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다시 보는 한창기 선생

한창기 선생
한창기 선생

시절이 궁박하고 이런저런 갈등과 분란으로 사회 곳곳이 꽉 막힌 듯이 답답하다. 이럴 때에는 새삼스럽게 앞서 살았던 눈 밝은 현인들의 안목이나 발자취가 그리워진다. 하여 우리는 회한과 아쉬움으로, 또는 아련한 향수로 이 땅에서 떠나간 가슴 너른 ‘어른’을 기억의 공간에서 불러낸다. 그런 어른들의 슬기와 열린 생각을 곱씹고 되뇌어 본받고 싶어진다. 일종의 오마주다. 그 가운데 손꼽히는 첫 손가락이 고(故) 한창기 선생(1936~1997)이다. <창비>에서 출간한 책 《특집! 한창기》를 중심으로 정리해본다. <편집자>

“꿈꿔온 일을 위해서라면 돈을 낙엽처럼 태울 줄 알아야 한다”

초기 경영난에 처한 회사를 걱정하면서 어찌할 것인가를 묻는 친구에게 한사장이 대뜸 토해낸 대꾸였다고 '고도원의 아침편지' 발행인 고도원씨는 술회했다, 그만큼 돈에 초연할 줄 알았던 것이리라. 그는 이런 신조에 따라 전통미 물씬한 작품들을 수집했다. 탁월한 심미안으로 이름 높던 그였다.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어루만지던 백자가 병실 침대 밑에서 발견됐을 정도로 그는 전통 문화를 사랑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지금은 전설처럼 여겨지는 잡지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의 발행인이자 편집자였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 창립자이자 경영인으로 우리 현대문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한창기는 우리문화의 뿌리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창의적 안목으로 우리문화의 전승에 몰두했기에 지구화 시대에 기대되는 세계인이었다. 무지막지한 권력 앞에 명품 잡지 뿌리깊은나무를 졸지에 잃고도 고분고분 물러서지 않은 고집쟁이 ‘앵보’였다.

판소리를 위시한 국악판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선 활짝 열린 비가비였으며 문화경영에서는 댄디보이였다. 그런 그는 예순 한 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오래건만 늘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것은 그리움과 아쉬움 때문이다.

그는 권위주의적 언어를 멀리하고 민중의 언어를 소중하게 가꿨다.

“1978년에 선생은 이런 주장을 했다. “…그러니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도 ‘각하’라는 용어를 버림직하다. 그리고 ‘님’소리 공부도 좀 해보아야 한다. ‘님’은 저 아래에 있는 ‘계장님’이나 ‘면장님’에게만 붙는 말이 아니라 우리에게 목숨을 준 ‘아버님’과 ‘어머님’에게도 붙고, 인류를 건진 ‘예수님’과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나라의 어른인 ‘임금님’과 온 누리의 임자이신 ‘하느님’에게도 붙는 가장 높은 존경을 나타내는 접미사다. 이처럼 거룩한 표현이 대법원장‘님’과 국회의장‘님’과 장관‘님’에게서 뚝 그치지 말고 이 나라의 대통령‘님’(과 천주교의 대주교‘님’과 추기경‘님’)의 경우에도 그 딱딱한 ‘각하’ 대신에 쓰였으면 좋겠다.(‘스님과 따님과 각하’, 뿌리깊은나무, 1978)

권위주의적 언어 멀리하고 민중의 언어 소중히 가꾸고 전파

요즘은 ‘대통령 각하’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없다. ‘대통령님’이라고 하거나 그냥 ‘대통령’이라고만 한다. 그만큼 대통령의 위치가 우리 머리 위에서 우리의 어깨 옆으로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각하’로 상징되는 언어적 권위주의를 해체하는데 선생께서 선구적 혜안을 우리에게 보여준 사례의 하나로 볼 수 있다. ” 남영신 국어문화운동본부 대표의 주장이다.

이처럼 우리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남달랐다. 이상영씨(뿌리깊은나무 기자)는 “그이도 무척 좋아라하며 ‘이마적(‘이제에 가까운 얼마동안의 지난날’)’을 곧잘 썼다. 참한 토박이발을 찾아내곤 왜 그리도 좋아하는지, 연신 싱글벙글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며 “‘이제 조선톱에도 녹이 슬었네’ 가 나온 그 이듬해에 문화재위원회가 그 책만 가지고 심사하여 논의하여 배희한 노인을 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기능보유자로 지정했을 땐, 마치 자신이 광영을 누리는 듯이, 얼마나 좋아하던지 새삼 그이가 그리워진다”고 돌이켰다.

