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단재 신채호
단재 신채호

“민족 생존 위해 강도 일본 혁명적 폭력으로 쫓아내야”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에 격분,‘완전독립’과 ‘자주독립’을 주장

김부식, 신라 중심사로 『삼국사기』를 편술한 것 통탄

선견지명과 통찰력 갖춘 독립운동가의 가르침 배워야

한 국가의 역사는 어떤 가치를 지니며 무슨 교훈을 주는가. 지난날 민족을 버리면 역사는 성립될 수 없었다. 역으로 역사를 버리는 민족은 국가에 대해 책임을 질 수가 없었다. 그러니 역사가의 책임이 막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같은 사명감으로 온몸을 불살랐던 선각자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다.

단재는 ‘당대 조선에서 유일한 사가’라고 불릴 만큼 인정받았던 사학자이자 동시에 열혈 독립운동가였다. 더불어 그는 불꽃처럼 타올랐던 혁명가이자 민족 언론인이었고 한문학의 고봉이었다. 또 가정교육과 여성계몽에도 앞장선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다.

단재는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혁명을 주도하여 항일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폭력적 항일운동과 무정부주의 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다. 비록 자신의 온몸을 던진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 타도와 조국 해방을 이루지 못하고 쓸쓸하게 눈을 감았지만 57년의 일생을 당당하고 의롭게 살았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았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모든 고통을 감내하면서 오로지 민족적 양심에 따라 원칙을 지켰다.

단재는 세계 어느 혁명가에 못지않은 우리의 혁명가다. 그것도 앎과 실천을 일치시키려 한 지식인 혁명가였다. 단재는 우리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사관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그가 국사의 연구와 교육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연구와 교육’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민족의 자강과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대사관에 빠진 미련퉁이들이 외국의 사조에 도취돼 이성이 몽롱해질 때마다 단재의 쩌렁쩌렁한 일갈이 아둔한 양심을 후려친다면 좋으련만.

붓을 칼처럼 휘두른 꼿꼿한 선비였던 단재의 가르침은 1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에도 생생하고 유효하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격화되고 있는 일본의 정치·외교·군사적 도발과 책동을 예의주시한다면 더더욱 단재의 선견지명과 통찰력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마침 올해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되는 해이다. 가치혼란과 혼돈의 시대, 조국 독립을 위해 필생을 던지며 “민족 생존을 위해 강도 일본을 쫓아내자”고 부르짖은 단재 선생에게서 선명한 가르침을 배우고 시대정신을 초롱초롱하게 가다듬어 볼 일이다. 

고집불통이지만 선견지명 뚜렷해 사리에 능통

단재는 세수할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아서 온통 옷을 버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누가 그 이유를 물으니 “나는 평생에 머리 숙이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꼿꼿한 기개를 대신하는 말이라 새긴다.

단재가 중국으로 가는 망명길 도중에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오산학교에 들렀다. 마침 오산학교에는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교편을 잡고 있었다. 춘원은 이때 단재를 처음 만났는데, 단재를 보고 느낀 소감을 훗날 글로 썼다. 춘원이 쓴 이 인상기(印象記)에 단재의 세수법이 나온다.

“단재는 세수할 때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빳빳이 든 채로 두 손으로 물을 찍어다가 바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는 마룻바닥과 자기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를 온통 물투성이를 만들었다. 우리는 단재 세수하는 것을 큰 구경거리로 여겼다. 한번은 단재가 세수하는 것을 보고 시당(時堂·여준(呂準)의 호)이 “에익 으응, 그게 무슨 세수하는 법이람. 고개를 좀 숙이면 방바닥과 옷을 안 적시지”하고 쯧쯧 혀를 차는 것을 보고도 단재는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하고 두 손으로 물을 찍어다가 낯에 발라서 두 소매 속으로 물이 질질 흘러들어갔다. “그러면 어때요?”하고 단재는 오산에 있는 동안에는 그 세수하는 법을 고치지 않았다.”

단재라는 호는 고려 말 충신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일편단심’에서 따왔다. 머리를 숙이지 않는 소신은 그 ‘단심’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베이징(北京)시대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단재를 만나보고 적지 않은 회상기를 남겼다. 그 중 원세훈(元世勳)은 이렇게 말했다.

“‘단재는 고집불통이지만 일에 대한 선견지명은 확유(確有)하다’는 말을 들었다. 단재는 참으로 선견의 명(明)이 유(有)한 까닭에 그 주장을 고집하였을지언정 사리에는 능통(能通)이었다. 불통(不通)이라면 단재의 고집을 이해치 못하고 임시적 변통에 능한 체하면서 원대한 우려가 무(無)하였던 분들이 도리어 불통일 것이다.”

