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이 소설 '각시붕어'
보성군은 조양현성 유적조사를 통해 발견된 우물 2군데 중 한곳을 이순신장군과 의병들이 마신 샘물이라 하여 '이 장군 샘'으로 명명하고 복원해, 조선수군과 보성 의병의 활약상과 연계해 역사문화 관광의 장으로 활용할 방침이라 한다. 고내마을에 육방관속들이 거주하며 큰 고을을 형성했다는 '대동'마을로 가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대동마을을 출발했다. 신라통일 후 흡수되어 신라의 착취와 나라를 잃은 설움에 고국을 등지고, 일본으로 떠난 백제유민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만들어진 삼층석탑이 광활한 평야를 바라보고 외롭게 서서 우리를 반기는 우천리로 갔다. 주요마을을 구경하고, 마지막에 축내리 행복마을의 한옥주택 운치가 물씬 풍기는 '편하재'를 보았다.
조성면의 주요 사적지가 있는 마을들을 돌아보고 버스를 돌려서 녹차와 서편제의 고장 보성군 조성면 조성3길 338번지, 주월산에 있는 '보성컨트리클럽'(골프장)으로 구경을 갔다. 골프장은 웅장한 산과 계곡아래 조성되어 있었다. 변화가 심한 홀이 많아 정교한 샷을 구사하는 골퍼에게 유리하다는 마운틴코스 를 재미있게 살펴보았다.
그 다음에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레스토랑에 들러 시원하게 뚫린 잔디밭 홀을 쳐다보며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그 다음에 ”편안한 페어웨이와 잔잔한 호수가 많은 코스로 마음껏 샷을 구사해도 모두 포용해줄 것 같은 코스인 레이크코스“를 돌아보았다. 다시 버스를 타고, 따뜻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일조량이 풍부해 품질 좋은 참다래, 미니토마토, 딸기, 한라봉 등 이 생산되어 전국 각지에서 인기가 높아져 가고 있는 특산물을 재배하는 마을을 향해 출발 하였다. 안내인은 특산물 재배에 대해 설명했다.
먼저 참다래 재배 농장을 방문했더니, 연세가 많아 보이는 주인이 직접 나와 방문객들을 맞아주었다. “참다래는 다랫과 낙엽덩굴 식물로 6-7월에 흰꽃이 피고, 8-10월에 갈색털이 덮인 달걀모양으로 익은다”고 설명해주며 “열매모양이 키위라는 새처럼 생겼다고 해서 열매를 키위라고 부르게 되었고, 비타민 C가 풍부한 과일이다” “원산지는 주로 뉴질랜드이며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특산물로 재배해, 전국에 팔려나가 조성면의 주요 수입원으로 자리 잡았다”며 참다래의 재배역사를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정자와 외손녀들, 영심에게 서울 구경 가자고 졸라대
참다래는 “익기 전에는 단단하고 시어서 제 맛이 나지 않아 먹기 힘들고, 너무 익으면 물컹물컹해 먹기가 좋지 않으므로 적당히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안내인은 말했다. “손으로 쥐었을 때 전체적으로 약간 무른 느낌이 들고 말랑말랑할 때가 적당히 익은 것이다”하며 “익은 다음 냉장고에 넣어 차게 해 먹으면 더욱 맛있다.”고 하였다.
영심의 딸인 정자가 함께 구경 오신 분들에게 싱싱한 참다래를 한 상자씩 구입해드리며 “그 동안 어머니를 잘 보살펴주어서 감사하다”고 한분 한분께 인사를 드렸다.
하루 종일 영심과 정자, 그리고 손녀들이 지인들을 모시고 조성면 곳곳을 다니면서 음식도 사먹고, 그 동안 가슴에 담아왔던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재미있게 보냈다.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하던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다시 등용되어 전선으로 향했으나 낙안의 군량창고가 불타버려 군량미가 없었다. 다행히 조성면 고내마을에 있는 세곡을 보관하던 조양창에 들려 양곡을 확보하고, 무기와 군사들을 추스르던 역사를 기리기 위한 축제인 “동로성 축제”장으로 구경 갔다.
