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근의 지리산 문화대간(81)

구월과 시월은 조상의 통곡에 지리산이 답해주는 시간이다. 그 이야기 한토막은 이렇다. 지리산에 왜적이 나타난 때는 보통 가을무렵이었다. 크게는 고려의 황산대첩과 조선 정유재란이 그 시기였다. 남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들이 가을이면 지리산까지 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던 때도 부지기수이니 지리산은 왜구들의 가을 표적이었다.
조선 정유년 지리산 남원성 전투는 그 중심의 역사다. 만여명의 민관군이 목숨을 받친 남원성 전투에는 백성의 이야기가 드물다. 그 중 하나를 꺼내보려 한다.

25년 전 나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강원도 철원에 사는 노인이라며 자신의 선조는 지리산 초입 백무동에서 살았고 무업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라 때는 화랑이기도 했다면서 정유년 조상의 팔형제가 왜구들이 지나는 곳에서 기습공격으로 왜구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는데, 팔형제는 화랑의 후예답게 용맹했고 지혜가 많아서 얼굴에 도깨비 탈을 쓰고 왜구들의 초병소나 왜구들이 마을에 약탈하러 골목을 지날때 갑자기 나타나 죽이는 신출귀몰한 존재였다고 한다.
그래서 운봉현 백성들이 도깨비 팔형제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이야기가 집안에 내려오고 있어서 가끔씩 선조들의 고향을 다녀가가도 한다며 자신들은 고조때 철원지방으로 와서 무속일을 하였다고 했다.

나는 그 전화를 받고 운봉고을의 도깨비 팔형제 이야기 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백성의 이야기가 역사일리 없으니 기록은 멀고 구전마져 찾을길 요원했다. 그러다가 "운봉도깨비는 낮에는 장승으로 변장하고 밤에는 도깨비가 되어 백성을 지켜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탯줄을 잡을수 없어 나의 방식으로 조각을 맞추었다. 400여 년 전 왜적에게는 도깨비로, 오늘 우리들에게는 친근한 할아버지가 되는 두 얼굴을 가진 운봉고을 석장승은 고을을 지켜 온 이야기를 가졌다.

운봉고을은 인월, 아영, 산내를 관장하던 조선시대 현이었다. 지리산 운봉에는 돌장승들이 많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길목에 있는 운봉의 몇 마을들에는 어김없이 돌장승이 마을 입구 양쪽으로 서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무섭게 생긴 게 특징이다. 왜 일까? 고려 말 이후로 왜적의 침입이 많았던 곳이라, 이 지역의 마을 사람들은 밤을 이용하여 왜적을 습격하여 무찔렀다.

그 선봉에 섰던 이들은 운봉인근 지리산 백무동에 살던 소리 광대들이었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야간에 잠복해 있다가 마을로 식량을 약탈하러 오는 왜적들을 물리쳤다. 얼굴에 도깨비 탈을 쓰고 순식간에 나타나서 왜적들의 목을 베고 사라지는 신출귀몰한 그들을 왜적들은 가장 두려워했다.
마을 사람들은 왜적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도깨비 탈을 쓰고 활동하던 광대 의병의 모습을 마을 입구에 세워 용맹성을 표시했다. 왜적들은 그 돌장승을 보기만 해도 도망을 가게 되었다.

그 후로 돌장승을 세워 두었던 마을에는 왜적들이 얼씬거리지 않았다. 함양에서 너머오던 왜적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신출귀몰한 지리산 팔형제 광대 의병과 맞닥뜨리는 것이었다 그 형제 의병의 소문은 마을 입구에서 실체로 만나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곳에 광대 형제를 돌장승으로 세웠으리라. 구, 시월은 이야기마저 승리다. 사람을 부르는 유인체는 문화적 스토리다.
/글·사진: 김용근(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