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획] 선거보도의 편향, 무엇이 문제?(7)
언론사가 지향하는 '사시(社是)'에 따라 언론의 환경 감시 기능 또는 상관 조정 기능의 잣대가 다르다. 심지어 이념적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정치인 또는 공인을 벼랑으로 몰아세우거나 나락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 이른바 '공격 저널리즘(attack journalism)'이 자주 목격된다. 특히 선거철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특별 기획, 선거보도의 편향, 무엇이 문제?> 일곱 번째 편으로 '공격 저널리즘'의 실태와 문제점, 대안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지난 기사들]
⑥예측할 수 없는 선거 결과, 비정상적 사회구조 낳게 하는 '선전 저널리즘'
⑤ 독점·담합 ·왜곡...사라지지 않는 '패거리 저널리즘'
③ 민주주의 위협하는 '정파성 저널리즘', 선거철 더욱 '기승'
② '정치 냉소주의' 부추기는 '틀 짓기 저널리즘' 경계해야
언론사와 언론인들에게 정치 스캔들은 가장 빠른 공격의 대상이 된다. 24시간 뉴스 채널의 등장과 인터넷 채널을 이용한 속보 경쟁이 심화되면서 공격 저널리즘이 현저히 증가하는 추세다.
뉴스 사이클의 속도가 더욱 더 빨라지면서 정치인이나 공인들의 스캔들은 진실 여부를 정확히 확인할 때까지 보류하기가 점차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특히 언론사와 평소 적대적이거나 이념 성향이 다른 정치인들은 공격 저널리즘의 우선 표적이 되기 일쑤다.
발표·따옴표·들춰내기...폭로주의 저널리즘 등장

미디어는 정보를 최대한 신속히 전달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이러한 속성에 따라 사실 확인이나 사실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하지 않고 취재원이 제공한 정보나 이에 대한 해석·정의를 그대로 서둘러 보도하는 관행을 흔히 학자들은 ‘발표 저널리즘’ 또는 ‘따옴표 저널리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발표 저널리즘’이 비록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해 행해지는 경우에도 그 결과는 긍정적이지 않은 때가 많다. 특히 취재원의 의도에 말려 사실 폭로의 중계 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다매체·다채널 시대에 정치 분야의 ‘발표 저널리즘’ 현상이 빈번히 발생하는데, 특정 정치인에 대한 ‘들춰내기 식 폭로’를 중계 보도하는 행태가 경쟁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폭로를 중계하는 ‘발표 저널리즘’은 선거 기간이나 정쟁이 치열한 시점에서 문제가 되는데, 이때에는 정책에 대한 보도보다 특정 제보를 기초로 작성된 폭로형 보도가 난무하는 경향이 있다. 폭로의 내용은 주로 정치인의 뇌물 수수나 인사 청탁과 같은 비리부터 이념 공방, 지역주의, 인신공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인 폭로가 누군가의 제보에 의한 것이거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전략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미디어는 대개 엄밀한 확인 과정은 생략하고 여기에 따옴표를 붙여서 일단 보도부터 하게 된다.
선동에 취약한 미디어들을 자신의 목적 달성에 교묘히 이용

표현의 자유가 가장 발전한 국가인 미국은 정치 제도나 정치 보도의 수준이 상당히 선진화되어 있다. 그런데 유권자들이 정치를 멀리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적은데 이는 정쟁과 정략을 강조하는 언론 보도 탓이라는 연구 결과들이 많다. 즉, 혼란한 정치판에서 정치인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객관성’이라는 미명으로 그대로 중계하는 보도 현실에서 유권자들이 등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전형적인 ‘발표 저널리즘’의 폐해로는 1950년대의 조셉 매카시(Joseph R. McCarthy)의 매카시즘(McCarthism)을 들 수 있다. 1950년까지 주목받지 못하던 초선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매카시는 같은 해 2월 9일 공화당 선거 유세차 들른 웨스트버지니아주의 한 작은 도시에서 그 지역의 공화당 부녀회원을 모아 놓고 미국 국무부에 공산당원 205명이 숨어 있으며 자신이 그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충격적인 발언을 AP통신이 전국에 알렸고, 냉전 시기였던 1950년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미국 지식인 사회를 혼란의 폭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매카시의 ‘무분별하고 자의적인 발표’와 이를 받아서 사실 검증을 하지 않고 중계한 미디어 그리고 시대적인 냉전 상황이 겹쳐서 당시 약 1만 명 이상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직장을 잃었으며 뉴딜정책이 좌초됐고 자유로운 표현과 정치활동이 불가능해졌다. 또한 월남전에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미국 사회에 분열을 가져왔다. 매카시는 항상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으며 선동(demagog)에 취약한 미디어들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교묘히 이용했다.