구경이 끝나고 돌아오면서 안내인이 “우리나라 백두대간의 끝자락은 벌교읍 백이산에 이어지고 백이산은 조성면 주월산에 이어져, 득량면 오봉산을 거쳐 보성읍 봇재로 연결된다.” “이러한 지리적인 잇점과 조성면에 있는 사방이 탁 트이고 산세가 아름다운 주월산을 배경으로 조성평야와 바다를 아우러, 전국 유명관광지로 개발되어 나갈 것이다”고 전국 관광벨트와 연계하여 조성면의 미래에 대해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집으로 돌아온 정자와 외손녀들이 영심에게 서울 구경을 가자고 졸라대었다. 며칠 후에 영심도 같이 가기로 결정하고 조성집을 나섰다. 자가용을 타고 조성역을 지나 예당역을 거쳐 보성읍으로 간 후에 화순 읍내에 들러서 영심의 막내 동생을 만났다.
막내 동생을 만나서 점심식사를 하고, 광주로 올라가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장성을 지나 정읍 내장산 휴게소에서 녹차를 한잔씩 마셨다. 정안휴게소에서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고 기흥휴게소에 들러 저녁식사를 하였다. 양재역을 거쳐 정자네 집으로 갔다.
성북구 미아동에 살고 있는 정자의 집에 짐을 풀고 밤새워 옛날이야기를 하였다. 딸의 손을 꼭 잡고 이부자리에 누워 영심은 “어릴적 부터 장애인의 몸으로 살아가게 되어 평생 동안 부모를 원망하며 지내 왔는데 딸이 있어 행복하다.”고 눈물을 흘렸다.
하루 종일 차를 타고와 피곤하련만, 행복감에 빠져 꿀잠을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딸이 차려주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딸과 사위와 함께 서울관광지 구경을 나섰다.
경복궁을 구경하기 위해 먼저 광화문으로 들어가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먼저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위치하고, 서울의 대표적 관광지인 경복궁 구경을 가자고 사위가 말하였다. 경복궁은 조선조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하면서, 조선시대에 제일 먼저 지어진 궁궐로서 정도전이 이름을 지어 붙였다고 했다.
경복궁 건축은 조선건국공신이었으며,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아버지 심덕부가 경복궁 건설을 위해 설립 되었던 '신도궁궐조성도감'의 책임을 맡아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실질적으로 경복궁을 건축한 인물은 원래 고려인 이었지만, 원나라에 환관으로 차출되어 원나라의 궁궐 수리를 담당했던 “관청 전연사”로 근무했던 환관 김사행 이었다.
김시행은 '노국대장공주'가 고려로 오면서 데리고 와, 최고의 건축전문가로 이름이 알려져 공민왕의 신임을 받았고, 조선 왕릉의 기본이 되는 공민 왕릉과 노국대장공주의 주릉의 건설을 주도했던 경력으로 경복궁 건설에 차출되어 주도적으로 일을 했다.
경복궁은 조선 전기 동안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오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버린 후 출입이 금지된 채 200여 년 동안 내려오다 흥선대원군이 재건했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이 지은 경복궁과 임진왜란 당시 불타버린 경복궁의 모습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이전의 건물은 5,000칸까지 서서히 확장 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은 단숨에 7,400칸 짜리로 넓게 중건해서 1.5배 크기로 지어 버렸다.
경복궁을 구경하기 위해 먼저 광화문으로 들어가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흥례문과 영제교, 근정문을 지나 경복궁 관람의 메인 코스인 근정전으로 가서 안팎을 구경했다.
근정전은 임금이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며, 저녁에는 지시 할 사항을 다듬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하여 부지런히 백성을 위해 힘쓰라는 뜻으로 이름을 정하고 “임금이 부지런해야 함을 강조하는 뜻이 들어있다”고 전해진다.(계속)
/이용이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