“민족주의로 모든 국민의 꿈을 일깨우는 ‘신(新)역사’를 써야”

단재 신채호 생가
단재 신채호 생가

1910년 안창호 등과 해외 망명길에 올라 1936년 뤼순의 차디찬 감옥에서 삶을 거둘 때까지, 단재는 오로지 일제 타도와 조국 해방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서릿발 같은 자세로 글을 쓰고 행동하며 일제와는 터럭만큼도 타협하지 않았던 불굴의 애국지사였다.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 발표에 관여했고 그 사건으로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로 활동하기도 했다.

‘시일야방성대곡’ 보도 한 달여 뒤 12월 28일자 단재의 사설 ‘오늘 다시 목 놓아 통곡한다(是日也又放聲大哭)’는 이천만 동포의 울분과 비통함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말하자면 투옥된 장지연(張志淵)의 후속편 글을 위암(韋庵)의 후배 단재가 유감없이 써내려 갔던 것. 이로써 단재의 본격적인 언론인시대가 개막됐다.

“단재는 무정부주의자이기는 해도 단재의 사상을 기왕의 어떤 틀에 맞추려하지 말고 단재 나름으로 생각해야 단재를 이해할 수 있다.……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속에서 단재를 찾다가 보면 단재를 찾을 수 없는, 단재 나름의 길이 있었다.”(조동걸, ‘단재 신채호의 삶과 유훈’, 「한국사학사학보」3)

이같은 주장처럼 단재는 이념성향뿐 아니라 연구와 활동, 전문성에 있어서도 당시 한국의 선각자로서 할 수 있는, 해야 할 거의 모든 일을 빠뜨리지 않고 수행했다.

그 가운데 한 줄기가 민족사 연구였다. 민족사 연구는 대한매일신보 재직 시절에 시작해 해외 망명 초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지면서 불후의 업적으로 남게 된다.

역사학계에서는 단재의 사학을 ‘근대 민족사학의 원조’로 인식한다. 단재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국민의 애국심을 계발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로 모든 국민의 꿈을 일깨우는 ‘신(新)역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잘못 쓰인 역사를 새로 짓는 자세로 쓴 것이 「독사신론(讀史新論)」 이다.

흔히 단재를 독립운동가, 민족사가, 언론인, 문학가, 혁명가, 아나키스트 등으로 일컫는다. 그만큼 어느 한 부문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전문적인 업적을 쌓았고 훌륭한 행적을 남겼기 때문에 따르는 칭호들이다. 망국의 시대에 모든 것을 바쳐 싸운 단재의 이름 앞 수많은 지칭가운데 세계 어느 혁명가 못잖은 혁명가라는 말이 제일 잘 어울리는 듯하다.

북한에서도 단재에 대한 평가와 존경심이 대단해 평양 인민대학습당에는 단재가 뤼순(旅順)감옥에서 쓴 글의 적잖은 유고가 있다고 한다. 남북이 다시 왕래하게 되면 함께 단재의 정신을 연구하고 토론할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의열단과 손잡고 「조선혁명선언」 집필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구축할지며, 강도 일본을 구축하자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구축할 방법이 없는 바이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 선언문에서 단재는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토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며 온갖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敵)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항일선언문 가운데 단재가 1923년에 쓴 「조선혁명선언」은 가장 위대한 조선독립선언문이라고 평가된다. 단재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으로 상해에 가서 선언문을 집필했다. 그러나 의열단선언문인데도 굳이 「조선혁명선언」이라 한 것은 의열단의 활동을 넘어서 민족주의 혁명을 선언한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선언문답게 철저하게 의혈혁명론을 주창한다. 양병 십만이 폭탄투척 하나만 못하고 억천 장의 신문잡지가 한 번의 혁명적 폭동만 못하다는 주장이었다. 「조선혁명선언」은 항일운동기의 모든 독립운동가들과 한국의 전 민족 구성원들에게 독립에 대한 확신과 목표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제시해준 ‘민족해방전쟁의 선전포고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선언문에서 단재는 “3․·1운동 이후에도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 민원식 등 12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광론(狂論)을 부름이니 이에 부화하는 자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적이 아니냐?”면서 대일 유화론자들을 매섭게 질타했다. 일찍이 신라의 최치원이 반란군 두목 황소(黃巢)를 질책하는 글을 써서 말에서 거꾸러뜨리고, 구한말 매천 황현이 친일매국노들을 규탄하여 반역도배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는 사필(史筆)의 맥을 잇는 글이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는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일제 강점기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이 성취한 가장 귀중한불멸의 문헌의 하나이며, 독립선언문들 중에서도 정상에 서 있는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신용하,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논고」)

