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우익수’ 이진영①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야구부는 1968년 창단 이후 약관(弱冠)에 이르는 1987년까지 전국규모 대회에서 놀라운 성적(우승 13회, 준우승 8회)을 거둔다. 땀에 흠뻑 젖은 선수들이 경기 때마다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명승부는 군산을 ‘야구의 도시’로 만들었고, 암울한 세태와 지역 차별화 정책으로 실의에 빠진 시민들에게 위로와 감격, 희망을 안겨줬다.
힘든 삶의 탈출구이자 신선한 청량제 역할을 했던 연이은 승전보. 그러나 1986년 황금사자기 우승 이후 10년이 되도록 그 승전보는 날아들지 않는다. ‘역전의 명수도 이젠 끝났다’는 자조 석인 넋두리와 함께 ‘야구부 해체설’이 나돌았다. 1987년~1995년 성적(준우승 5회)은 우승에 목마른 사람들을 더욱 갈증 나게 하였다. 그럼에도 뜻있는 시민과 동문회는 지원과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역전의 명수들은 시민의 간곡한 염원을 저버리지 않았다. 선수들이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1996년 8월 뙤약볕 아래에서 봉황대기 정상을 차지한 것.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로 물들고, 시민들은 10년 만에 맛보는 우승의 감격을 만끽했다. 당시 군산상고 1년생으로 매 게임 1번 타자로 기용되며 모교의 우승을 견인했던 이진영 LG트윈스 주장을 만나봤다. - 기자 말
이진영 선수가 남긴 빛나는 기록들

‘국민 우익수’ 이진영(34). 그는 군산초-군산남중-군산상고 졸업했다. 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 SK 와이번스(2000~2008년) 거쳐 2009년부터 LG트윈스 중심타자로 활약하고 있다. 2014 신년하례식에서 주장(캡틴)으로 선출되기도. 그의 인기는 LG구단에서 ‘이진영’이 들어간 ‘캡틴 유니폼’을 출시할 정도다. 고향 팬들에게는 ‘군산의 아들’로 불린다.
프로통산(1999~2013년, 2014년 기록 미포함) 1610경기에 출전해서 5346타수 1625안타(2루타 277개, 3루타 27개, 홈런 139개) 733타점, 777득점을 기록, 통산타율 9위(0.304) 기록했다. 도루도 102개 성공했다. 2002년 3루타 8개, 2003년 6개로 2년 연속 3루타 부문 1위 차지했다. 프로야구 15시즌 중 9시즌을 3할대 타율로 장식, 타격왕 상위 10위에 여섯 번 올랐다.
지난 2003년 플레이오프 당시 MVP에 선정됐다. 2004년 골든글러브(외야수 부문) 수상으로 수비력을 인정받았다. 2005년 7월 MVP(타자 부문), 2006년 올스타전에서 사랑의 골든글러브 영예를 안기도 했다. 2006년, 2008년 프로야구 올스타전 동군 대표로 활약했다, 2007년 타율 3할 5푼, 2008년 3할 1푼 5리를 기록하며 2년 연속 SK와이번스의 정규 시즌 1위와 한국시리즈 우승에 이바지했다.
세계 프로야구 선수들이 겨루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3회 연속(2006년 4강, 2009년 준우승, 2013년 1라운드 탈락) 출전했다. 2006년 제1회 WBC에서 4강 신화 이끌었고, 병역을 면제받았다. 제15회 도하아시안게임 동메달 획득에 일조했다.
제29회 베이징올림픽 대표선수로 뽑혀 준결승전(한국-일본) 7회 말 1-2로 밀리는 상황에서 동점 적시타를 날리는 등 금메달을 견인했다. 당시 금메달은 남자 단체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KBO는 역사적인 쾌거를 기념하기 위해 쿠바와 결승전 열린 8월 23일을 ‘야구의 날’로 정했다.
제1회 WBC 일본전 1라운드 4회 말 2사 만루상황에서 니시오카 씨요시의 안타성 타구를 멋진 다이빙 캐치로 잡아내고, 2라운드에서 사토자키의 우전 안타를 잡아 정확하게 송구, 3루를 돌아 홈으로 돌진하는 2루 주자 이와무라를 잡아내며 ‘국민 우익수’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현역 선수 중 가장 큰 헬멧을 쓴다고 해서 ‘대갈장군’으로도 불린다.
