구와 한글 발전을 이어가기 위해 힘썼다. 주시경의 제자들은 국어 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한국어를 연구하고 한글을 쓰기 쉽게 다듬어, 한국어를 근대성을 지닌 언어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이바지했다.

독립신문이 출간될 때 순한글로 교정을 보는 일을 했으며, 독립협회에도 참여했다가 서재필이 떠난 후에는 제국신문에 글을 싣거나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의 한국어 강사, 상동청년학원 강사로 취직해서 살았다. 그 와중에 배재 학당을 졸업하였으나 높은 학구열로 흥화학교 양지과(量地科), 정리사 수물학(數物學)을 3년 동안 공부했다. 양지과는 지리학, 수물학은 수학 분야를 뜻한다.

그는 엄청난 학구열로 여러 학교에서 강사를 맡게 되었다. 간호 학교, 공옥 학교, 명신 학교, 숙명여학교, 서우 학교의 교원이었으며 협성 학교, 오성 학교, 이화학당, 흥화 학교, 기호학교, 융희학교, 중앙학교, 휘문의숙, 보성중학교, 사범강습소, 배재학당의 강사를 맡았다.

주시경은 국어 교사만 했을 것 같지만 양지과, 수물학을 나왔기에 주산, 지리에도 능했다. 책가방을 쓰지 않고 보따리에 책을 넣고 다녔는데, 빡빡한 수업 일정 때문에 늘 바삐 뛰어다녔고, 그로 인해서 보따리가 대차게 휘날리는 탓에 별명이 ‘주보따리’였다.

주시경은 1907년 창립된 국문 연구소 등에서 활동했다. 자신의 호인 한힌샘을 비롯하여 문법 용어, 학술 용어들을 토박이말로 지으려는 시도를 처음으로 했는데, 이를 두고 한문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두루때글’이라며 비웃기도 했다. 두루때글은 주시경의 한자를 새김(訓)으로 읽은 것 아니던가. 주시경의 이름에 쓰인 한자들인 두루 주(周)/때 시(時)/글 경(經)의 훈독 부분을 차례로 붙이면 두루때글이 된다.

독립만세의 씨앗을 뿌리다

배재학당 시절 감리교 신도가 돼 세례를 받았던 주시경은 외세의 침략이 외래 종교의 유입을 통한 민족성 파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과감하게 기독교 신앙을 버렸다. 대신 국조 단군을 추앙하면서 민족의 역사를 드높이는 대종교에 귀의했다.

일제의 폭압적인 민족 개조 책동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주시경은 동포들에게 민족의 긍지를 바탕으로 독립자존의 정신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그는 틈만 나면 제자들에게 우리 말글이 단군왕검을 시조로 하는 반만년 역사의 토대에서 태어났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민족의 인종적 특성과 한반도의 자연적 특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나온 보물이 한글이라고 생각했다. 태초에 한반도가 열리면서 이 땅에 자리 잡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알맞은 언어가 한글이라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최고의 문자 한글로 찬란한 겨레의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므로 한글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 민족의 존립기반이 사라질 것이다.”

주시경은 본래는 개신교 신자였지만 대종교로 개종했다. 그러다가 다시 개신교로 돌아왔다고도 한다. 실제로 말년에 별세할 때까지 상동 청년 학원, 배재 학교, 이화 학교 등 기독교 계통 학교 교사로 꾸준히 활동했으며, 그의 장례식 또한 감리회인 상동교회에서 거행됐다고 한다.

한때 종교적인 주제로 주시경과 논쟁을 벌인 전덕기라는 감리회 목사도 있었으나, 전덕기 목사 역시 주시경 선생처럼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였다.

배재학당의 졸업생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배재고등학교에는 주시경관이라는 건물이 세워져 있다.

말모이 꿈과 우리말 사전의 시작

“우리 겨레어가 사멸될 위기에 처했다.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우리뿐이다. 세상에 있는 우리말을 모두 모으자.”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자 주시경은 김두봉, 이규영, 권덕규 등 제자들을 이끌고 조선광문회에 들어가 조선어사전편찬부를 조직, 말모이 사업을 시작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쓰는 말, 빨래터나 시장에서 쓰는 말, 산간의 화전민이 쓰는 말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모아야 한다.”

그들은 각처의 교사와 학생들을 동원하여 비밀리에 도시와 농촌에서 수많은 생활용어를 수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녀자들이 빨래터에서 쓰는 말, 상인들이 시장에서 쓰는 말, 농부들이 논밭에서 쓰는 말 등 다양한 우리말을 적은 카드가 조선어사전 편찬부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방언은 지역이 문화를 보여주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방언이 사라지면 향토의 뿌리를 잃는다.”