“역사는 뒷날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최남선의 「3․·1독립선언서」, 한용운의 「조선독립 이유의 서(書)」와 함께 대표적인 독립선언서의 하나로 간주했고, 오히려 이들 선언문을 훨씬 능가할 만큼 민족독립을 위한 폭력적인 투쟁이념을 가장 선명하면서도 극적으로 밝힌 선언적 압권임을 스스로 증명했던 것이다.”(최홍규, ‘단재 신채호’)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초개(草芥)로 보아, 을사 이후 13도의 의병 나던 각 지방에서 일본군대의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즉 최근 3·1운동 이후 수원·선천 등의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서간도·노령·연해주 각처까지 도처에 거민을 도륙한다, 촌락을 불지른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욕보인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일신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로 내어 죽인다, 아동을 악형한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도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조선 안에 강도 일본이 제조한 혁명 원인이 산같이 쌓였다. 언제든지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개시되어 “독립을 못하면 살지 않으리라”, “일본을 쫓아내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구호를 가지고 계속 전진하면 목적을 관철하고야 말지니, 이는 경찰의 칼이나 군대의 총이나 간활한 정치가의 수단으로도 막지 못하리라.

혁명의 기록은 자연히 처절하고 씩씩한 기록이 되리라. 그러나 물러서면 그 후면에는 어두운 함정이요, 나아가면 그 전면에는 광명한 활기이니, 우리 조선민족은 그 처절하고 씩씩한 기록을 그리면서 나아갈 뿐이니라.

이제 폭력-암살·파괴·폭동-의 목적물을 열거하건대,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탐꾼·매국적 4. 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지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지연시키고 중상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써 마주 할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 강도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로 쫓아낼지니라.”(「조선혁명선언」 일부)

“어떤 주의(主義)도 조선의 주의가 돼야지, 어떤 주의의 조선이 돼서는 안된다”

출처 : 『단재 신채호 평전』(김삼웅)

1925년1월2일 동아일보 칼럼 ‘낭객(浪客)의 신년만필(漫筆)’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여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이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외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아(我)’의 주체성을 상실한데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다. 외래 사상의 맹종이 노예사상이라는 질책이다.

바로 단재가 일제 식민국으로 전락한 우리민족 역사관의 해이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북경에서 기고한 글이다. 단재는 “어떠한 주의(主義)도 조선의 주의가 되어야지 어떤 주의의 조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곧 우리의 줏대와 정신을 곧추 세워야 한다는 매서운 지적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대한협회회보 1908.6.25. 논설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중)

단재는 이처럼 역사를 알아야 나라를 사랑하게 된다고 역설했다.

1910년에 맨몸으로 조국을 떠난 단재는 남북 만주, 북중국, 시베리아를 주유하면서 조선의 역사를 연구했다. 단재는 수많은 유적지들을 직접 돌아다니고 무수한 사료들을 접하면서 우리 고대사(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음을 확인하며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라고 통탄했다.

단재는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도 조선사를 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많이 없어져버렸다고 비판하며 “집안(集安)현(고구려 유적지)을 한번 본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민족의 고대사를 바로잡고자 했던 단재는 중국망명 시절, 너무도 빈곤해 우리 역사의 유적지를 눈앞에 두고도 돈이 없어 발굴조사를 하지 못함을 비통해 했다. 또 책 살 돈이 없어 하루 종일 서점에서 책을 읽었는데, 조선에 관한 내용이 있으면 주인의 핀잔을 맞으면서도 요긴한 구절은 베껴 썼다. 그런데 독서력이 뛰어나 책장을 헤아리는 것 같이 훌훌 넘기면서도 책 내용을 암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단재는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신문에 소개했는데, 수십만 독자들로부터 절대적인 환영과 지지를 받았고 ‘조선 역사의 대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동학혁명은 소년 단재에게 반일의식, 봉건주의 타파 일깨워준 계기

적과 타협 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단재는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희망의 정신사(精神史), 그 지평은 역사로 해서 열릴 수 있음을 신앙한 단재였다. 그렇기에 “아아, 어떻게 하면 우리 2천만의 핏방울, 땀방울마저 항상 나라를 위하여 뜨겁게 흘리게 할까? 이르기를 오직 역사로써 할지니라”하고 역사의 비상한 힘을 강조했다.

어떻게 하면 역사의 뿌리를 제대로 찾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나라를 제대로 일으켜 세울 것인가? 신채호의 머릿속은 이런 생각들로 꽉 차 있었다. 의식주 따위는 차라리 문제 밖이었다.

어떤 때는 한 발에는 양말, 다른 발에는 버선을 닥치는 대로 신고 있을 만큼 일상생활과 담을 쌓다시피 한 단재였다.

