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건재(健齋) 정인승(鄭寅承)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아는지? 좀 생소하다. 그런데 ‘혼천의’라면? 어디서 조금 들어본 듯하기는 한데… 그렇다면 1만원권 뒷면 그림은 기억하는지? 아하 그렇구나. 이제야 익숙해진다. 흔히 혼천의는 과학계측 기계의 대명사처럼 돼 있다. 일종의 천체위치측정기로서 일월오행성의 위치를 측정하는데 쓰였던 천체관측기구이다. 서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상 앞에도 모형이 있다.
선기옥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 소년이 서숙에서 한문을 배울 때였다. 15세 무렵에 서경(書經)의 선기옥형(璿璣=璇璣玉衡)을 읽었다. 그런데 훈장의 풀이가 신통치 않았다. 훈장이 풀지 못하는 그 심원한 이론을 소년은 똑똑하게 풀어냈다. 그리하여 소년은 고향에서 천재(天才)란 찬사를 들었다. 뒷날 소년은 애국지사이자 학자가 됐다. 우리말을 배우고 연구하는 사람들 귀에 아직도 맴도는 ‘ㅣ모음 역행동화’를 1937년에 최초로 주창한 바로 그 학자다.
1938년에 발표한 ‘모음상대법칙과 자음가세법칙’ 등 몇몇 이론은 21세기 언어학 이론이 풍미하는 지금에도 여전히 높이 평가되고 있고 불변의 지침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학계에서는 국어학과 함께 영원히 그 생명을 유지하리라고 평가한다. 그가 바로 한글학자이자 애국지사인 건재 정인승 선생이다. 건재의 이러한 주장과 신념을 그냥 외면하고 버려둔다면 우리 학문에 대한 손실이요 죄가 될 것이라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때문에 일제에 주권을 빼앗겨 나라가 어려웠던 시기에 나라의 얼, 말, 글을 지키고 바로 세우느라 고심하고 혼신의 힘을 쏟았던 건재의 정신을 오늘날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더불어 건재 탄생 2주갑이 넘은 지금 시점에서 그의 학문과 애국 항일정신을 재차 기려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다. <편집자>
“말과 글 지켜야 제 나라와 민족 지킬 수 있어”
“말과 글을 그대로 지니고 지켜가고 있는 민족은 비록 남의 민족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독립이 되어 제 나라를 세울 수가 있되 말과 글을 잃게 되면 그 나라 그 민족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건재 정인승 선생 어록 -‘국어운동 50년 조선어학회 시절’ 중에서)
말과 글이 왜 중요한가. 독립된 민족으로 제 나라를 세울 수 있게 하는 구심체가 되기 때문이라고 건재는 역설했다.
“말은 그 겨레의 정기와 정신을 지켜주는 그릇이며, 겨레정신은 그 겨레의 부다.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은 우리 겨레를 말살하기 위해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했다. 우리 겨레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우리말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1979.5.7. 연세춘추 기자와 대담에서)
이렇듯 건재는 우리 겨레를 지키기 위해 우리말 연구에 몰입했다고 밝히고 있다.
“겨레나 나라를 떠난 개인이 없으며, ‘큰 나’를 위한 ‘작은 나’의 희생은 영원한 것이니, 요행이 아닌 주체정신으로 허영을 버려야 한다”(1973. 11. 21.)
건재는 ‘나를 알자’라는 주제의 글에서 겨레와 나라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런 건재 선생의 생각은 건대신문 제 428호(1973) ‘자아발견을 위한 모색’에서 자세히 드러난다.
“누구나 흔히 생각하기를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라고 함이 보통이다. 그런데 실상은 ‘나’라는 것이 어떠한 것임을 정말 옳게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누구를 물론하고 각기 개인적 육체적인 존재로의 ‘나’는 그 개인에 한한 ‘작은 나’임에 대하여 그 ‘작은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한 정신적인 공동체인 그 사회, 그 민족, 그 국가같은 것은 그 개인의 ‘큰 나’인 것이다. 그래서 ‘작은 나’가 없이는 ‘큰 나’가 있을 수 없는 동시에 , 또한 ‘큰 나’가 없이는 ‘작은 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말 항상 ‘나’를 옳게 알고 그 ‘나’를 참으로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는 항상 ‘큰 나’를 잊지 않고 ‘큰 나’의 이익을 앞세워 생각하는 것이 ‘작은 나’에서도 정말 이익이 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은 나’만의 이익을 앞세우면 도리어 자멸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 ‘큰 나’의 이익을 앞세우면 ‘작은 나’에게도 참된 이익이 됨을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건재의 우리말에 대한 사랑과 집념은 가히 신앙이나 다름 없었다.
함흥사건때 분실된 『큰사전』원고 천신만고끝 찾아 발간 이어가
건재는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조선말 큰사전>(제 l권 첫판의 책이름은 <조선말 큰사전>이었으나 6·25를 겪은 뒤에 『큰사전』으로 이름을 고쳤다)의 발간에 헌신하여 1947년 첫째 권을 발간했고 1957년에 마지막 6권을 출간했다.
선생의 최대 공적은 1936년에서 1957년까지 21년간에 걸쳐 손수 진두지휘하여 『큰사전』의 편찬을 완간한 것이다. 이 국어사전이 나옴으로 해서 민족문화의 찬란한 금자탑이 세워졌다. 16만개 이상의 우리말 어휘에 대해 뜻풀이를 했고, 3,558쪽에 달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이라는 험난한 폭풍우를 뚫고 이뤄낸 업적이어서 장쾌한 일이었다.
아울러 이 사전의 발간으로 우리민족의 존엄을 대내외에 잘 드러낼 수 있었다. 『큰사전』은 뒷날 남북한 국어사전의 모범이 되었고, 국어의 발달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큰사전』에 수록된 올림말 수를 보면, 순우리말이 74,612(45.5%)를, 한자어가 85,527(52.1%), 외래어가 3,986(2.4%)로 총 164,125 말수를 차지하고 있다. 일제가 일본어로 해설해 간행한 <조선어사전>(1920)보다 3배가 많은 16만 우리말 어휘를 수집하고 주해했다는 점은 민족어 사전 편찬의 가치를 말해준다.
일제가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탄압하면서 사전 편찬은 중단됐다. 해방 이후 일제가 압수한 사전 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됐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말 큰사전>이 1947년에 1권이 나왔다. 편찬을 시작한 지 28년 지난 1957년 총 6권으로 완성됐다.