“우리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다 지금 각 지방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중심으로 정리하자.”

그들은 어휘 자료들을 한데 모은 뒤 비교·분석 작업을 통해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다른 말을 가려내고 , 각 지역의 말을 모아 옛말, 방언, 새말, 전문어, 고유명사 등으로 구분했다. 이 원고는 크게 네 부분(알기, 본문, 찾기, 자획 찾기)으로 구성됐고, 각 표제어는 ‘외래어 표시 부호→표제어→한자·영자 →문법용어→전문용어 →의미풀이 순으로 정리됐다.

말모이 사업을 시작한 지 4년여, 우리말 사전의 형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박차를 가하면 그토록 소망하던 말모이가 완성될 터였다. 주시경은 연구비를 조달하느라 빈털터리가 됐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열정적으로 말모이 사업을 이끌던 그가 1914년 7월 27일 급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39세라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요절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 국어학계는 정말 아까운 인재를 일찍 보내야 했다.

주시경의 죽음과 함께 완성 단계에 접어들던 말모이 사업은 뿌리째 흔들렸다. 편찬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고, 조선광문회에서도 이들에게 공간을 허락지 않았다. 무엇보다 스승을 잃은 제자들의 상실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두봉, 장지영, 권덕규, 신명균 등은 스승의 무덤에서 해가 질 때까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아아, 말모이는 이루지 못할 꿈이었던가.”

1919년 3·1 운동 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지 전술을 바꾼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 민족을 완전히 말살하기로 하고 '창씨개명', '신사 참배' 강요, 한글 금지 정책을 밀어붙인다. 이에 우리 글을 지키고자 만들어진 사전이 <말모이>이다. 가로 쓰기법을 사용하여 <ㅁㅏㄹㅁㅗㅇㅣ>라고 쓴 적도 있었다.

말모이 뜻은 ‘말을 모은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사전’의 뜻은 말씀 사(辭), 법 전(典)이니 ‘말의 방법’이란 뜻이다. 그러니 의미적으로는 말모이 뜻이 사전과 같다고 봐도 되겠다. 실제로 말모이는 1911년부터 주시경, 김두봉, 이규영, 권덕규가 편찬 작업에 들어갔던 사전이다. 그러나 주시경의 죽음과 김두봉의 망명으로 실제로 발간되지는 못했다.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른다”

주시경은 언문이라 천시받던 훈민정음에 ‘한글’이란 이름을 처음 붙였다. 그는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제작과 한글 교육,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국어 연구에도 힘썼다. 한마디로 그는 국어의 규범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한글을 정립한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독립운동가였던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1896년 창간하면서 주시경을 독립신문의 교보원(校補員, 오늘의 편집 기자 겸 교열 기자)으로 채용했다.

주시경은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하면서 국문 표기법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는 신문사 안에서 국문 동식회(國文同式會, 최초의 국어연구회)를 만들고 국어 문법과 한글 표기법 연구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한글 전용, 한글 띄어쓰기, 쉬운 국어 쓰기도 실천했다.

서재필이 러시아의 불합리한 절영도 통치 요구를 규탄하는 과정에서 미국으로 추방되자 주시경도 신문사를 퇴사한다. 이후 주시경은 ‘제국신문’에서 기재(記載, 일종의 기자) 생활을 하면서 선교사인 스크랜턴(W. B. Scranton)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수십 개의 학교를 오가며 국어 교사로서 강단에 섰다.

뿐만 아니라 주시경은 ‘국문 연구소’에서 진행한 국문 표기법 정비 작업에 위원으로 참여해 그 연구 결과물로 1909년 12월 ‘국문연구의정안’을 제출했다. ‘국문연구의정안’은 바로 공포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주시경은 국어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국문연구’(1909), ‘국어문법’(1910), ‘소리갈’(1913), ‘말의 소리’(1914) 등을 저술해 표의주의 철자법 확립, 한자어의 순화, 한글 풀어쓰기 등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주시경은 ‘국어 강습소’, ‘조선어 강습원’ 등을 개설해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그는 헌신적으로 연구와 강의에 매진하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일제 강점기에 그의 제자들이 ‘조선어 학회’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해 우리말 사랑의 명맥을 이었다.