2012년 10월 1일 잠실구장(LG-삼성) 경기 1회 말 첫 타석에서 삼성 선발 정인욱을 상대로 우전 안타를 날려 통산 1500안타 고지에 오른다. 전날 15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으니 매게임 안타를 기록한 셈. 1500안타 기록은 역대 19번째, 현역선수로는 9번째였다. 1000안타 기록은 2008년 5월 20일 제주(SK-넥센) 경기에서 작성했다.
프로 16년 차. 지난 7월 16일 잠실구장(LG-삼성) 경기에서 역대 21번째로 통산 2500루타 달성했다. 첫 루타는 1999년 5월 12일(쌍방울-두산) 데뷔 두 번째 경기에서 기록했다. 이후 2008년 5월 10일(SK-삼성) 1500루타, 2011년 7월 5일(LG-한화) 2000루타 달성했다. 2002년부터 4년 연속 200루타, 15시즌(2000~2014) 연속 세 자릿수 루타 기록 작성하는 등 꾸준한 활약 보였다. 한 시즌 최다 루타는 2003년 작성한 250루타, 한 경기 최다 루타는 2005년 8월 6일(SK-KIA) 기록한 14루타(홈런 3개, 2루타 1개)이다.
그는 2013시즌 106경기에 출전해서 타율 3할 2푼 9리 기록하며 타격 3위에 올랐고, 62타점 41득점으로 11년 만에 LG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다. 2014년 성적은 3월 30일 시즌 첫 만루 홈런을 시작으로 전반기 마지막 경기가 끝난(2014년) 7월 16일 현재 타율 3할 5푼(홈런 6개, 47타점)으로 팀에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급우들과 아름다운 추억 없는 게 가장 아쉬워”

이진영(李晋暎)은 1980년 초여름 전북 군산시 신흥동에서 큰아들(2남)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이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가정교육도 철저히 받았다. 엄한 가정교육 영향으로 항상 과묵했으며 어른을 깍듯이 대했다. 1987년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내성적인 성격에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
“저는 친구 어머니가 운전하는 승용차도 미안해서 못 탈 정도로 내성적이었죠. 114 누나(안내원)들 대하기 민망해서 전화도 못 하고…, 그래서 치킨이나 자장면을 못 먹을 때도 있었어요. 먹고 싶으면 어머니에게 시켜달라고 해서 먹었는데, 어머니가 짜증내시면 꿍꿍 앓으면서 참았거든요(웃음).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몽니 부리는 선배에게 ‘맞짱’ 뜨자고 대시해서 화해할 정도로 용기도 있었는데···. 결국 프로에 들어와 ‘말발’도 생겨나고 자연스럽게 바뀐 것 같습니다.”
야구 배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특별활동을 통해 손에 쥐기 시작한다. 야구부에 들어가야겠다는 자신의 강력한 의사 표시와 함께 야구에 적합한 체격 조건을 갖춘 그를 눈여겨본 야구부 감독(강병원씨)이 집으로 찾아와 부모들을 설득한 것. 첫 포지션은 투수. 학창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격려는 군산상고 에이스와 국가대표를 거쳐 오늘의 이진영이 있기까지 큰 힘이 됐다.
야구 꿈나무 이진영의 롤 모델은 당시 전북 연고팀 쌍방울 레이더스 거포 김기태 선수와 해태 타이거즈 김성한 선수. 그들이 TV 화면에서 호쾌한 장타를 날리거나 홈런을 치고 다이아몬드 도는 모습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하얀 구름 위로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두 선수를 향한 동경심은 ‘나도 선배들처럼 훌륭한 프로야구 선수가 돼야겠다!’는 다짐과 기본기 훈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고된 연습에 짜증도 나련만 야구가 이상하리만치 재미있었단다. 연습게임이지만, 상대 타자의 안타성 타구를 잡아내거나 장타를 날렸을 때 성취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었다. 학창시절 교우관계에 대해 그는 “눈만 뜨면 연습하고, 시합에 대비하느라 급우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다”며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될만한 시간이 없었던 게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덧붙였다.