건재는 ‘큰사전 편찬을 마치고’라는 글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이야기 중 실로 기구하고도 조마조마했던 내력을 털어놓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함흥 사건 때 사람과 함께 증거물로 압수되어 함흥 재판소로 실리어 간 원고는 400자 원고지 평균 250매로 엮은 것이 53책이었다. 이 53책의 원고는 우리 온 겨레의 정중한 부탁과 열성적인 기대 아래에서 십유여 년을 두고 “개미 금탑 모으듯이” 알알이 모아 쌓은, 그리고도 뜨거운 눈물과 피땀으로 엉기어진 결정인 것이었다. 4278(1945)년 8·15 해방으로, 그동안 갇혔던 사람은 서울로 돌아왔건마는, 이 53책의 원고는 어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물러가는 왜적의 발악으로 모든 중요한 서류들과 함께 불 속의 재가 된 것만 같았다. 얼마 뒤에 서울역 운송점의 창고 속에서 발견되었으니, 이는 함흥 지방법원에서 불복 상고한 최후의 네 사람에 대한 증거물로서 서울 고등법원으로 보내는 도중이었던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그냥 함흥에 있었더라면 그야말로 불속의 재가 되고 말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다시 우리의 손에 들어오지 못한 채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 참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이 원고를 다시 손에 쥔 우리의 감격은 잃었던 국권을 다시 찾음과 함께 우리의 가슴을 한동안 진정치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한글 제122호, 1957>
위기일발의 고빗사위를 넘은 순간이었다. 이런 곡절 끝에 『큰사전』이 탄생했다.
아버지 통곡에 따라울며 얻은 왜적에 대한 적개심
건재의 왜적에 대한 적개심과 나라 사랑 정신은 9세 소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홉 살 되던 해에 두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데 뒷날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철이 들 만하게 된 아홉 살 때의 어느 날, 당시의 애국신문이었던 황성신문에 특호 활자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고 보도된 것을 보신 아버님이 ‘나라가 그예 망하는구나!’ 하면서 통곡하는 울음 소리에 영문을 모르고 함께 따라 울었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그 때 밤이면 나타나 일병들에게 피해를 입혔던 맨주먹의 의병들에게서 애국을 느꼈고 일제시대에 청년기를 보낸 까닭인지 나라 잃은 설움의 한을 품고 보낸 것이 내 젊은 시절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내 나이 여든 일곱에’, 건대학보 36. 1983년 10월.)
“나라를 빼앗긴다는 얘기를 듣자 어린 소견에도 어찌나 분하고 억울한지 그 시절 이 후부터는 왜놈만 보면 진저리를 치게 되었다. 이런 난리 속에 동네에서 가장 크던 우리 집은 일본군에게 징발당하여 병참소로 사용되었다.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마을에 머물면서 갖은 나쁜 짓을 하고 있던 중 하루는 나의 형 인영이 일본군의 총에 맞아 팔을 다친 적도 있다.” (‘국어 운동 50년’, 전북일보. 1977년. 6. 14.-1977. 9. 29.)
어렸을 적에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성장기의 소년 건재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고, 일생의 삶의 방향이 되었다. 이 때 얻은 왜적에 대한 적개심과 겨레 사랑 정신은 삶의 지표로 자리잡았다. 진학할 학교 선택, 졸업 후의 직장 선택, 직장에서의 행적, 조선어학회 활동, 해방 이후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그 정신은 일관되게 나타난다.
보통학교를 나왔으니, 전문학교를 가려면 서울로 가서 고등 보통학교를 가야겠는데, 집안에서 못 가게 했다. 21살이 되어도 혈육이 없으니 안 된다는 것이다. 건재는 할 수 없이 도망가기로 했다. 밤에 120리 길을 충북 영동까지 가서 차를 기다리다가 뒤쫓아 온 집안사람들에게 붙들려 가고, 서울까지 갔다가 붙잡혀 갔으나, 끝내 세 번째에는 아버지가 졌다.
세 번 가출 끝에 신학문 열망 이뤄
건재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배경은 이렇다. 건재는 신학문에 대한 열망이 컸다. 급기야 세 번의 가출 끝에 부모의 숭낙을 받아내 서울에서 수학하게 된다. 이 때 부모님께서 숭낙하면서 나라를 빼앗겼으니 공부는 하되 벼슬은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셨다고 한다.
서울에 온 건재는 숙항인 정만조 씨 댁에서 1917년에 흥화 학교, 1918년(22살)에 연정 학원, 국어보급학관 고등과, 중동학교 강습반을 다녔다. 1919년(23살)에 3·1 운동이 일어나, 만세를 부르다가 귀향하여, 사촌언니가 사다 주는 새 학문 책을 읽으며, 와세다 강의록으로 문학, 법률까지 공부했다.
중동학교를 졸업한 건재는 전문학교 진학을 위해 법률전문학교에 원서를 낸다. 그러나 원서를 내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청년들한테서 ‘왜 일본놈이 세운 학교에 들어가느냐’는 말을 듣고는 시험을 포기했다. 건재 선생이 마지막 종강 모임에서 밝힌 내용이다. 건재는 ‘국어운동 50년’에서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서울에는 아직 대학은 없었고 전문학교로 법률전문, 의학전문, 고등공업, 고등상업 등 일본인이 세운 학교와 아직 총독부의 인가를 얻지 못한 채로 기독교 계통의 서양인들이 운영하던 연희전문이 있었다. 이듬해 봄 법률전문학교에 지원을 해 놓고 3월 초에 있을 입학시험을 기다리고 있던 중 3월 1일에 기미독립만세 사건이 터졌다.
이 마당에 무엇 하러 일인이 세운 학교에 들어간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서 나는 법률전문의 입학시험을 포기해 버렸다. ……나는 당분간 고향에 내려가 있을 생각으로 하숙집 천장에 숨겨 두었던 독립선언서 한 장을 꼬깃꼬깃 접어서 버선 밑에 숨겨 가지고 장수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이듬해에야 아직 인가도 나지 않은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소년기에 싹튼 나라 사랑 정신은 청년이 된 뒤 더욱 타오른다. 1921년(25살)에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미국 가려면 영어를 알아야 하므로 영어를 전공했다. 1학년 봄 방학 때, 제1회 전문학교 입학 자격 검정 시험을 치렀는데, 응시생 22명 중 혼자서 합격했다. 건재는 그러한 1등밖에 모르는 공부벌레였다.
