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획] 선거보도의 편향, 무엇이 문제?(9)

객관적 저널리즘(objective journalism)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해석적 저널리즘(interpretative journalism)은 미디어들이 내보내는 많은 뉴스들 속에 사실과 해석이 자유롭게 상호 결합되어 있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선거 과정에서 미디어의 지나친 해석적 저널리즘 강조와 활용은 선거보도의 중심적 가치인 공정성과 중립성을 해칠 수 있다. <특별 기획, 선거보도의 편향, 무엇이 문제?> 아홉 번째 편으로 '해석적 저널리즘'의 실태와 문제점, 대안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지난 기사들] 

⑧ '딱 걸렸어'...가차 저널리즘, 독자·시청자 세뇌, 개인에 심각한 영향

⑦ 언론사와 이념 성향·지향점 다르면 벼랑 끝으로...'공격 저널리즘'

⑥ 예측할 수 없는 선거 결과, 비정상적 사회구조 낳게 하는 '선전 저널리즘' 

⑤ 독점·담합 ·왜곡...사라지지 않는 '패거리 저널리즘'

④ '망국병' 부추기는 '지역주의 저널리즘' 

③ 민주주의 위협하는 '정파성 저널리즘', 선거철 더욱 '기승' 

② '정치 냉소주의' 부추기는 '틀 짓기 저널리즘' 경계해야

① 미디어 선거보도의 잘못된 관행과 편파적 보도 원인  


예전에는 언론인들이 뉴스 뒤에서 비교적 수동적인 목소리를 냈다면, 지금은 뉴스 메이커로서 능동적이고 가시적으로 바뀌었다. 13대 대통령 선거 때 후보의 사운드 바이트 길이가 KBS의 경우 평균 45초 정도였으나, 15대 대선에서는 11.8초로 대폭 줄었다. 국회의원 후보들의 사운드 바이트 길이는 더 짧다. 객관적 저널리즘은 사실이 주도하지만, 해석적 저널리즘은 주제가 주도하기 때문이다.

뉴스를 누가 어떻게, 해석하는가?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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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일 또는 시시각각 접하는 뉴스란 어떻게 해서 생겨난 말일까? 흔히 ‘동서남북(North, East, West, South) 즉, 사방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소식’이라고 뉴스의 개념을 정의하곤 한다. 이처럼 영어의 ‘동서남북’ 첫 글자를 모아 ‘News’라고 이름 지었다는 속설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뉴스에서 중요한 요건은 바로 이야기가 새롭고 처음으로 취급된 보도여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로 속보 경쟁 속에서 뉴스를 제작해 내보내는 미디어들은 남이 먼저 보도했거나 혹은 현재와 관련성이 없는 이야기는 뉴스의 가치가 적거나 전혀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므로 시간성, 즉 속보성은 뉴스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건이라 하겠다. 동시에 언론사 또는 취재기자들 사이에 ‘뉴스는 흥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중요 요건으로 여기고 있는 경우가 많다. 뉴스가 새로워야 한다는 것도 결국에는 새로운 이야기여야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스의 중요 요건인 시간성과 흥미성을 모두 갖추기란 쉽지 않다. 빠른 시간 내에 흥미 있는 뉴스를 내보내기 위해 심층적으로 취재하거나 취재된 소스를 해석하고 재구성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문성 여하에 따라 소요 시간은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속보 경쟁을 해야 하는 언론사들 입장에서는 뉴스 제작 과정에서 여간 빠른 내부 커뮤니케이션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무엇이 뉴스의 실제인가? 

2020년 9월 2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민주당의 조 바이든 대선 후보가 첫 번째 TV토론 대결을 시작했다(블룸버그(Bloomberg) TV 캡처)
2020년 9월 2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민주당의 조 바이든 대선 후보가 첫 번째 TV토론 대결을 시작했다(블룸버그(Bloomberg) TV 캡처)

취재된 소스를 그대로 내보내자니 흥미성이 떨어지고, 흥미성을 높이기 위해 취재된 소스를 다시 해석하여 재가공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 언론사들은 이 대목에서 적지 않은 고민을 하기 마련이다. 더 큰 문제는 사실 혹은 현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기자 또는 언론사의 이념적 성향이나 가치관이 개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칫 뉴스의 객관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뉴스 가치 판단과 더불어 게이트키핑(gatekeeping)이 필요하다. 