매카시즘의 열풍이 지나가면서 미국의 미디어들은 많은 논의와 반성을 거치게 된다. 그래서 현재는 발표 저널리즘의 병폐로 지적되는 정치적 폭로와 같은 사안을 무분별하게 기사화하는 것은 드문 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폭로주의적 가십 보도’가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과 논의들이 상존해 있다.
발표 저널리즘과 탐사 저널리즘의 차이

사실의 인과성을 떠나 폭로 위주의 ‘발표 저널리즘’ 대용품으로 1970년대 등장한 것이 ‘탐사 저널리즘(investigative journalism)’이다. 탐사 저널리즘의 가장 큰 특징은 가능한 한 모든 데이터를 수집해 이를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데 있다. 저널리스트가 사건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저널리스트가 중심이 되어 생산 과정을 진행한다.
1972년 6월 미국에서 발생한 워터게이트 사건은 탐사 저널리즘의 개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 발굴과 같은 고되고 힘든 작업을 계속할 수가 없다. 탐사 저널리즘은 기자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언론은 ‘탐사 저널리즘’ 대용품을 찾아냈는데, 미디어들은 정치인들의 주장을 파헤치는 수단으로 그들의 정적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정치인이 뭐라고 말을 하면 언론인들은 그 말을 공격하기 위해 그 정치인의 정적에게 의존했다. 여기에서 갈등은 항상 가장 중요한 뉴스 가치라는 점도 같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발표 저널리즘보다 탐사 저널리즘이 훨씬 공격적이었다.
뉴스 이슈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공격의 대상을 정해 치열하게 파고드는가 하면, 지배 체제의 구조적 문제들을 공격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을 제시하는 수준까지 깊이 있는 논의를 담아내는 것을 추구했다. 대신 철저하게 객관적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과학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저널리스트가 뉴스 생산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므로 과학적 객관성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오히려 주관적 뉴스 생산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탐사 저널리즘은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혼란을 타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등장했지만,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객관성을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분리주의로 받아들였다.
정치나 정책의 의미를 파고들기보다는 이를 구성하는 뉴스 행위자들의 전문성을 강조하면서 전략, 전술의 차원에서 접근했다. 결과는 저널리즘의 신뢰 추락으로 나타났다. 물론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개인적 관점을 독자들에게 투사하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 긍정적 기능을 하기도 했다.
탐사 저널리즘, 단순한 고발 아닌 사회 변화에 초점 맞추어야
그러나 필립 메이어(Philip Meyer)가 지적한 것처럼 이런 식의 객관성은 사실이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한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저널리즘은 더 이상 객관성이라는 방패 뒤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탐사 저널리즘은 이런 지점에서 그 가치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탐사 저널리즘은 뉴스 내용과 뉴스 생산 방법의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탐사 저널리즘의 내용적 특성은 ‘누군가 숨기려고 하는 그 무엇을 끊임없이 파헤치는 것’이라는 정의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그 무엇’은 부정과 부패이고 ‘누군가’는 개인이 아니라 제도나 권위, 구조 등이다. 탐사 저널리즘은 지배 권력이나 이들이 지배하는 사회 구조, 특히 정부와 같은 권력 구조를 견제하고자 한다.
좀 더 세분하면 도덕적 규범을 위반한 부끄러운 관행을 확인하는 것(identifying), 권력 남용을 밝혀내는 것(revealing), 중요한 주장의 근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questioning), 부패를 드러내는 것(showing), 공식적인 이유들에 도전하는 것(challenging), 법의 함정을 증명하는 것(demonstrating), 명분과 실제의 괴리를 폭로하는 것(exposing), 감추어진 것을 끄집어내는 것(disclosing) 등이라고 하겠다.
이는 탐사 저널리즘이 정보 전달이나 수동적 감시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의제를 바꾸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지배 체제의 의도와 관계없이 사회적 중요성의 우선순위를 직접 설정하고자 한다. 변혁을 추구하므로 지배 체제에 대해 공격적이고 때로 적대적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영국에서는 탐사 저널리즘을 정치적으로 야당으로 이해했다. 1982년 대처 정부 시절, 영국의 야당은 여당에 전혀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다. 이때 채널4 텔레비전의 탐사 저널리즘 프로그램 <디스패치(Dispatches)>는 야당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았다. 따라서 탐사 저널리즘은 단순한 고발이 아니라 사회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한다. 탐사 저널리즘을 악역, 피해자, 공익 등의 구도로 구성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변화 없이 구조적으로 내재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듯이 탐사 저널리즘은 적어도 이런 문제에 대해 변화의 촉매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했는데, 미국의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는 탐사 저널리즘을 ‘해결 저널리즘(solution journalism)’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저널리스트들이 사안에 대해, 특히 칼럼을 통해 자신의 분석과 해석에 따른 주관적 판단과 해결책을 제시할 것을 요구해 왔다. 그런가 하면 <마이애미헤럴드트리뷴(Miami Herald Tribune)>은 반드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처방(prescription)을 내리는 것으로 기사의 끝을 맺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언론인들, 정치인의 애완견에서 공격견으로...왜?