나라 사랑과 한글 보급에 바친 일생
건재의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은 한글 사랑을 통해 승화된다. 건재가 한글의 우수성을 깨우치게 된 계기는 위당 정인보 선생을 통해서였다.<주시경 학보13 국어학사 재조명, 정인숭 참조. 새 국어생활 제 6권 제 3호(’96년 가을)>
더불어 건재가 우리말에 관한 구체적인 관심과 사랑을 가지게 된 것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김승곤, 1996, 건재 정인승 선생의 생애와 학문, 「새국어 생활」 6-3, 국립국어연구원)
선생은 연희전문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했는데, 국어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바 그 까닭은 이러하다. 건재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가장 존경하며 친했던 분은 김윤경 선생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건재가 ‘건대학보’ 36호에 쓴 글을 통하여 나타나는데, 그 글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김윤경 선생)는 나보다 3년 먼저 입학하여 졸업반의 수석이 된 분으로, 우리글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분이다. 김윤경 님은 그의 옛 스승 주시경 선생의 창의적인 국어문법 학설을 체계적으로 습득하여 나에게 우리말을 연구하게 영향을 준 바가 적지 않아, 영문법교수인 백남석 선생의 영어 구문론 해설을 체계적으로 습득한 것과 함께, 나름대로의 국어 문법에 대한 이치를 전개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아울러 정인보 선생의 수사학 강의와 피시어 (Fisher) 교수의 셰익스피어 강의, 원한경 교수의 아동심리학 등은 나에게 학문적,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김윤경 선배와 정인보 선생 두 분은 잊을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정인보 선생은 수사학 강의 시간에 ‘새벽 서리 찬 바람에……’라는 구절을 예로 들면서, 한문으로 된 글보다 한글로 된 글이 더 우수하다고 하면서 한글의 뛰어남을 가르쳤던 데서도 자극을 받아 건재의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됐던 것이다. 건재의 국어에 대한 사랑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건재가 연희전문학교에서 1년을 마치고 고향엘 갔는데 친구들로부터 전문학교 입학 자격시험을 준비하자는 편지와 전보를 받게 됐다. 당시에 연희전문학교는 잡종학교였으므로 정식 자격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전검이 필요했다. 제의를 받은 건재는 취업에 뜻이 없었고 미국 유학을 생각하였으므로 거절했다. 그러자 친구들이 시골까지 찾아와서 권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준비하여 응시했던 바 17명 가운데, 오직 건재만 합격하게 됐다. 당시의 전검은 30과목을 일주일 동안에 보게 돼 있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고 한다. 낙방한 16명은 모두 다음 해에 합격하게 됐다. 건재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언어’에 대하여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므로 ‘언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건재의 나라 사랑 정신은 직장 선택에서도 나타난다. 1925년(29살)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건재는 미국 유학의 뜻을 품는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에 부딪치자 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취업을 결정했다. 1925년 4년간의 전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앞둔 건재는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피시어 교수로부터 고학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그는 유리창을 닦으면서 공부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유학을 떠나려고 하니까 여비가 없어 계획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되자 1년간만 취직하여 여비를 마련하기로 결심을 하게 됐다. 때마침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이 건재를 찾아 와서 자기학교 영어교사로 와 줄 것을 부탁하게 되어 건재는 쾌히 승낙했다. 송도고보에 취업하기로 하고 부임을 기다리던 중 뜻밖에도 고창고보 양태승 교장이 만나자고 하여 찾아갔더니 자기 학교로 오라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도고보 교장과의 선약도 있고 하여 건재는 별 생각 없이 만나는 데만 뜻을 두고 교육에 대한 토론만 했으나, 교장이 말하기를 “송도고보는 체제가 다 잡힌 학교라 당신이 가도 빛을 보지 못할 것이나, 고창고보는 신설인데다가 당신이 오게 되면 최대한의 활동을 보장할 것이니, 신설 학교를 좋은 학교로 만들면, 당신이 더욱 빛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즉 “수석으로 모시겠다”는 약속을 하므로 송도고보를 포기하고 고창고보로 가기로 결정하게 됐다. 그래서 고창고보로 부임한다. 여러 면에서 좋은 조건이던 송도고보를 포기하고 고창고보를 택하게 된 까닭은 고창고보가 민립학교라는 것 때문이다.
고창고보는 “고창 군민들이 빈부를 가릴 것 없이 세금을 거두듯이 얼마씩 할당하여 30만 원이란 돈을 모아 재단법인을 설립한 학교”였다. 나라와 겨레 사랑 정신을 불태우던 청년 정인승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 되었던 것. 그리고 건재는 여기에서 젊은이들에게 국어 교육과 국가관, 민족정신을 가르치는 보람으로 그렇게도 갈망하던 미국 유학의 꿈을 버린다. 이와 같이 건재는 장래를 결정하는 데에도 자신의 영화보다는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을 앞세웠다.
건재는 1925년 4월 1일부터 1935년 8월 31일까지 만 10년 반 동안 고창고보에서 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1928년부터 일제는 우리말을 교과과정에서 삭제해 버려 국어 교육이 금지되어 있었는데도 고창고보에서는 학교 내규로 국어를 계속 가르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고창고보는 정주의 오산학교와 더불어 애국정신을 심어 주는 교육을 하고 있었으므로 당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광주학생사건 후, 소위 사상불온으로 퇴학당한 학생의 전입학을 금지시켰던 당국의 지시에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고창고보는 이들 학생을 받아들여 우수한 인재를 기르고 있었다. 따라서 전북학무국에서는 민립인 고창고보를 공립으로 만들기 위하여 획책하게 되었다. 드디어는 건재가 요시찰 인물로 간주되어 가히 쫓겨나오다시피 하여 10여 년의 고창고보 교단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우리말 과목 빼버린 일제 개의치 않고 시간설정해 가르쳐
정인승이 고창고보에 교사(조선어 및 영어 담당)로 근무한 것은 1925년 4월 1일부터이다. 이 학교에서 근무한 동안이 모두 10년 남짓 되는데, 일제가 우리말 과목을 교과 과정에서 빼버린 뒤에도 선생은 이에 개의하지 않고 여전히 우리말 시간을 설정해놓고 심혈을 기울여 가르쳤다.(리의도, 정인승 선생의 「한글 강화」에 대하여, 한말연구 제3호 1997,6 한말연구회)
고창고보 영어 교사로 부임한 정인승은, 국어 교육에 더 많은 정열을 쏟는다. 당시는 국어 교육을 할 수 없는 시기였는데도 건재는 과외로 우리말 강좌를 개설하는가 하면 교장을 설득해 당시에는 불법이었던 국어 강좌를 비공식적으로 개설하여 국어 보급과 민족정신 함양에 힘썼다.
“조선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1주에 한 시간뿐이었다. 거기에 비해 일본어 시간은 l주에 여섯 시간씩이나 되어 독본, 습자, 작문 등을 골고루 가르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장차는 조선어 시간을 없앨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다. 내가 고보에 간 것은 영어 교원으로 간 것이었지만 이런 현실을 보니 분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영어 교육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에게 국가관과 민족 관념을 심어 주려면 국어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을 들어 교장에게 몇 번이나 얘기해 봤지만 동감을 하면서도 총독부의 교육령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정규 시간에는 넣지 못하더라도 과외로 지도를 하기로 하고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비공식적인 방법에는 여러 가지 애로가 많았다. ……과외 지도로는 강제성을 띨 수가 없었다. 또 일인들에게는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 처한 건재는 하는 수 없이 당시 일본인이면서도 조선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일본 중의원을 역임한 바 있는 일본 정계의 거물 ‘마쓰도미’를 움직여서 총독에게 조선어 교육을 허가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공식적인 허가는 안 되고 비공식적으로 눈감아 주겠다는 확약을 받고 본격적인 국어 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이리하여 l주에 다섯 시간씩 국어 시간을 배정하고 국어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마쓰도미는 고창고보 전신인 고창보통학교 설립자이다. 건재의 국어 교육 전념으로 고창고보는 영어 교사를 별도로 채용해야 했다.>
이렇게 하여 영어 교원으로 부임한 건재는 국어를 전담하고, 새로이 영어 교원을 채용하게 된다.
“포부에 부풀어서 나는 욕심 사납게도 1주에 5시간으로 국어시간을 늘렸다. 독본 2시간 문법, 작문, 습자 각각 1시간씩이었다. 그래서 영어는 뒷전에 놓아두고 각 학년의 국어를 내가 맡았다.”