여기서 ‘한 사회의 구조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는 반드시 커뮤니케이션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 버거와 루크만(Berger & Luckmann)의 연구 결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현실 혹은 실제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지식사회학은 이것이 일어나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이 실제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들의 기반이 되는 확실성에 대한 체계, 즉 지식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버거와 루크만은 주관적인 의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객관적인 사실성을 획득하는가라는 문제를 이해하려고 시도한 연구를 통해 한 사회의 독자적이고 독특한 실제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그것이 구성되는 방식에 대한 탐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다시 말하면 객관성은 지배적인 집단을 통한 사회체계의 구조화(institutionalization)와 정당화(legitimation) 과정을 거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성은 미디어가 생산하여 내보내는 뉴스에서 더욱 엄격하게 적용돼 왔다. 전통적인 뉴스의 객관성은 사실성(factuality)과 불편부당성(impartiality)이라는 두 가지의 기준점 혹은 규범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성이라는 규범은 보도가 일어난 사실의 진실된 모습에 가깝고 적절한 내용을 뉴스에 담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진실성이 사실들(facts), 인용,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옮기는 것에서 정확함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적절성이라는 것은 보도가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가장 중요한 내용과 가장 중요한 논점을 뉴스화했는가의 문제다. 불편부당성은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서 균형 있고 공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왜? 

2022년 2월 2주차 대선보도 중 정책 언급 보도 건수 분석 결과(2월10~16일, 민주언론시민연합 제공)
2022년 2월 2주차 대선보도 중 정책 언급 보도 건수 분석 결과(2월10~16일, 민주언론시민연합 제공)

물론 때때로 이런 기준들 간에 상충이 일어나기도 하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충실하게 진실된 보도라고 하더라도 이 보도로 인해 프라이버시에 피해를 입는 사람도 생길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객관성에 대한 논란은 그동안 늘 지속돼 왔다. 갠스(Gans)는 객관성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외부 실재에 대한 완벽하고 충분한 재생 혹은 재구성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글래서(Glasser)는 객관성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안에 대해 말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공식적인 주장을 게으르게 그대로 옮기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미디어는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미디어가 제공하는 보도는 실제를 그대로 복사한 것도 아니고, 또한 기자의 창작과 같은 정신적 구성물도 아닌 그 중간쯤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건이 기자의 특정 시각에 의해서 추려지고 해석(interpretation)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해석이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한 보도가 객관적이냐를 판단하는 데 ‘해석’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물론 미디어의 객관성은 부분적으로 오류의 가능성이 있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힘들 수도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어떤 기준들의 경우 그 자체가 적절한지 아닌지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뉴스의 적절성 여부를 판단하는 사람이 기자들이어야 하는지, 전문가여야 하는지, 아니면 기사를 읽는 독자여야 하는지도 해석의 문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누가 믿을 만한 정보원인가라는 문제 역시 해석의 영역으로 보았을 때 객관성의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 

뉴스의 객관성과 해석의 틀 

지난 2월 11일 서울 중구 매경미디어센터에서 열린 한국기자협회 주최 방송 6개사 공동 주관 초청 대선 후보 토론회 시작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사진=국회 사진기자단)
지난 2월 11일 서울 중구 매경미디어센터에서 열린 한국기자협회 주최 방송 6개사 공동 주관 초청 대선 후보 토론회 시작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사진=국회 사진기자단)

저널리즘이 추구하는 객관성 요소들로는 ‘보도되는 사실로부터 의견 분리’, ‘비당파적 성격’, ‘역피라미드적 글쓰기’, ‘사실(fact)에 대한 존중’, ‘균형성’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수없이 많은 이야기꾼과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유사 언론 매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수동적인 반영만을 언론의 객관성을 지탱하는 축으로 삼기는 힘들다.