탐사 저널리즘은 1980년대 공격 저널리즘(attack journalism)을 새로운 형태로 탄생시키며 기자들을 직접적인 참여자로 만들었다. 언론인들은 항상 정치인들의 동기와 방법, 그리고 정책의 효과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이 같은 보도 형식은 파수견 저널리즘(wachdog journalism)과 같다.
언론인들은 정치인이야말로 정치적 확신에서 행동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지킬 의사도 없고, 설사 노력을 한다 해도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언론이 가장 부정적으로 보도하는 기사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입장을 바꾸거나, 어려운 이슈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든지, 또는 우연히 만나는 모든 사람이나 집단의 편을 들어 주는 소신 없는 정치인에 관한 것이다.
한때 언론인들이 정치인의 애완견(lap dog)이었다면 이제는 공격견(attack dog)으로 바뀌었다. 정치 스캔들은 가장 빠른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CNN, MSNBC 등 24시간 뉴스 채널의 등장으로 뉴스 사이클의 속도가 더욱더 빨라지는 마당에 정치 스캔들의 진실 여부를 정확히 확인할 때까지 보도나 공격을 보류하기가 점차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념적 성향 다르다는 이유, 정치인·공인 벼랑으로 몰아세우고 나락에 빠뜨려
예를 들어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이 사건은 토요일 저녁에 인터넷에 떴으나 일요일 아침에 방송사 토크쇼들이 이를 보도했고, 월요일에는 <워싱턴포스트> 1면에 실렸다. 그 후 며칠 사이에 온갖 소문과 확인되지 않은 주장들이 신문과 방송 뉴스를 도배질했다.
스캔들이 발생한 첫 2주 동안 주요 뉴스 미디어들이 인용한 취재원을 분석한 조사에 의하면 기사들의 단 1%만이 두 개 이상 실명의 독립적인 정보원에 의한 기사였다. 그리고 25%는 단일 실명 정보원에 근거했다. 나머지 74%는 익명 정보원이거나 정보의 출처를 모호하게 기술했는데, 예를 들면 “오늘 한 정보원은 본사에…라고 알려 왔다”는 식이다.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은 몇 개월 동안 연일 톱뉴스로 신문을 장식했는데, 이들 보도는 주로 부정적이었다. 기자들도 클린턴을 공격하는 데 참여했지만 주로 다른 정보원을 동원하여 클린턴을 공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공격 저널리즘의 유형은 자주 나타나고 있다.
정권이나 언론사가 지향하는 사시에 따라 언론의 환경 감시 기능 또는 상관 조정 기능의 잣대가 다르고 심지어 이념적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정치인 또는 공인을 벼랑으로 몰아세우거나 나락에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
국내 보수 신문들, 정권에 따라 공격 저널리즘 선택적 활용
국내에선 이명박 정부 시절 검찰이 시국사범으로 기소한 인터넷 논객인 미네르바, 강기갑 통합진보당 대표, 정연주 KBS 사장, 시국선언 교사들, MBC <PD수첩> PD 등 제작자들이 줄줄이 무죄 판결을 받자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 신문사들은 합세해 “좌파 판사들이 사법부를 망치고 있다”며 법원과 해당 판사를 맹비난하고 나선 것은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평소 이들 3대 보수 신문사들이 “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 온 것과는 달리 신문사들이 지향하는 보수적 이념 성향과 다르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범죄자’로 몰아세우는가 하면 “존중해야 한다”던 법원의 판결을 공격한 보도 행태는 공격 저널리즘의 전형으로 꼽을 만하다.
그런가 하면 이들 보수 신문사들은 노무현 정부 5년 임기 내내 대통령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며 공격적인 보도 자세를 견지한 데 이어 대통령 퇴임 이후 시민으로 돌아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순간까지도 적대적 보도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 이들 보수 신문들은 정권에 대한 공격적인 보도 태도가 완전히 반대로 뒤바뀌게 된다. 공격견에서 애완견으로 돌아선 것이다. 공격 저널리즘은 이처럼 언론사의 이념적 성향과 추구하는 목표 등에 따라 선택적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 글은 필자가 저술한 <선거보도의 열 가지 편향(커뮤니케이션북스, 2015)> 중 일부를 시의성 있게 수정·보완한 기사임.
/박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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