건재가 이 때 가르친 제자들은 뒤에 국어 교육에 큰 역할을 한다. 해방 이후 국어 교육이 부활되자 많은 국어 교사가 필요하게 됐는데 그 부족한 교사의 상당수는 이 때 고창고보에서 국어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하니 한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국가에 얼마나 공헌하는가 짐작할 만하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 건재와 함께 함흥감옥소에 수감됐던 권승욱은 건재가 고창고보 교사 시절 가르친 제자이니 이 또한 선생의 영향이라 할 만하다.
건재의 국어사랑 정신은 조선어학회와의 인연으로 꽃을 피운다. 일제가 민립학교였던 고창고보를 통제가 쉬운 관립학교로 바꾸려 하자 선생은 이에 맞서 반대했다. 건재는 1935년 8월31일 고창고보 교사직을 그만둔다. 일제의 눈에 ‘요시찰 인물’이 되어 더 이상 올바른 교사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글 학회를 향한 일념과 사전 편찬

건재의 일생은 청렴과 봉사와 희생의 생활이었다. 고창고보를 쫓기다시피 물러난 뒤 잠시 양을 기르는 목장을 경영하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직업을 갖지 않았다. 오직 조선어학회에서 사전 편찬에 관한 일과 「한글」(49-93호)의 편집 및 발행에 관한 일 그리고 「한글」(49-108호와 125-132호)의 ‘물음과 대답’란의 집필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강습회를 열어 국어 교육을 시키는 일(해방 이후의 강습회는 교사, 공무원, 회사원 등 주로 관청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했음), 초·중·고등학교의 교재를 만들어 보급하는 일(해방이후에는 초·중·고에서 가르칠 국어 교재가 없어서 한글 학회에서 교재를 만들고, 나라에서 무료로 나눠 주었는데 건재는 이 일에도 관여했다), 그러니까 1936년 조선어연구회에서 사전 편찬의 주간을 맡은 뒤로부터 1952년 전시 연합대학 강사로 출강할 때까지 인생의 황금기를 오로지 국어를 위한 일에 전념했다.
건재는 ‘정인숭’이란 이름으로 된 사전을 내지 않았다. 몇몇의 출판업자들로부터 제안도 받았지만 사전은 학회의 이름으로 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거절했다고 하니 건재의 고귀한 정신은 여기에도 나타난다. <‘나의 스숭 건재 정인숭 박사님’, 조오현>
고창 고보를 그만둔 건재는 1935년 9월에 지금의 서울 돈암동인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에서 양을 기르고 있었다. 세상이 싫어 은둔 생활을 하는데, 옥에 흙이 묻어도 흙일 수가 없는지 1936년 봄에 외솔 최현배가 찾아왔다. 조선어학회에서 추진 중인 ‘조선말 큰사전’ 편찬의 일을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건재는 승낙하고 그해 4월 1 일부터 사전 편찬의 일을 맡아보게 됐다. 그리하여 조선어 학회에서 큰사전 편찬 주간을 맡게 된다. 건재는 사전을 시작하면서 ‘사전 편찬에 관한 전반적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국어사전의 길잡이가 된다. 그 논문이 「한글」 제36호(1936. 7·8)에 실려 있다.
외솔이 건재에게 사전 편찬의 일을 맡아보도록 추천한 까닭은 이렇다. 당시 김병제 님이 조선어학회에서 ‘한글’의 ‘물음과 대답’란의 ‘대답’을 책임 맡고 있었는데, 고창고보의 정인숭 님의 물음을 답할 때는 여간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정인숭이란 이름이 학회 안에 알려지게 됐다. 즉 사전 편찬의 적격자로 꼽혔기 때문이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최현배는 홍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연금되다시피 되어 사회활동을 할 수 없게 되고 이윤재는 1937년 6월 7일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혀 가게 되며, 다른 사람은 직장 일로 사전 편찬에 전념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사전 편찬의 일은 건재와 이극로 박사 두 분이 학회를 대표하여 맡아보게 됐다. 건재는 이때부터 사전 편찬은 물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수정 및 기초위원(1936.11.28.~1940.6.15.),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49-93호,1937.10.~1942. 4. 5.) 의 편집 및 발행을 맡았고, 「한글」의 ‘물음과 대답’란의 ‘대답’을 집필했다.
건재가 학회에 들어간 지 만 3년이 지나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애썼던 가운데 1939년 말에 완성된 원고의 3분의 1 가량을 총독부 도서과에 내어 본문 중 많은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1940년 3월 13일 겨우 출판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출판 자금이 없어 애태우던 중, 이우식 선생이 원고 작성이 끝날 때까지 매달 250원씩 학회 운영비를 내놓기로 했다. 그리하여, 출판 허가를 받은 원고를 1942년 봄부터 조판을 시작하게 됐다.
일제 모진 고문 견디며 희생을 통해 얻은 영예
사람으로 태어나서 의롭게 살다가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독한 일인가는 건재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부유했던 가산은 탕진됐고, 고문에 시달린 몸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그들이 어찌나 오른 손으로 얼굴을 때려 댔던지 나의 왼쪽 눈과 귀는 퉁퉁 부어 있었다. 지금도 왼쪽 귀는 그때 맞았던 자리가 풀리지 않고 굳어 버려 짝귀인 채로 있다. 이렇게 매를 맞다 보니 회원 중에 환자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큰 혜택이라도 주는 것처럼 의사를 불러다 치료를 받게 하고 주사도 맞게 했지만 돈은 우리가 부담하는 것이었다. …… 그 때 오른쪽 팔에 주사를 어찌나 맞았던지 지금도 팔이 굳어 있다”< ‘국어 운동 50년’>
그들의 고문은 악랄하기 짝이 없었다. 흥원 경찰서에서도 고문은 계속되었는데 그 고문의 종류는 네모난 몽둥이로 때리기,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코에 붓기, 비행기 태우기, 동지끼리 몽둥이로 서로 때리기 등 갖은 악형을 다 당하였다. 비행기태우기란 십자가 모양 매어 달린 팔이 비틀려 그 아픔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고문을 그들은 ‘공중전’, 물 먹이기를 ‘해전’, 죽도나 목총으로 마구 때라는 것을 ‘육전’이라 했다.
“……다른 방에 끌고 가서 주전자로 물을 먹였다. 물을 먹일 때는 긴 걸상에 뉘고 머리만 끝에 처지게 하고는 주전자 물을 코로 마구 들어붓는 것이었다. 물을 먹으면 곧 기절을 했다. 한동안 기절을 했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배가 뺑뺑해 있었다.……비행기태우기란 두 팔을 등 뒤로 젖혀서 두 손을 한데 묶어 허리와 함께 동여 놓고 두 팔과 등허리사이로 목총을 가로질러 꿰어 놓은 다음 목총의 양 끝에 밧줄을 묶어 연무장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빙글빙글 돌려서 밧줄을 꼰 다음 탁 놓으면 빙글빙글 빨리 돌아 정신을 잃게 되는 것이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또 그들의 고문은 간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본 이름으로 ‘시바다(본명 김건치)’라는 형사는 이윤재 선생의 제자였는데 처음에는 “이 선생 웬 일이십니까?” 하고 인사까지 하였으나 며칠이 지나자 자기 담당이 아닌데도, 이윤재 선생이 취조 받고 있는 곳까
지 쫓아가 “윤재야! 네까짓 놈이 선생이냐? 개×같은 놈 같으니 맛 좀 봐야 바른 대로 대겠느냐”면서 마구 패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치가 떨리며 천인공노할 일인가. 나라를 파는 데는 윤리 도덕도 모르는 친일파들의 한 단면을 보인 것이었다.