“글을 써내면 여러 기자들과 함께 꼭 독회를 해서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히 짚곤 했다”며 “한글에 대한 그의 사랑, 자랑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고 소설가 윤후명(한국의 발견 필자)은 말했다. 다음은 이성남(뿌리깊은나무 기자)씨의 회고다.

대충 넘어가는 내 버릇은 ‘한국의 발견’ 전라남도 편을 만들 때도 여전했다. 이백자 원고지로 육십장이 넘는 한 기사 안에서 ‘짚고 넘어가자’를 여러차례 사용했던 것인데, 그 때문에 한 사장님으로부터 혼쭐이 났다.

취재한 자료를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기에도 벅찼던 엉성한 내 글솜씨는 문장 하나, 단어 하나도 허투루 넘겨버리지 않는 사장님의 치밀한 눈에 딱 걸려들기 일쑤였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를 여기서 ‘짚고 넘어가겠다.’

‘짚고 넘어가겠다’는 그때 뿌리깊은나무 기자들이 가장 자주 쓰는 어휘 중의 하나였다. 원고 분량 채우기에 급급했던 나 역시 ‘짚고 넘어가겠다’를 남발했는데 처음에는 ‘살펴보겠다’ 따위의 다른 말로 고쳐주시던 한 사장님께서는 그 다음번에는 말로 타이르셨고, 그래도 안 고쳐진 내 버릇에 결국은 분노를 폭발하셨다. “짚고 넘어가자가 무슨 뜻인 줄 아느냐?”고 버럭 고함치시더니 급기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구부리시고 양탄자 바닥에 손바닥을 직고 기는 자세를 취하시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날 혼쭐나던 광경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부족한 건 채워주시거나 알아서 고쳐주시겠지.”하는 안일한 마음이 찬물을 뒤집어쓴 순간이었다.

이 땅에 ‘뿌리깊은나무체’ 유행어 낳게 한 인물

백대웅(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교수의 말은 한사장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사장은 나의 글쓰기 선생이기도 했다. 내가 쓴 음악에 관한 원고들을 한사징이 읽고 빨갛게 고쳐주곤 했다. 그 고쳐진 원고를 받아보면 글쓰는 공부가 많이 되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대를 나왔지만, 줄리어스 씨저의 ‘갈리아 정복기’가 유명하듯, 우리말의 문법체계에 통달해서 그것을 직원들에게 교육시켰고, 이 땅에 ‘뿌리깊은나무체’라는 유행어를 낳게도 했다.

그는 말의 운율이 음악과 같다는 문제로 나와 긴 시간에 걸쳐 음보에 관한 토론도 했다. 이를테면 “개가 짖는다.”할 때나 “검정개가 짖는다.”할 때나 걸리는 시간은 같다는 것이었다. 하여튼 그는 우리말의 문법뿐만 아니라 명품을 알아보는 진정한 멋쟁이였고, 장한평 골목을 뒤지는 골동품 수집가이기도 했다.“

뿌리깊은나무 기자였던 강창민 시인(서경대 교수)은 한창기 사장을 생각이 열린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강시인의 생각은 이랬다.

“어떤 한 분야에 통달한 사람을 전문가라고 한다. 학습이나 숙련으로 다른 사람보다 지식이나 경험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이 열린 사람’은 전문가와 다르다. 지식이나 경험만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 사물의 근본 구조나 본질에 대한 지혜를 갖춘 사람을 뜻한다. 물론 도덕이나 윤리의 기준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식이나 경험이 많은 사람은 쉽게 만날 수 있어도 ‘생각이 열린 사람’은 쉽게 만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흔히 깊은 사원에 은둔해 있거나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그 열린 생각으로 사라져가는 문화의 흔적을 되살리고 그 소중함을 일깨우려고 했다.”

김명곤 전 문화부 장관(뿌리깊은나무 기자) 은 “장관 재직시절 내가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장관직을 떠난 지금도 평생 동안 추진하고 싶은 ‘민족문화 원형발굴사업’이나 ‘6한’ 곧 ‘한글, 한지, 한식, 한복, 한옥, 한국음악’의 세계화사업은 한창기 사장으로부터 영감을 얻은바 크다”며 “좀더 살아계셨더라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 놀라운 식견으로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으셨을 텐데 이승에 안 계시니 아쉽고 그립다”고 애통해 했다.