애국을 앓으며 우국을 신음하기에 경황이 없는 그였다. 언론으로, 사론(史論)으로 구국의 지름길을 찾기에 혼령마저 불태우는 단재에게 빈틈없는 일상생활이란 한갓 거추장스런 절차일 뿐이었는지 모른다. 나절로 너절로도 아닌 오직 ‘단재절로’였을 만큼 몰입했다.

단재 신채호 옥중 사진, 출처 : 『단재 신채호 평전』(김삼웅)
단재 신채호 옥중 사진, 출처 : 『단재 신채호 평전』(김삼웅)

단재가 열네 살 때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전통적인 봉건사회가 외세의 침략과 내분으로 서서히 붕괴되어 가면서 민생은 더욱 어려워져 갔고 나라의 운명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동학혁명은 소년 단재에게 반일의식과 부패한 봉건주의 타파에 대한 인식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단재의 업적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것이 1924년에 <조선사>의 총론을 집필한 일이다. 이 총론에서 그는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는 자신의 역사관을 이론화하는 사론을 발표했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생하여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생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신채호, 「조선상고사 총론」)

어느 곳에 있든 ‘희랍인은 희랍인이 될 따름이다’

단재가 대한매일신보에 쓴 논설 가운데 주목되는 글을 보자. ‘일본의 큰 충노(忠奴) 세 사람’이다. 여기서 충노, 즉 충성스런 노예 세 사람은 친일 매국노 송병준, 조중응, 신기선을 가리킨다. 신기선은 단재에게 자신의 서재를 개방하여 책을 읽게 하고 성균관에 천거해준 바 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단재는 사적인 은혜와 공적인 죄상을 분명히 가름했다. 신기선은 당시 친일행위를 일삼아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던 자다.

“…한국에 일본의 큰 충노가 세 사람이 있는 것은 내가 부득불 통곡치 아니할 수 없으며, 부득불 방성대곡치 아니할 수 없으며, 부득불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치 아니할 수 없으며, 부득불 하느님을 부르며 땅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지 아니치 못 할지로다.

저 세 사람의 일본의 대충노가 저의 일신만 노예되고 말진대 내가 마땅히 묻지 아니 할지며, 저의 일신만 노예되고 말진대 내가 마땅히 슬퍼하지 아니할지나 귀가 막히고 참혹하도다. 저희들로 인하야 무고 양민들이 모두 노예의 굴속으로 몰려 들어가니, 귀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믿지 아니하는가, 내 말을 좀 살펴 들을지어다.

제일 충노 송병준은 일진회를 조직하야 5조약 시에 선언서로 일등공신이 되고, 그 수하 정병 40만 명으로 일본에 아첨하여 자위단 토벌대로 전국을 소요케 하며, 제2 충노 조중응은 동아 개진교육회의 두령이 되어 80만 명 보부상을 회집하여 이등(伊 藤) 씨와 증미(曾彌) 씨의 호령을 등대하여, 제3 충노 신기선은 이등 씨의 돈 1만 환으로 대동학회를 확장하여 유교를 부리한다 위명하고, 포고문 일장으로 국내 유림을 위협하여 일본 권력 내에 복종케 하고자 하니, ……… 연즉 부지불각중에 전국 2천만 인종에 저 일본 2대 충노배의 소원과 같이 점점 일본인의 매와 일본인의 사냥개와 일본인의 소와 말이 되기가 쉬우리니, 슬프다. 박제상은 이미 멀고, 김시민은 이미 없으매, 침침한 그믐밤에 여호와 삵이 분분히 횡행하는도다.

혁혁한 단군 기자의 자손으로 신무천황(神武天皇)을 존중하며, 당당한 임진년에 끼친 백성으로 풍신수길이를 흠앙하며, 융희(隆熙) 조정의 신자로서 명치(明治)만세를 호칭하며, 독립 산하의 종자로서 보호정책에 굴복하여 한국 곡식을 파종하고도 일본의 우로를 바라며, 한국 토지를 밟고도 일본의 일월을 숭배하니, 이 무리가 날로 성하면 장래에 면목이 변치 아니한 한국 사람을 어느 곳에 서 얻어 볼까.

인심이 있는 한국인이여, 저 무리의 속임수 가운데 빠지지 말지어다.

지금 나라가 빌고 위태하나 인심만 변치 아니하고 보면 가히 편안할지며, 지금 나라가 비록 망하였을지라도 인심만 변치 아니하고 보면 가히 흥할지니라.

희랍(그리스)이 필경 독립함은 희랍인의 말에 가로되,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희랍인은 희랍인이 될 따름이다”한 까닭이라.”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단재는 ‘조선상고사’의 대작을 집필하면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다.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 그 외에는 비아라 했다. 단재의 이와 같은 역사관은 이미 1900년대 초에 쓴 ‘대아(大我)와 소아(小我)’에서 비롯된다.