건재는 이러한 고통과 수치를 무릅쓰고 오직 나라와 겨레와 국어만을 위해 전심전력했다.
1942년 10월 3일 권승욱이 불려 나가더니 3일 동안 계속 권숭욱만이 불려 나가, 얼마나 고문을 당했던지 말할 수 없이 초췌해 보였다. 3일이 지난 날 아침 식사 후 건재가 불려 나갔다. 형사 세 명이 심문을 하는데 “왜 사전을 만드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호구지책으로 한다”고 답하니까, 갖은 욕설에다 한 자 가량 되는 네모난 고무 몽둥이로 어깨와 등허리를 마구 때려 온몸이 문신을 그려 놓은 듯하였다. 이런 고문이 일 주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아파서 식사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르는 건재에게 같은 감방 선배가 “매를 맞지 않으려면 대충 저네들이 하는 대로 했다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일 주일만에 저네들이 위협하는 대로 승복하고 말았다. 소위 자백서에 지장을 찍은 후 남의 부축을 받다시피 하여 감방으로 들어갔다.
함흥 경찰서에 갇힌 지 3주일이 되던 날, 건재는 다시 불려 나갔다. 온몸이 죄고 다리가 후들거려 걸음을 옮겨 놓을 수가 없어 기다시피 하여 나갔다. 이극로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끌려 나왔다. 이극로, 권승욱, 건재 세 사람은 그 길로 홍원 경찰서로 이감되어 제 3감방에 수감됐다.
“국어 사용자를 처벌했다” 학생일기 트집잡아 조선어학회 수난
1942년 여름, 홍원에는 함흥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함흥 영생여고는 사립학교로 꽤 알려져 홍원에서 통학들을 많이 하였다. 그 당시 통학차에는 고등계 형사가 몰래 요시찰 인물 을 조사하러 타고 다니곤 했다. 어느 날, 통학생들은 저희들끼리 무엇인가를 종이에 그리며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몰래 그린 그림은 태극기라고 소곤거렸다. 무궁화란 말도 오고 갔다. 이들이 주고받은 귓속말과 그들이 그린 그림이 태극기였다는 사실을 안 고등계는 ‘불량 학생’ 검거에 손을 대었다. 일제의 철저한 앞잡이였던 야쓰다(고등계 형사부장)에게 제일 먼저 잡혀 간 사람은 명치대학을 졸업한 박병엽이었다. 별 혐의를 잡지 못했던 경찰은 박병엽의 집을 뒤지다가 그의 질녀 박영옥이 쓴 일기책 몇 권을 발견했다.
박영옥은 함흥 영생여고 4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야쓰다는 일기책을 샅샅이 읽어 가던 중, 박영옥이 2학년 때 쓴 일기에서 “국어를 사용하는 자를 처벌하였다”라는 글귀를 발견하고, 이것을 트집잡기 시작했다. 박영옥은 구속되고 동급생들이 경찰에 불려가 일주일 이상이나 고문으로 시달린 끝에 정태진과 김학준 두 선생이 민족주의 사상을 학생들에게 불어넣었다는 사실을 자백 받고 말았다. 홍원 경찰서에서는 정태진 선생을 부르기로 하고 증인 소환장을 발부했다. 서울 종로구 화동 129번지 조선어학회에서 사전 편찬에 여념이 없었던 정태진 선생이 소환장을 받은 것은 1942년 9월 5일이었다. 소환장을 받고 별일 있겠느냐 하며 홀홀히 떠난 정태진을 홍원 경찰서에서는 가두어 놓고, 갖은 고문을 다하여 조선어학회가 독립을 목적으로 암암리에 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허위 자백을 받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선어학회 수난이 시작되기에 이르렀다.
1942년 9월 30일, 이극로, 권승욱, 정인승 세 분이 밤새도록 사전 편찬의 일을 하고 정인승이 10월 1 일 첫 새벽에 퇴근하여 혜화동 성벽 밑 막바지에 있는 자택으로 발길을 옮겼다. 원고 일부가 인쇄에 붙여졌고 남은 원고 정리가 바빴기 때문에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일을 했다. 사전 편찬에 관하여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면서 집 대문에 다다랐는데 대문이 열려 있었다. 서재 겸 살림방으로 쓰고 있는 안방문도 열려 있었다. 문을 열어 놓은 안방 안에는 낯모르는 양복쟁이 두 사람이 반듯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종로서에서 온 형사였고 한 명은 홍원 경찰서에서 온 형사였다. 그 길로 건재는 체포되어 종로서 감방에 수감됐다.
10월 2일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형사에게 끌리어 널찍한 대기실 같은 데로 가 보니 이중화, 장지영, 이극로, 최현배, 한징, 이윤재, 이희숭, 김윤경, 권승욱, 이석린 여러명이 잡혀 와 있었다. 체포된 열한 분은 종로 전차 정거장까지 걸어가서 밤 9시경 전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함흥행 열차를 탔다. 10월 3일 새벽에 기차는 함흥역에 도착했다. 거기서 이극로 권승욱 정인승 세 분만을 내리게 하고 다른 분들은 함흥 경찰서로 데려가 수감했다.
이렇게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까지 일본 경찰에 잡힌 사람은 모두 서른세 분이었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 감옥에 수감
1933년에는 5백 년 동안 녹슬어 버림받아 왔던 민족의 최대 국보인 한글은 많은 연마와 많은 실험을 거듭한 끝에 온 겨레의 통일된 정신으로 새로운 과학적 정리가 일단 완성을 보았다. 이어서 1936년에는 유사 이래 흐트러지기만 하여 왔던 각 지방 각 계층의 무표준한 각종 용어가 또한 많은 조사와 토의를 거듭한 끝에 각 지방 지도층의 애국적 충심에 의한 호양과 협동의 정신으로써 한국 국어로의 표준어가 사상 처음으로 대체적인 원만한 사정이 이루어졌다. 모든 악조건이 중첩한 역경 속에서의 이와 같은 악전고투의 보람이 하나하나 피어린 열매를 맺어감과 함께 민족의 역사적 숙망으로 일찍부터 여러 번 계획을 되풀이하여 오던 국어사전의 편찬 사업이 이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한 여러 동지들의 합심 협력에 의하여 가까스로 추진이 계속됐다. 이를 비상한 의구심으로 노려보아 오던 일제는 이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보아 『큰사전』 원고가 거의 탈고에 이른 1942년 10월 1일 첫 새벽을 기하여 불시의 기습으로 학회 관계자 전원을 검속하고 학회의 존재까지 뿌리를 뽑아버리기를 서둘렀다.