한창기의 유언 집행인이었던 박원순 서울시장(변호사)은 한사장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백년을 사는 사람이 드물다. 그렇게 이 땅에 태어났다가 누구나 이 땅을 떠난다. 이별은 정해진 이치다. 한 시대를 같이 살다가 더러는 자신보다 앞서 떠나보내기도 한다. 한 시대를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인연인가. 그러나 하루에도 여럿의 부고를 받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모두를 안타깝게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한창기란 사람은

미국의 전 부통령 험프리가 '이제까지 만나본 동양 사람 중에서 가장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꼽기도' 했던 이였고(천재석), 직원들을 불러모아놓고 반 시간에 걸쳐서 "'사람다운'이 라는 표현은 있는데 왜 '사람스런'이라는 표현은 없는가에 대한 강의로 열을 올리던 사람이었지만(안정효), 그런 강력하고도 전방위적인 한글 사랑의 노력으로 우리 문화계가 한자와 왜색 잔재를 청산하고 한글에 기반한 인프라를 수용하게 되었고 덕분에 우리는 정보화의 큰 시대적 흐름에 좌초하지 않고 인터넷산업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이만재)는 평가를 받는다.

호텔 변기에 빠진 손톱깎기를 오물 탱크를 뒤져 찾아낼 만큼 집요하고(이연상: ), 마침표 위치가 정상에서 0.2밀리미터 떨어졌다고 노발대발하던 좀팽이였으나 호연지기가 나라 다 망친다고 주장하던 '위대한 좀팽이'였고(강운구), 판사나 변호사는 엘리뜨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서울법대를 나오고도 남들이 다 보는 고시에는 관심이 없었다(박오규).

그가 한국 잡지사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은 필자와의 마찰을 감수하면서도 이른바 편집권을 제대로 실천한 일이고(손세일), 뿌리깊은나무라는 이름은 그 후 우리말 잡지 이름들을 짓게 만든 자극제가 됐다(유재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줏대 있는 열린 한국 사람

한창기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줏대있는 열린 한국 사람'(이명현)이었고, '세계화가 지방화, 민족화와 상대 개념이 아님을 명확히 인식했던 가장 앞선 세계인'이었다.

눈썰미로 말하자면, 그는 그림 안 그리는 화가나 마찬가지였고(송영방),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연이든 한번 보면 그 조형적 특징을 핀셋처럼 집어내는 눈을 지닌 사람이었다(설호정).

그가 생전에 인정한 유일한 디자이너 이상철을 통해 보여준 뿌리깊은나무의 디자인은 이른바 '눈에 띄지 않는 디자인'을 실현한 뛰어난 사례였고(김신), 그것은 "나를 지배하는 감각적, 시각적 기준이란 것이 분명 있는데 그게 바로 '뿌리깊은나무 스타일'이고... 한창기 사장님의 스타일이었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이영미),

한창기는 법학을 전공하고도 법조계에 뜻을 두지 않고, 현대적 세일즈 기법을 도입해 서적 판매인으로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며 자신의 사회적 이력을 시작한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출판-언론인으로서 한국어와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착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개발논리에 치우쳐 제 것을 소홀히 여기던 시대에, 빠르게 사라져가는 옛것들을 되살리고 보존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을 쏟았다. 그가 이끈 뿌리깊은나무를 통한 다양한 문화사업은 많은 부분이 그러한 열정으로 채워졌다. 이로써 우리나라 각 지방의 토박이 언어를 민중의 삶과 함께 책으로 남겼고, 판소리와 민요를 음반과 책으로 집대성했다. 차 마시는 풍속과 더불어 전통 생활문화를 새롭게 되살리는 일도 그가 심혈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일명 '한창기 컬렉션'으로 불리는 토기, 도자기, 그림, 석물(石物) 수천 점은 전남 순천시 낙안면의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한창기가 생전에 한 일들은 시류를 거스르는 무모하고 외로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들은 모르는 사이 척박한 한국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 남다른 미의식과 우리 문화에 대한 애착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의 생애를 되새기는 일은 매우 뜻깊다. 오늘의 우리 삶을 성찰하게 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문화적 실험정신을 새삼 일깨우기 때문이다.

이런 반추와 성찰을 가능케 해준 한창기선생이시여! 부디 번민 많은 이 땅의 이녁들에게 속 깊은 슬기를 깨닫게 해주기시를… 

/이강록. <사람과 언론> 제2호(201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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