“환영 카퍼레이드할 때는 대통령 된 기분”

그는 1996년 군산남중 졸업하고 군산상고(야구부 28기)에 진학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나창기 감독을 만난 것. 군산상고 야구부 2기인 나 감독은 덕장(德將)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역전의 명수 중 맏형이다. 2003년부터 호원대학교 야구부 사령탑 맡고 있는 나창기 감독의 회고를 들어본다.
“진영이는 군산남중 3학년 때부터 팀을 이끌어갈 재목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죠. 남중은 (군산)상고와 담을 경계로 이웃하고 있었는데, 가끔 공이 운동장으로 넘어오는 거예요. 연습이라고 하지만 힘이 대단하다 싶어 하루는 어느 놈이 친 공이냐고 물었더니 이진영 선수라고 하는 겁니다. 이듬해 군산상고에 입학했을 때 테스트를 거쳐 1번 타자로 기용했죠. 발이 빠른 데다 어깨 힘이 좋고, 송구가 정확해서 투수와 외야수를 오갔습니다.”
나 감독의 지도를 받은 역전의 명수들은 1996년 여름 초록 봉황을 가슴에 품는다. 그해 8월 21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제26회 봉황대기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군산상고-인천고)이 펼쳐졌다. 그날 3000여 명의 동문과 동향 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고, 짜임새 있는 공격을 펼쳐 인천고를 6-0으로 누르고 14년 만에 정상을 차지한 것.
군산상고는 1회 말 선두타자 이진영이 안타로 출루한 뒤 3번 김유석의 유격수 옆으로 빠지는 안타로 선취점을 올리며 기선을 제압한다. 2회 말 유강식의 센터 앞에 떨어지는 안타와 강민구의 적시타로 추가점을 올린 군산상고는 6회 무사 만루 찬스에서 정대현의 우전 안타로 2점을 더해 4점 차로 멀리 달아났다.
7회에도 이진영이 3루타를 터뜨려 우전 안타로 나간 강민구를 홈으로 불러들인 뒤 스퀴즈 번트로 추가점을 올리면서 승부를 결정짓는다. 인천고는 정대현의 호투에 막혀 3루 한 번 밟지 못하고 완봉패. 결승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역투한 정대현은 최우수선수와 우수투수상을, 타자로 맹활약한 우익수 이진영은 수훈상을 받았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낭보는 입소문을 타고 골목골목으로 퍼져나갔다. 우승에 목말라 있던 군산 시민들은 열광했고 함성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날 밤 나운동, 신창동, 개복동, 죽성동 등의 맛집 골목 식당과 대폿집들은 만원사례를 이뤘다. 이튿날, 해장으로 속을 풀고 목욕탕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침부터 야구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거리에는 선수단을 환영하는 현수막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환영, 제26회 봉황대기 군산상고 전국제패
아~ 이 기쁨 이 영광 장하다 군산상고!
역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건아들
싸웠노라! 이겼노라! 장하도다! 군산상고
왕중왕! 군산상고 봉황기 대회 우승
장하다, 군산상고 자랑스런 후배들아!
오! 금강의 아들들 군산상고 또다시 정상등극
역전의 명수들을 환영하는 군산 시민과 동문, 공공기관, 기업체 등에서 거리에 내걸었던 현수막 내용이다. 승리의 환희가 느껴지는 정겨운 글귀들. 자신의 이름이나 운영하는 업소 간판을 넣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환영이 아니라고 해서 무기명으로 내걸린 현수막도 간간이 보였다. 아래는 이진영 선수의 소회.
“야구를 시작해서 처음 경험한 전국대회 우승이라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나창기 감독님은 최선을 다해 후회 없는 경기를 치르자고 주문했고, 선수들은 기회 때마다 집중력을 발휘, 점수로 연결하며 정상을 차지했죠.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카퍼레이드할 때는 대통령 된 기분이 들더군요. (웃음) 그동안은 그냥 좋아서 했는데 그날 우승을 계기로 야구의 진정한 묘미를 체득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계속)
※ 등장 인물의 나이와 소속 직책은 2014년 6월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