전후 5,6차례에 걸쳐 30여 명을 잡아다가 홍원 경찰서에 몰아넣고는 고등 형사 십명이 전문으로 분담해 가지고 매일 밤낮 갖은 고문으로 만 1년 동안 하루같이 두들겨 가면서 치안유지법 제1조에 꼼짝없이 옭아매기에 만전을 기했다.
대일본 황국신민으로서 조선말은 무엇 때문에 연구하느냐? 철자법은 통일해서 무엇을 하며, 표준어는 사정하여 무엇에 쓰자는 것이냐? 한글 잡지는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 내며, 조선말 사전은 무슨 필요로 만들자는 것이냐? 한글날은 무슨 뜻으로 기념하며 한글노래는 무슨 의도로 지어냈느냐? 여름마다 각지로 다니면서 한글 강습은 왜 하는 것이며, 틈틈이 기회만 있으며 학술 강연을 빙자 삼아 눈가림의 집회는 왜 자꾸 하느냐? 신문 잡지에 이러이러한 문구는 고의적인 민족사상의 고취가 아니냐, 이러한 가지가지 계획적인 구실 심문과 무자비 일변도의 강제고문에는 한마디의 논의도 통할 바 없고 털끝만한 인간미도 용인될 수 없음이 그 사회에서의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잔인한 고문에 쾌감을 느끼는 그리고 그 능숙한 솜씨에 스스로 긍지를 느끼는 그 악랄한 무리들은 선량한 학자들을 마치 잡아다 놓은 쥐를 놀리는 잔인한 고양이와 같이 갖가지 방법으로 이리 치고 저리 치며, 엎치고 뒤치며, 차고 공구르며, 비행기태우기며, 냉수 퍼먹이기며, 뺨따귀에 주먹질, 뒤통수에 뭇매질, 이루 말할 수 없는 갖가지 못된 짓을 마음껏 했다. 그들의 상습이었다.
가람의 낙천적 기풍에 이따금 위안
“우리로서는 평생에 상상도 못했던 인간지옥이 실제로 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두드려도 하소할 데가 없는 곳이 거기임을 처음 알았다.” 건재의 토로였다. 이리하여 만 1년이 되니까 일행은 몸과 증거물들과 모두 함께 함흥의 형무소로 옮겨져 갔다. 거기서는 지긋지긋한 고문은 없어지고 다시 예심이라는 새로운 심문이 시작되었다.
홍원 유치장은 감방이 다섯인데 우리 일행만도 30여 명인지라, 부득불 한 감방에 여러 명씩 섞어두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가람이 같은 감방으로 되었고 낮으로 앉는 자리, 밤으로 자는 자리도 나와 가람이 맞붙은 자리로 되었었다.
이따금 간수(看守)의 눈을 피해가면서 소곤소곤 이야기도 하게 되고 때로는 희롱삼아 글귀도 주고 받고 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깊은 겨울 긴긴 밤에 지루하고 괴로운 향수를 이기지 못해,
“공산에 달이 밝고 빈뜰에 흰눈이라/ 철창에 쓰러진 몸이 잠 못 이뤄 하는 적에/ 어 디서 기러기 소리는 나의 애를 끊나니?”
하고 가만히 읊조려 보았더니, 태연스레 빙그레 웃는 가람은 주어진 환경을 달게 여길 뿐, 무어 그리 초조해 할 것 있냐는 듯이,
“해진 옷에 실밥 뽑고 이쑤시개 바늘 삼아/ 밥풀 단추 달아 입고, 속옷을 벗어 내어 / 따뜻한 볕살 아래에 이 사냥을 하도다”
하고 손가락으로 마루바닥에다 천천히 써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가람의 낙천적인 기풍에 이따금 위로를 받곤 하였다.<신동아 제53호, 1969>
가히 초탈과 달관의 경지라 아니 할 수 없다. 그 감방의 스산한 수형 생활 중에 이런 유머러스한 대화를 하다니 가람과 건재의 정신적 깊이를 가늠할 수나 있겠는가 말이다.
“사전 편찬의 제일인자, 한글 운동가이면서 도덕군자”
김승곤 전 한글학회 회장(건국대 교수)은 건재를 이렇게 우러른다.
“건재는 사전 편찬의 제일인자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 근거는 건재는 한문의 대가였기 때문에 한자어를 풀이하는 데는 맞설 분이 없었고, 또 연희전문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였으므로 고창고보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따라서 웹스터 사전을 마음대로 읽어 낼 수 있었으며, 일본어에도 능하여 광사림(廣辭林)과 같은 일본말 사전은 물론, 한화자전(漢和字典)과 같은 일본 한자자전도 크게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민속, 예법, 역사, 지리, 천문학 등에도 많은 지식을 고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큰 사전의 풀이 하나하나를 보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밖에, 건재는 해방 후에 읽을거리가 없었던 과도기에 ‘한글 독본’을 만들어 읽기 교육에 이바지하신 것도 선생의 학문을 말해 주는 것이며, 그 후 계속하여 표준 중등 말본, 표준 옛글, 표준 문예 독본, 표준 고등 말본 등 교과서를 저술하였으니 이 모두가 선생의 학문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다고 김회장은 덧붙인다.
다음은 김승곤 회장의 ‘건재 정인승 선생의 생애와 학문’이란 글의 일부이다.
“끝으로 건재는 한글 운동가이면서 도덕군자였다. ‘한글 운동개략(1949)’, ‘가로쓰기 문제(1949)’, ‘해방 한글의 10년 (1955)’, ‘농촌계몽에 대한 나의 기대 (1956)’, ‘외국어 남용에 따른 우리말의 혼란(1973)’, ‘한글 운동과 이윤재 선생 (1973)’, ‘국어 운동 50년 (1977)’, ‘나의 국어 생활을 돌아봄(1983)’ 등 한글 운동에 관계되는 글을 많이 썼을 뿐 아니라 실제 강연 등을 통하여 한글 전용 운동에 크게 애쓰기도 했다. 언젠가 건국대학교 개교기념 특별 강연회에서 건재는 우리나라가 해방된 것은 첫째로 애국지사들이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한 때문이요, 두 번째로는 나라 안에서의 애국지사들이 투쟁한 때문이며, 세 번째로는 한글 학회에서 한글을 연구하여 이로써 무지했던 국민들을 일깨운 계몽 운동을 펼침으로써 국민들의 마음속에 애국심이 싹터서 해방 운동을 한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이나 연합군의 힘에 의하여 광복을 되찾았다는 말씀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만큼 선생은 애국자요, 한글의 힘이 얼마나 큰 가를 가르쳐 오신 위대한 한글 학자였다.
또 건재는 학자요 애국자이기 이전에, 현대 사회가 스승으로 모셔야 할 도덕 군자였다. 평소 남의 장점을 말하여 칭찬하시되, 단점은 절대로 말씀하지 않았고 특히 선생과 사이가 좋지 않은 분에 대하여는 절대로 말씀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남의 길흉사에는 빠지는 법이 없었고 집안과 당신에 관한 자랑이 될 만한 말씀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평소 도리에 벗어난 말씀은 하지 않았고 꼭 필요한 말씀만 하니 자연히 과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점잖게 살다 간 애국자요, 선각자이며 학자였던 선생의 일생은 길이 이 강산을 밝게 하여 주는 빛이 되리라 믿는다.”