즉, 세상을 전달하는 유일한 창구로서의 언론이라는 장이 사라진 곳에서 객관성이란 절대적인 실체를 지닌 개념이라는 정의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보다 나은 필터로서의 저널리즘적 실천을 통해 객관성을 정의하는 절차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미디어의 저널리즘 실천 행위보다 객관적이라는 해석적 공동체의 합의가 중요하다는 것인데, 결국 저널리즘의 객관성이 타당성이나 살아 있는 구체적 행위양식으로서 살아나는 곳은 해석 공동체의 ‘해석 틀(interpretation frame)’이라는 주장과 같은 맥락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때 거울처럼 반영하는 유일한 방식으로서 객관성 개념에 대한 신화는 자연스럽게 폐기되고 만다. 다시 말해 해석 틀로서의 객관성에 대한 이해는 기존에 알려져 왔던 특성들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즉, 객관성이라는 개념의 용도 그 자체를 폐기하거나, 객관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열망을 접게 하거나, 모든 것은 역사적으로 우연한 요소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객관성이란 개념을 그러한 우연성의 한 실현으로 평가절하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바로 ‘해석 틀’의 특성 때문이다. 

객관적인 뉴스, 객관적인 해석이라는 것과 일치 

1976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제럴드 포드(오른쪽)와 민주당 대선 후보 지미 카터(왼쪽)가 토론을 벌이고 있는 모습(CNN 캡처)
1976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제럴드 포드(오른쪽)와 민주당 대선 후보 지미 카터(왼쪽)가 토론을 벌이고 있는 모습(CNN 캡처)

그렇다면 미디어가 다루는 기사에서 ‘사실(fact)’과 ‘해석 틀(interpretation frame)’ 중 어떤 것이 더 많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을까? 물론 초기에는 사실에 무게중심을 훨씬 많이 두었다. 콰인(Quine)은 우리가 과학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나 언론에서 다루어진 기사나 지식이라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사실(fact)에 기반하고 있는 ‘인간이 만든 구조물(man-made-fabric)’이라고 했다. 그 어떤 해석(interpretation)도 공동체 구성원이 지지 혹은 동의하는 사실로 이루어진 개념적 그물망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런 종류의 질문은 쉽게 대답하기 힘든 것이 되고 말았다. 특히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맞아 더욱 치열한 속보 경쟁을 펼치며 생존 경쟁을 해 나가야 하는 최근의 미디어 환경에서 객관성을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어떤 해석이 현재 적용 가능한 최선의 기준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면 그 해석은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석 틀로서 객관성이라는 개념은 미디어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뉴스의 객관성은 해석 틀로서의 객관성이라는 개념의 한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뉴스를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저널리즘은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 해석은 최소한 어느 정도의 개념화, 취사선택, 이론화 그리고 평가라는 것을 포함한다.

즉, 언론의 두 가지 주요 부분으로 간주되는 객관적 뉴스 보도와 주관적인 의견이나 논평은 서로 분리된 혹은 분리 가능한 두 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 계열 혹은 연속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정치 관련 뉴스에서 우리는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반면에 해석을 낳게 한 사실(fact)은 별로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 한 사건에 관한 보도의 객관성은 보다 논쟁의 가능성이 많아진다. 따라서 하나의 객관적인 뉴스라는 것은 하나의 객관적인 해석이라는 것과 일치한다. 이는 언론에 보도된 뉴스들은 기자들의 해석적 기법 혹은 수련과 세상의 실재 사실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해석학적 순환의 결과물과도 같다.

해석적 저널리즘의 한계 

정리하면, 해석적 저널리즘(interpretative journalism)은 객관적 저널리즘(objective journalism)에 대한 반발로 등장하게 되었다. 미디어들이 내보내는 많은 뉴스들 속에는 사실과 해석이 자유롭게 상호 결합되어 있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해석은 주제를 제공하고, 사실은 그것을 밝혀 주는 것이기 때문에 주제가 우선이고 사실은 예증의 자료로 사용된다. 결과적으로 여러 사건들은 압축되어 공동의 주제 속에 함께 혼합된다. 특히 기자들은 항상 정치인들의 행동에 의심을 품고, 그들의 행동에 전략적 의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적게 주려는 것이다. 