“…내가 국가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 눈물을 흘리는 나의 눈만 내가 아니라, 천하에 유심한 눈물을 뿌리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내가 사회를 위하여 피를 토하면 피를 토하는 나의 창자만 내가 아니라 천하에 값있는 피를 흘리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내가 뼈에 사모치는 극통지원의 원수가 있으면 천하에 칼을 들고 일어서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내가 마음에 새겨 이지지 못할 부끄러움이 있으면 천하에 총을 메고 도모하는 자 모두 이 나이며, 내가 싸움의 공을 사랑하면 천백 년 전에 나라를 열고 땅을 개척하던…(중략)

슬프다. 온 세상에 어찌하여 자기의 참면목을 알지 못하고 혹 구복을 나라 하여 진진한 고향으로 이것만 채우고자 하며, 혹 피육을 나라하여 찬찬한 의복으로 이것만 장찬코자 하며, 혹 성명을 내라 하고 혹 문호를 나라 하여, 부끄럽고 욕이 오른지 자유치 못함을 당하든지 이것만 보존하고 이것만 유지코자 하다가 조상에게는 패류의 자손이 되고 국가의 죄인도 되며 동포의 좀과 도적도 되고 인류의 마귀도 되나니, 오호라. 자기의 참 면목이 나타나는 날이며 어찌 설워 울고 이를 갈지 아니하리오.

올지어다. 올지어다. 내가 이 한 붓을 들고 천당의 문을 열고 분분이 길을 잃은 자들을 부르노니, 올지어다. 올지어다. 나의 이르는 바 천당은 종교가의 미혹하는 별세계의 천당이 아니라, 나의 참면목을 깨닫는 것이 곧 이것이라. (중략)

반드시 죽는 나를 보면 마침내 반드시 죽을 것이요, 죽지 아니하는 나를 보면 반드시 죽지 아니리라.

비록 그러나 나의 이 의논이 어찌 철학의 공상을 의지하여 세상을 피하는 뜻을 고동함이리요. 다만 우리 중생을 불러서 본래 면목을 깨달으며, 살고 죽는 데 관계를 살피고 쾌활한 세계에 앞으로 나아가다가 저 작은 내가 칼에 죽거든 이 큰 나는 그 앞에서 하례하여 나의 영원히 있음을 축하하기 위함이로다.”

순국문 여성지 발행 등 여성 계몽운동에도 힘써

단재는 대한매일신보를 무대로 많은 논설을 쓰는 한편 여러 분야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 단재는 1906년 안창호, 전덕기, 양기탁, 노백린 등과 독립운동단체 신민회를 창립할 때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또 신민회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의 「창립취지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추진되자 단재는 대한매일신보에 여러차례 국채보상운동 관련 논설을 쓰고 스스로도 성금을 냈다.

한편 단재는 1908년부터 1월부터 휴간중이던 순국문 잡지 「가정잡지(家庭雜誌)」를 속간하여 여성들의 계몽운동에 힘썼다. 한문폐지론을 주장했던 단재가 순국문 잡지의 편집과 발행의 책임을 맡은 것은, 그만큼 단재의 진보 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시점에 여성지를 발행하고 여성계몽에 앞장 선 것은 단재만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당시 개신유학자나 자강유학자 중에서도 단재와 같이 직접 여성잡지를 발행하면서 여성 권익 옹호에 나선 이는 거의 없었다. 단지 장지연이 「여성독본」을 집필했을 뿐이다. 단재는 밤을 새워 글을 쓰고 낮을 통틀어 애국계몽운동을 했지만 가정이나 자신을 가꾸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무렵 단재는 활동 영역이 광범위하고 다양했다. 계몽운동단체 대한협회에도 참여하고 여기서 발행하는 「대한협회월보」에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 등의 논설을 발표하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학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이용직, 지석영, 이상재 등이 모여 만든 애국계몽단체 기호흥학회 활동에 논설을 발표하는 등 활약했다.

단재는 만년에 아나키스트운동가로 활약했다. 1926년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1928년 4월에는 직접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의 결과에 따라 타이완(臺灣)에서 외국 위체(爲替)를 위조하는 등 독립자금 염출에 나섰다가 체포돼 뤼순감옥에 복역중 출옥을 1년 8개월 앞두고 1936년 2월 18일 통절하게도 옥사했다. 그는 죽기 전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

안재홍은 단재의 옥사 소식을 전해 듣고, 「동광」에 “단재는 우리나라 봉건 말기에 시민적 민족주의와 국민주의의 가장 총명하고 예민한 양심이요 개척자”였다고 논평했다.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독사신론(讀史新論)」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이 자기 나라에 대한 관념이 없어질 것이니 아! 역사가의 책임이 또한 무겁구나...”