건재의 사전 편찬에 바친 정성과 노력은 외솔이 『큰사전』 뒤에 발문형식으로 쓴 ‘큰사전의 완성을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거친 세파 속에서 이 편찬 사무에 관여한 사람들 가운데 천우의 건재(健在)로써 가장 오랫동안 중심적으로 각고면려하여 오늘의 성과를 이룬 이는 정인숭 님이요, 일제 때로부터 오늘까지 한결같이 일한 이는 권숭욱 님이요, 해방 후로부터 오늘까지 편찬에 힘쓴 이는 이강로 님이요, 주장 사전 사무를 맡아 본 이는 유제한 님이다.”
“위 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건재 선생은 한글 학회의 사전 편찬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20여 년 동안을 편찬 업무에만 힘쓴 분이다. 특히 사전 편찬실에서 벌어진 여러 가지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해방 직후에 다시 사전 편찬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제일 중요한 원고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각처로 수소문한 결과 이 원고가 불순분자로 낙인찍힌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증거물로 채택되어 함흥 검찰청에 압수되었었고, 일차 선고에 불복하여 서울 고등법원에 상고하자 이 원고는 다시 서울로 우송되는 도중에 해방이 되어 서울역의 운송회사의 지하 창고에 있었다. 해방 뒤에 이것을 가까스로 찾아서 다시 편찬 업무에 들어갔고, 이때에 건재 선생께서 다시 사전 편찬 위원장이 되었다. 그때에 건재 선생은 49세였다.”
해방 직후 편찬실에서 선생을 모시고 일한 때로부터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약 40년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일을 한 국어학자 이강로의 회고다.
“아무리 얽히고설킨 어려운 문제도 건재의 눈 거치면 해결돼”
“건재 선생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한문 서숙에서 한문을 배울 때, 15세 무렵에 서경(書經) 의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읽으셨는데, 한문 선생이 풀지 못하는 그 심원한 이론을 똑똑하게 풀어서 그의 고향에서 천재란 칭찬을 듣던 분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 1기 출신으로 영어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그 학교를 졸업하시고, 전라도에 있는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계시다가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업무를 맡게 되셨다. 그만큼 한문 영어 수학들에 능통하신 데다 천부적인 논리적 사고와 넘치는 재치로써 그 어려운 사전 편찬의 얽히고설킨 문제를 빈틈없이 풀어 나가셨다.” 이강로는 그렇게 건재를 기억했다.
그는 또 ‘건재 선생이 사전 편찬에 남긴 이야기’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큰사전은 1929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1957년 6권이 완성되기까지 무려 28년이란 긴 세월이 소요되었고, 건재 선생께서 1938년쯤부터 이 사업에 중심적으로 각고면려하였으니 20년이란 세월을 사전 편찬에 바친 셈이다. 이 시기에는 사전편찬에 관한 참고 자료는 거의 없었으니 모든 업무가 건재 선생의 판단을 바탕으로 한 창작에 가까웠다. 사전 편찬은 복잡한 가운데에서도 가장 복잡한 업무이다. 우선 사전에 수록할 수 있는 낱말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온 범위의 낱말을 모두 포함한다. 일상적인 어휘는 물론이요, 정치, 철학, 종교, 문화, 사회……등 인류의 생활에 나타나는 정보는 모두 포함하고 있다. 전문 분야에 있어서도 옹기 만드는 일에 관련된 어휘만도 수백 개의 어휘가 있고, 활[弓]에 관한 어휘만도 800여 개나 된다. 이런 것들 중에서 큰사전에 알맞은 것을 간추린다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고, 이렇게 수집된 어휘의 서로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는 작업, 다음으로 가려 뽑은 어휘에 대한 적절한 주석을 한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여러 문제를 즉석에서 분명하게 판단해야 할 위치에 있는 분이 건재 선생이었다. 이러한 일을 오래 해내는 동안에 건재 선생으로서는 이 방면에 하나의 주관이 뚜렷하게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어떠한 풀기 어려운 문제이건 건재 선생의 눈을 거치면 정확하게 해결되었다”며 “이런 점으로 볼 때 건재 선생은 우리나라 사전 편찬사(編纂史)의 길을 닦은 선구자요, 빛나는 업적을 남긴 거룩한 사전편찬 학자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또 “현재에는 사전 편찬의 이론서만도 수백 종이나 되고 세계적인 사전 편찬 협의 기구까지 설립되고 월간 전문지도 많이 출판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권위있다는 이론서<이 책의 원명은 R.R.K Hartmann(1983), Lexicography : principles and practice 이고, 일본에서 ‘歸書學’ その 原理と 實際 木原硏三 加藤知己 飜譯監修(三省堂 發行)으로 번역되었다.>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내용과 건재 선생이 직접 집필한 사전의 내용과를 비교하여 본 결과 많은 일치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서 “경험은 철학이라는 말이 과연 헛되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강로의 건재의 사전편찬에 대한 진단이자 평가다. “사전은 그 편찬 대상이 말[言語]이다. 그러므로 언어를 전공으로 하는 언어학자가 사전을 편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언어학자로서도 모든 전문 분야나 모든 지역에서 쓰고 있는 말을 모두 알 수는 없는 것이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말로 표현되는 모든 정보를 ‘사전’이라는 틀에 넣어 그 기술 방법을 체계화하여야 한다. 그런데 기술의 체계화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선 올림말의 기준을 세우고 이 기준말 밑에서 각 올림말의 형태적 의미적 관련성을 질서 있게 기록하고, 다시 이 기록된 어휘의 뜻(meaning)을 정확하게 풀이하여야 하는데, 이 중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다룰 수 없는 반면, 그 경계가 자로 그은 듯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사전 편찬은 박학(博學)하면서도 정세(精細)하여야 한다. 편찬 업무에서 해결을 시도하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풀기 어려운 마디에 걸리면 모두 건재 선생께 그 해결 방법을 물으면 해결의 실마리는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다. 아무리 얽히고설킨 어려운 문제라도 그의 눈만 거치면 막힘없이 해결된다. 이런 점을 비추어 볼 때 건재 선생은 사전 편찬에 알맞는 여러 특성을 골고루 갖추었고, 이 특성을 편찬 업무에 남김없이 반영시켰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사전 편찬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의 사전 편찬사를 엮을 때에는 건재 선생이 남기신 업적은 길이 빛을 드리울 것이고 또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말글살이 궁금증 풀어주고 길잡이 돼 겨레의 마음 붙잡아줘
이의도 교수(춘천교대 국어교육과)는 「건재 선생의 ‘의문·해설 한글 강화’」 라는 글에서 정인숭의 저서 가운데 하나인 ‘의문·해설 한글 강화’와 그 주변에 대하여 살피고 건재의 활동과 역할을 진단했다. 이교수는 “이 책은 건재 개인의 저서이기는 하지만, 한글 학회와 ‘한글’ 잡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면서 그 이름이 암시하고 있듯이, 이 책은 선생이 한글 학회의 정기 간행물인 ‘한글’에 마련된 ‘물음과 대답’ 난을 통하여, 우리말과 글에 관한, 대중들의 물음에 대하여 대답한 내용들을 엮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건재의 대답은 1937년 9월에 시작하여 26년 동안, 45회에 걸쳐 참참이 이루어져 왔는데, 왜정 때의 것이 26회이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은 대부분이 우리말과 글의 실제적인 사용과 관련된 것들인데, 특히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풀이의 전체적인 기조는 한글 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의 정신과 원칙과 내용에 두고 있다. 대중을 상대로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일반적인 내용이지만, 군데군데 선생의 독특한 견해가 드러나 있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은 길게는 80년 전으로부터, 짧게는 56년 전 것까지 있는데, 오늘날의 말글살이에 그대로 참고할 만한 내용도 적지 않다고 이교수는 풀이했다.