해석적 저널리즘이 그 자체로는 오래된 저널리즘이기는 하지만 최근에 와서야 뉴스 보도의 지배적인 모델이 되었다.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사들이 뉴스 시간을 15분에서 30분 형식으로 바꾸고, 자신의 뉴스를 제작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점차 해석적 보도 스타일에 의존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기사 작성법인 역피라미드 형식은 텔레비전에는 잘 맞지 않는다. 이 형식은 사건의 가장 중요한 사실을 서두에 밝히고 그로부터 점점 중요도가 낮은 요소들을 배열하는 방식의 기사 작성법이다. 이는 편집자가 항상 지면과 시간의 여유에 따라 그 기사를 자를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텔레비전에서 이러한 형식은 기사의 박력을 떨어뜨린다. 방송사 간부들은 사실보다는 이야기가 중심이 된 좀 더 극적인 보도 스타일을 원한다. 미국 NBC의 회장이었던 로이벤 프랭크(Reuven Frank)는 기자들에게 “모든 뉴스 기사는 품위와 책임감을 잃지 않고서 소설과 드라마의 속성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구조와 갈등, 문제, 비난, 새로 일어나는 행동과 사라지는 행동, 시작과 중간, 그리고 결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객관적 저널리즘은 사실이 주도하지만, 해석적 저널리즘은 주제가 주도

               2022년 2월 2주차 방송사별 대선 보도 주제 분석 결과(2월10~16일, 민주언론시민연합 제공)
               2022년 2월 2주차 방송사별 대선 보도 주제 분석 결과(2월10~16일, 민주언론시민연합 제공)

신문 역시 해석적 저널리즘을 추구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텔레비전을 모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뉴스 시장에서 틈새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텔레비전의 속보성과 경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아는 신문은 어제의 사건을 설명하거나 새롭게 윤색하는 보도 방식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오늘날 이러한 해석적 저널리즘이 신문보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뉴욕타임스≫를 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패터슨(Patterson)의 연구에 의하면 1960년과 1992년 사이에 ≪뉴욕타임스≫ 1면에 나타난 해석적 보도의 비율이 8%에서 80%로 무려 10배가 늘었다. 이 밖에 해석적 저널리즘은 언론인들에게 뉴스 메시지에 대한 통제권을 더 많이 부여해 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객관적 저널리즘은 사실이 주도하지만, 해석적 저널리즘은 주제가 주도하기 때문이다.

이때 사실들은 선택된 주제를 예증하기 위한 자료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객관적 보도는 언론인에게 관찰자의 역할을 요구하지만 해석적 보도는 언론인이 분석하기를 요구한다. 예전에는 언론인들이 뉴스 뒤에서 비교적 수동적인 목소리를 가졌다면, 지금은 뉴스 메이커로서 능동적이고 가시적으로 바뀌었다. 

대표적인 예가 선거 캠페인에서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사운드 바이트(sound bite: 정치인들의 발언, 연설 중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의 코멘트 · 문장 · 구절 부분만을 압축 · 편집하여 방송으로 방영하는 것)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텔레비전 뉴스에서 후보들과 관련된 기사의 84%는 사운드 바이트가 있었다. 이 당시 평균 사운드 바이트 길이는 42.3초였다. 그러나 1988년에는 9초로 짧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때 후보의 사운드 바이트 길이가 KBS의 경우 평균 45초 정도였으나, 1997년 15대 대선에서는 11.8초로 대폭 줄었다. 국회의원 후보들의 사운드 바이트 길이는 더 짧다. 1988년 13대 총선 때는 평균 30초였으나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평균 9.45초로 대폭 짧아졌다.

객관적 저널리즘과 해석적 저널리즘은 상호 견제와 보완적 관계 

결국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은 말을 잃어버린 셈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1988년, 1992년 그리고 1996년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방송사 저녁 뉴스에서 후보들이 매 1분을 말할 때 기자들은 6분을 말했다. 신문 보도도 마찬가지다. 1960년대 ≪뉴욕타임스≫ 1면에 실린 대통령 후보들의 평균 인용구는 14줄이었다. 그러나 1992년에는 6줄로 줄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패터슨(Patterson)은 “이제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정치인들의 언행과 관점은 기자의 관점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자료의 일부로 전락하고 말았다”면서 “앞으로 미디어 자신의 말보다는 정치인과 공중의 목소리가 더 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객관적 저널리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해석적 저널리즘이 결국 ‘객관성 결여’라는 문제점을 낳음으로써 객관적 저널리즘과 해석적 저널리즘은 상호 견제와 보완적 관계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선거 과정에서 미디어의 지나친 해석적 저널리즘 강조와 활용은 선거보도의 중심적 가치인 공정성과 중립성을 해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위 글은 필자가 저술한 <선거보도의 열 가지 편향(커뮤니케이션북스, 2015)> 중 일부를 시의성 있게 수정·보완한 기사임. 

/박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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