「독사신론」에 나오는 글이다. 「독사신론」은 단재가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서술한 최초의 한국 고대사 역사서다.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자신이 주필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했다. 총 50회가 발표됐는데 마지막 논설의 끝 부분엔 ‘미완’이라고 적혀 있지만, 후에 발표된 『조선상고사』로 완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독사신론’은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초석을 다진 글로, 처음으로 왕조가 아닌 민족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진보적 논설로 평가 받고 있다. 중국에서 흘러 온 기자조선을 정통에서 몰아내고 한민족이 ‘단군’의 후예임을 당당히 밝히고 있다.

신채호는 “경술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閱讀)하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었다”고 술회했다. 「독사신론」은 한말 민족주의 사학의 편린을 이해하고 이후 ‘단재사학’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단재가 1910년 국권 회복 운동에 전념하고자 만주로 망명한 뒤, 최남선이 경영하는 잡지 『소년』 1910년 8월호에 「국사사론」이라는 제목으로 전재됐다. 이를 전재하면서 최남선은 “조국의 역사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참과 옳음을 구해 오래 파묻혔던 빛과 오래 막혔던 소리를 드러내려고……이를 수록하노라”고 평했다.

「독사신론」은 1908년 전후의 신채호의 역사 인식을 포괄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데, 미완성의 논문으로서 완결 편이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이다.

단재는 먼저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며, 영토의 득실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국가주의·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 즉, 국사란 국가의 역사로서, 국가가 민족에 의해 성립된 유기체이므로 민족사가 곧 국사인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국가의 주권을 행사한 주족(主族)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4천 년간의 민족사는 부여족 소장 성쇠의 역사라 하여 부여족을 주족으로 인식했다. 이것은 부여족이 살았던 만주를 우리나라 영토화하는 동시에, 현실적인 외세의 침략에 대한 자긍 의지를 뚜렷이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단군시대부터 발해의 멸망에 이르기까지를 부여족의 활동과 다른 민족과의 교섭 과정으로서 인식하고자 했다. 단군의 정통이 부여로, 그 다음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로 계승되며, 종래에 중시되던 기자·위만·한사군은 부여족의 역사에 부속시켜 서술했다.

따라서 정통론 사학에서 주장되던 기자조선에서 마한 또는 삼한으로 정통이 계승된 것으로 파악되던 고대사 인식 체계가 뒤집어지게 됐다.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를 비판해 김유신·김춘추 및 김부식의 공죄(功罪)를 논했다. 이것은 한국의 고대사를 반도 중심으로 보았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를 만주 중심과 단군 부여족 중심으로 본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 논문에 의거해 한국의 민족주의사학이 식민지화된 뒤에 식민사관에 대처하기 위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애국계몽운동기에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서 싹텄음이 밝혀졌다. 더불어 민족주의사학의 발생 상한선이 올라갈 수 있었다.

「독사신론」이 발표되면서 사학계는 물론 모든 문화계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이 저작의 사관이나 내용은 당시 역사교과서들과 비교해보면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신용하, ‘증보 신채호의 사회사상 연구’)

단재는 역사민족주의 관점에서 근대민족주의 사관을 수립하고, 기존의 사관과 사서들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신용하 교수는 “신채호는 한국 역사에 대한 일본 역사서들의 한국사 왜곡을 통렬하게 비난했다”며 “단재는 일본인들이 한국의 고대사가 중국 민족과 북방민족에 대한 자주성이 없는 복속의 역사이며 남한은 일본이 이른바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지배한 역사라고 거짓이 무고한 학설을 지어내 퍼뜨리는 것을 격렬하게 공박했다”고 지적했다. 신교수는 이와함께 “신채호는 고대에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기는커녕 도리어 일본이 한국 문화를 수입하여 개화의 은혜를 입은 나라라고 지적했다”고 꼬집었다.

서간도 고구려 유적 답사, 중국인 손에 훼손되는 유물·유적에 통탄

단재는 우리 민족사의 발원지를 답사하면서 비통함을 금하지 못했다. 특히 김부식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광대한 대륙의 공간을 망각하고, 아니 일부러 외면하고 신라 중심사로 『삼국사기』를 편술한 것을 개탄해마지 않았다. 그래서 “집안(集安)현을 한번 돌아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통탄했다.