‘독립신문’에 ‘국문론’ 발표

“조선말로 문법책을 정밀하게 만들어서 남녀 간에 글을 볼 때에도 그 글의 뜻을 분명히 알아보고 지을 때에도 법식에 맞고 남이 보기에 쉽고 경계가 밝게 짓도록 가르쳐야 하겠고 또는 불가불 국문으로 사전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문을 아는 사람일지라도 한문의 음만 취하여 써서 놓은 고로 흔히 열 자면 일곱이나 여덟은 모르나니 차라리 한문 글자로나 쓸 것 같으면 한문을 아는 사람들이나 시원히 뜻을 알 것이다. 그러나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어찌하리요. 이런즉 불가불 한문 글자의 음이 조선말이 되지 않은 것은 쓰지 말아야 옳을 것이다.”

위 글은 1897년 9월 25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것으로, 주시경의 ‘국문론’이다. 그는 그 당시 배재학당 학생으로 이 신문사의 회계 겸 교보원의 일을 보고 있었다. 필자의 이름은 ‘쥬샹호’인데 주시경의 처음 이름은 주상호(周相鎬)였다. 전후 2차에 걸쳐 실려 있어 사실상 두 개의 논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위 날짜의 논설란(오늘날의 사설란)에 “주상호 씨가 국문론을 지어 신문사에 보내었기에 좌에 기재하노라” 하고 논설 대신 실은 글의 핵심 내용 일부분이다. 위 글은 우리말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한 문법책과 옥편 곧 사전의 편찬이 절실함을 밝힌 글이다.

한글학자 주시경도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하면서 한글연구에 몰두했다. 주시경은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을 때에는 배재학당의 학생이면서 ‘독립신문’의 ‘회계사무 겸 교보’의 일을 보기 시작했다. 그 후 회계의 일은 그만두고 ‘총무’가 되었다가 1898년 봄부터 9월까지는 ‘총무 겸 교보’의 일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독립신문’에 2편의 ‘국문론’을 발표했다. 1897년 4월 22일과 24일자, 그리고 이 해 9월 25일과 28일자 1면 논설란에 실린 글이 그것이다.

이 글은 22세의 청년이 쓴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내용이다. 전편에는 오늘날 읽어 보아도 별로 흠잡을 데가 없는 당당한 문자론이 전개되어 있고 후편에는 그가 생각하고 있던 맞춤법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들이 제시되어 있다. 이 후편의 내용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가령 ‘강’(江)이나 ‘산’(山)과 같이 이미 우리말이 된 것은 국문으로 써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한자의 음을 국문으로 써 놓으면 한자 모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아는 사람도 그 뜻을 알아맞히기 어려움을 지적한 점이다. 당시의 이른바 국한문혼용체가 한문에 국문으로 토를 단 것이었고 국문체란 것도 이것을 그대로 국문으로만 옮겨 놓은 것이 많았음을 비판한 것이다. 이것은 언문일치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지적한 매우 중요한 발언이다. 그리고 명사 또는 대명사의 예를 들어 이들과 조사를 구별하여 표기할 것을 주장한 점도 주목된다. ‘이거시’라 쓰는 것은 문법을 모르기 때문이요 마땅히 ‘이것이’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학구적이고 진취적이었던 서른아홉 해의 삶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던 1876년에 태어나 일제 강점 직후인 1914년에 별세하기까지, 주시경은 서른아홉 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참으로 굵직한 획을 그은 시대의 위인이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열아홉 살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접하면서 시작되었다. 배재학당 지지학(地誌學) 교사였던 서재필로부터 총애를 받으면서 『독립신문』의 회계 겸 교보원이 됐는데, 서재필은 국문과 영문으로 발행한 이 신문의 사장 겸 주필이었고, 주시경은 부책임자로서 국문판의 편집과 제작을 담당하면서, 사실상 모든 실무를 주관했다.

주시경은 배재학당 만국지지과 및 보통과를 졸업하고, 이후 여러 학교에서 근대 학문을 두루 접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뿐 아니라 항해술, 측량술, 의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독학으로 식물학, 기계학, 종교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토록 박학(博學)이었던 그는 여러 학교와 강습소, 외국인 연구소 등에서 교사로 일했다. 또 인쇄 직공으로, 간호원으로, 학교 사무원으로, 협성회 간부로, 『협성회보』 기자로, 독립신문사의 회계·교보원·총무로, 독립협회의 간부로, 국문동식회와 만민공동회의 조직자 겸 지도자로 그야말로 촌각을 다투는 분주한 삶을 살았다. <사람과 언론> 제8호(2020년 봄)

/이강록 기자

<참고 문헌>

「한글의 큰 스승」 국립한글박물관, 2019

「사전의 재발견」 국립한글박물관, 2018

「한글 만세,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 조선어학회, 47년간의 말모이 투쟁기, 이상각, 2013

≪주시경전집≫상 이기문편, 아세아문화사, 1976

저작권자 © 전북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