이교수는 “정인승 선생의 이 작업은 한글 학회에서 제정한 여러 가지 말글 규범들을 대중 속에 보급하여 정착시키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이 작업은 늘 대중과 호흡을 함께 하는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데에 특별한 의의가 있다”며 “특히, 우리 겨레가 왜정의 압제 밑에서 캄캄한 나날을 보내던 그 시절, 정인숭 선생은 잡지 ‘한글’을 매체로 하여 말글살이의 최일선에서 그들과 살을 맞대며, 우리 말글살이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 바람직한 길잡이를 제시함으로써, 겨레의 마음을 붙잡아 주었다. 그 길은 순탄하지 않았으니, 3년 동안의 옥고까지 감수해야 했다. 광복 뒤에도 줄곧, 선생은 우리 말글 규범과 관련된 일에서 늘 중심적인 구실을 담당하였다”고 설명했다.
이교수는 ‘한글 강화’의 내용들은 우리 겨레의 말글살이를 통일하고 향상시키는 데에 실질적인 밑거름이 되었으며, 건재 선생은 평생을 이 길에 바친 셈이라고 의미를 평가했다.
우리 주권도 없고 앞날이 캄캄하던 왜정 치하에서 한글 맞춤법을 제정하고, 외래어 표기법과 로마자 표기법을 제정하고, 표준어를 사정하고, 국어 사전의 모종을 심어 마침내 『큰사전』이라는 열매를 맺게 했던 한글학회와 건재 정인승 박사. 그 결과의 하나하나는 모두 우리 겨레의 말글살이의 중요한 규범으로 정착하거나 작용하게 되었다. 그런 만큼 이 모든 작업의 역사적 의의와 국가적 가치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다.
조상이 물려준 거룩한 보배, 나랏말 갈고 닦아 빛내야
건재는 분명 국난의 위기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애국자였으며, 나랏말을 갈고 닦기 위해 평생을 힘썼던 훌륭한 국어학자요, 한글 운동가였다. 또한 제자에게는 민족혼과 한글 사랑 정신 그리고 원칙을 중시하는 생활 태도를 일깨우려 한 위대한 교육자였고, 변혁의 혼란기에는 앞날을 내다보고 준비한 시대의 선각이요, 지사였다. 그러나 그것만이 선생의 모든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한 시대의 지조 있는 선비요 스숭이었다. 선생을 가까이서 모셨던 많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겨레의 영원한 스숭 정인숭 박사는 88세의 노령에도 국어학 서적을 뒤적이다가 병을 얻어 2년여의 투병 생활 끝에 1986년 7월 7일 오전 11시 40분 90세를 일기로 의롭고 거룩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라와 겨레와 국어를 지켜보며 잠들어 계신다.
‘조선말은 조선 사람에게 너무 가깝고 너무 친한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조선 사람에게서 가장 멀어지고 설어지게 되었다. 우리들이 항상 힘써 배우고 닦고 한 것은 다만 남의 말, 남의 글이요 제 말과 제 글은 아주 무시하고 천대해 왔다. 날마다 뒤적거리는 것은 다만 한문의 자전과 운서뿐이요 제 나라 말의 사전은 아예 필요조차 느끼지 아니하였다. 프랑스 사람이 와서는 프랑스 말로써 조선어 사전을 만들고 미국 영국 사람이 와서는 각각 영어로써 조선어 사전을 만들고 일본 사람이 와서는 일본말로써 조선어 사전을 만들었으나 이것은 다 자기네의 필요를 위하여 만든 것이요 우리의 소용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70여년 전에 나온 『큰사전』 머리말에 나와 있는 서술이다. 그런데 어째 오늘의 현실을 고스란히 꼬집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말은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조선 말은 우리 겨레가 반만년 역사적 생활에서 문화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결과이다. 그 낱낱의 말은 다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 준 거룩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곧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는 것’( 『큰사전』 머리말)이니만큼 우리말을 갈고 닦아 빛내며 한층 더 가깝게 다가설 일이다.
그것이 저 곳에 계신 건재의 소망이자 바람이려니. /이강록(사람과 언론 편집고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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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국어생활 제6권 제3호(’96년 가을)
김승곤(1996) 건재 정인승 선생의 생애와 학문, 「새국어생활」 6-3, 국립국어연구원
정인승,「국어운동 50년」, 『전북일보』 제1243호~1333호, 1977.6.14~9.29
정인승,「남기고 싶은 이야기-조선어학회사건」,『중앙일보』 제2223호~2247호,1972.
11.22.~12.20
조오현(1996) ‘나의 스숭 건재 정인숭 박사님’, 「새국어생활」 6-3, 국립국어연구원
정인승, ‘내 나이 여든 일곱에’, 건대학보 36. 1983년 10월
<한말연구> 제3호 1997,6 한말연구회
박지홍(1987) 풀이한 훈민정음, 서울, 과학사.
조오현(1995) “정인승” 주시경 학보 17집.
<신동아> 제53호, 1969.
◇ 정인승(鄭寅承, 1897∼1986) 연보
호 건재(健齋)
1897년 5월 19일에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29번지에서 출생.
1915년 진안군 용담 공립 보통학교에 들어가 1등으로 졸업.
1918년 상경하여 중동학교의 강습반 입학.
192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1926년 고창고보에서 교원으로 근무
1935년 고창고보가 일제에 의해 공립이 되자 사퇴.
1936년 한글 학자 최현배의 권유로 한징 선생과 함께 조선어학회에 가입.
1937년 조선어학회의 간사(출판부)를 역임.
1945년 미군정청 학무국 발행 <한글 첫걸음>이라는 초등학교용 교과서 편찬 위원.
1946년 문교부 학술용어 제정 위원.
1948년 조선어학회의 자매단체인 한글문화보급회의 부위원장.
1949년 한글전용촉진회 부위원장에 선임.
1952년 전북대학 교수 겸 총장 대리.
1952년에서 1961년까지 중앙대학 이리 분교 교수.
1961년 전북대학교 총장.
1962년 대한민국 정부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1964년에서 1971년까지 건국대학교 교수를 역임.
1966년 대한민국 학술원의 회원.
1986년 7월 7일에 서거
저서 : <한글독본>(1946), <표준 중등말본>(1949), <표준 옛글>(1955), <표준 고등말본>(1956), <의문 해설 한글 강좌>(1960), <표준 문법>(1968) 등.
출처: 국가보훈처 /<사람과 언론> 제6호(2019 가을).
/이강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