단재가 고조선을 비롯,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를 실지 답사한 것은 역사연구의 고증작업을 위해서였다. 역사연구에서 실지 답사의 중요성을 지적해 “내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적을 실지답사하며 문헌의 부족을 깁고, 착오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윤재, ‘북경 시대의 단재’, 단재 신채호 전집)

단재가 회인(懷仁)현에 체류한 기간은 1년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은 안재홍이 지적한 대로 “조국의 민족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두고두고 그 자유 독립을 꿰뚫는 날을 만들어 기다리게 하자”는 이유였다.(안재홍, ‘조선상고사’ 서문)

뒷날 단재는 간도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민족의 손에 의해 유물·유적이 인멸돼가는 것을 통탄했다.

“내가 아령(俄領) 방면과 만주 방면에 있었을 때에는 우리 사적을 찾기에 거의 전력을 다하다시피 했는데, 여간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 중에는 우리의 자랑이 되는 훌륭한 것도 많았는데, 저 무지한 중국인의 손에서 자꾸자꾸 없어지고 맙니다. 이를 생각하면 통곡할 수밖에 없습니다.”(이윤재, 앞의 책)

이극로는 이 무렵 단재를 ‘서간도 시대의 선생’이란 글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강직한 사필(史筆-역사가)로서 신채호는 재사로서 신채호보다 이름이 더 높이 난 것이 사실이다. 그의 필봉이 향한 자리에는 정사(正邪)가 절로 밝혀진다. 조선 역사의 잘못됨을 바로잡기 위하여 선생은 늘 애를 썼다. 역사담(歷史談)만 하게 되면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의 죄악을 통론한다. 천추에 용서받지 못할 것은 고려 인종으로 하여금 원(元) 금(金)을 멸하고 칭제건원하면 36국이 내조(來朝)한다고 부르짖던 국수주의자 승 묘청의 난을 김부식이 대원수가 되어 토평(討平)하고 사대주의를 주장한 일이다.”

단재의 고구려 고토 만주에 대한 인식은 남달랐다.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돼버린 상황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단재는 과거 우리 민족의 영토였고 활동무대였던 만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에 격분,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 성토

단재는 국내의 3․·1항쟁 소식을 듣고 “전율과도 같은 감격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최홍규,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 얼마나 기다리던 소식인가. 당장 고국으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 조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고 상해·노령·미주 지역 망명 동지들과 빈번한 연락을 취했다. 3월 하순에서 4월 초에 걸쳐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여운형, 신석우, 이광수 등과 만나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여 29인의 발기인중 한 명으로 추천됐다. 임시정부 발기인대회에서 회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으로 하자는 동의가 채택돼 의정원이 성립되고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정부의 조각을 둘러싸고 극심한 논란이 일었다. 신석우는 국무총리에 한성 임시정부 집정관총재인 이승만을 선출하자고 재안했다. 이에 단재는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반대 이유는 이승만이 1919년 2월에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포기하고 국제연맹의 ‘위임통치Mondtory’를 청원했기 때문이다.

‘완전독립’과 ‘자주독립’을 주장해온 단재는 ‘위임통치론자’인 이승만이 임시정부 첫 국무총리로 선출되자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단재는 회의장에서 “미국에 들어앉아 외국의 위임통치나 청원하는 이승만을 어떻게 수반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이오. 따지고 보면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오. 이완용 등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란 말이오”라고 성토하면서 퇴장했다.

단재가 거센 항의를 하면서 회의장을 빠져나온 정황을 이광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또 이승만 박사의 먼데토리 문제는 대의상 용서할 수 없고 안도산은 국민회장으로 이박사를 대표로 임명 파견하였으니, 그래서 사분(私分)으로 무척 흠모하건마는 찾지 아니하노라고 말하고

“우리가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이오? 대의밖에 더 있소? 절개밖에 더 있소?”하고, 절개의식의 마멸은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이라고 극론하였다.

…먼저 임시정부를 조직할 때에 단재는 이박사의 수반을 반대하여 일좌(一座)의 위협 만류도 듣지 아니하고

“나를 죽이구랴.”하고 벌떡 일어나서 유유히 회장에서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기미년 4월 10일 그 전날, 즉 9일부터 만 24시간 불면불휴로 토의한 임시정부 성립의 날이었다. 그는 열혈 있는 청년 수인의 생명에 대한 위협도 모른 체하고 초지를 굽히지 아니하였다. 거기 단재의 불굴(不屈)하는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났던 것이다.”(이광수, ‘탈출도중의 단재 인상’ 단재신채호 전집)

혼자서 항일잡지 「천고」 발행, 중국인들에도 호소

단재는 베이징 북신교(北新橋) 초두호동(炒豆胡同)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뜻을 펴나갔다.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의 일환으로 「천고」(天鼓:하늘의 북소리)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내용은 거의 단재 자신이 집필했다고 한다. 굳이 한문체 잡지를 발행한 것은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독립의지와 한국의 역사를 일깨워서 한·중 공동으로 일제와 싸우게 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1921년 1월에 창간된 「천고」는 장문의 창간사에서 발간 취지를 밝혔다.

첫째로 일제의 국권탈취와 만행을 지적하면서 “왜놈들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해악을 기록할 것이며 만행을 꾸짖고 알리겠다. 또 급박한 위기에 처한 동포들을 구하려 한다”고 다짐한다. 둘째는 신라시대 이래로 수천 년을 ‘왜와의 혈전사’라고 부른다면서 “일본의 우리에 대한 혹독한 정책과 음모, 그리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결연하고 장렬한 대항을 함께 미워하고 이웃 나라에게 소개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더불어 3·1운동 이후 국내 언론 상황과 일제에 부역한 언론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한 편의 시나 다름없는 격문을 싣고 있다.

“천고여, 천고여,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이 땅의 더러움과 비린내(역겨움)를 씻어다오. 장차 혼이 되고, 귀신이 되어 적의 운명이 다하도록 저주해다오. 천고여, 칼이 되고 총이 되어 왜적의 기운을 쓸어버려다오. 폭탄이 되고 비수가 되어 적을 동요시키고 뒤흔들어 다오. 국내에선 민족의 기운이 고양돼 (적에 대한) 암살과 폭동의 장거가 끊이지 않고 있다. 밖으로는 세계 추세가 달라져 약소국가들의 자결운동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천고여, 천고여, 너는 북을 두드려라. 나는 춤을 추리라. 우리 동포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저들 흉악한 무리들을 잡아 없애자꾸나. 우리 산하를 예전처럼 돌려놓자. 천고여, 천고여, 분투하라, 노력하라, 너의 직분을 잊지 말지어다.”

단재 신채호 평전
단재 신채호 평전

쉰일곱 해 파란곡절의 운명, 장엄한 하직

조선총독부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뤼순감옥에서 긴 옥살이를 하던 단재는 수형생활 7년을 넘기면서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 본시 건강체질을 타고나지 못한 데다, 정처없이 떠도는 망명생활, 뤼순 지방의 혹독한 추위는 건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건강이 나빠지자 형무소 당국은 가족들에게 병보석 출감을 통고했다. 형무소의 지침에 따라 국내의 친지들이 친척 가운데 재력 있는 친일 인사를 보증인으로 내세우고 가출옥을 제의했다. 그러나 부러질지언정 휘는 것을 거부하며 올곧게 살아온 단재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친일파에게 자신의 몸을 내맡길 수는 없다고 이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불의와는 한 치의 타협도 하지 않으며 험난한 세월을 살아온 그답게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결연함을 잃지 않았다. 단재가 아니고는 결단키 어려운 단재다운 행동이었다.

1936년 2월 18일 단재는 뤼순 감옥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독방에서 심한 노역과 추위에 시달리던 그에게 뇌일혈이란 병마가 엄습했다. 뤼순의 2월은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었다. 단재는 아무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가운데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무너졌다. 고난의 역사에서 불사조처럼 조국해방을 위해 투쟁해온 ‘선비 투사’는 더 이상 버틸 기력을 잃어버렸다. 단재는 57세로 이 세상과 장엄하게 하직했다. 망명길에 나선지 26년 만이었다. 출옥을 1년8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단재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홍명희는 단재의 옥사 소식을 듣고 「곡 단재」에서 이렇게 썼다. “살아서 귀신이 되는 사람이 허다한데, 단재는 살아서도 사람이고 죽어서도 사람이다”

‘죽어서도 사람’인 단재는 억압과 광기만이 날뛰던 일제강점기에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돌아갔다. 짓밟히고 억눌린 식민지 백성들에게 희망과 광명을 안겨주고 순국했다.

단재는 나라가 기울자, ‘오늘 다시 목놓아 통곡한다(是日也又放聲大哭)’는 글을 써 의(義)를 지켰고, 민족사의 뿌리를 새로 세움으로써 지(志)를 세웠으며, 뜻을 굽히지 않고 끝내 옥사함으로써 절(節)을 지켰다.


<부기>

이 기사의 저본(底本)은 「단재 신채호 일대기」(임중빈), 「단재 신채호 평전」(김삼웅)를 바탕으로 작성했음.

<참고문헌>

『단재신채호전집(丹齋申采浩全集)』(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79)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의 비교분석(比較分析)」(신용하, 『단재신채호(丹齋申采浩)와 민족사관(民族史觀)』, 형설출판사, 1980)

「국사사론(國史私論)」(『소년(少年)』, 1910.8)

「신채호 다시 읽기」(이호룡)

/<사람과 언론> 제4호(2019 봄). 

/이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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