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 싸움닭’ 조계현③
조계현의 진면목 보여준 봉황대기 대회

조계현은 1982년 6월 개최된 제37회 청룡기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군산상고 우승의 영광은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만큼 큰 역할을 해냈다. 결승전까지 다섯 차례 싸우는 동안 거의 완투, 실점을 최대한으로 막아낸 것. 당시 2년생으로 최우수선수상과 우수투수상을 받아 2관왕이 된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베스트를 다해 싸웠을 뿐’이라며 ‘우승은 연습의 결정체’임을 강조하였다.
그해(1982년) 8월 17일 잠실구장에서 야간경기로 펼쳐진 제12회 봉황대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준결승(군산상고-대구고)에서 조계현은 기록적인 삼진 18개를 빼앗으며 대구고 강타선을 산발 5안타로 잠재운다. 그리고 5회 초 3번 백인호가 결승 2점 홈런을 터뜨려 4-1로 승리한다. 군산상고는 이 대회 처음으로 8강 고지를 점령한다.
당시 어느 언론은 “키 1m 78cm에 몸무게 73kg의 체구를 모두 활용하는 힘찬 투구에 싱커와 슬라이더가 주 무기인 조계현은 과연 뛰어난 투수였다”며 “대구고 강타자들로부터 삼진을 무려 18개나 뺏으며 군산상고를 4강 고지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계현은 이날의 활약만으로도 고교 최고 투수라는 찬사를 받기에 족했다”고 평가했다.
그해 8월 21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결승전(군산상고-제일동포)에서 군산상고는 태풍의 눈이었던 제일동포를 4-1로 누르고 대망의 초록 봉황대기를 안았다. 이날 군산상고는 초반에 상대의 결정적인 실책 2개로 2점을 얻어 7회까지 2-1 리드를 지키다가 8회 말 2점을 추가함으로써 4-1로 승리 처음으로 봉황대기 정상에 오른다.
결승전까지 6게임을 치른 군산상고가 얻은 득점이 33점임에 비해 실점은 7점이었다. 이것은 조계현 투수의 위력을 말해주는 기록으로 6게임 모두 완투하지는 않았지만, 37과 2/3를 던져 실점 4, 자책점 3을 마크, 방어율 0.72의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따라서 군산상고의 봉황대기 우승은 조계현의 진면목을 보여준 화려한 퍼포먼스나 다름없었다.
이에 조계현 감독은 공(功)을 자신에게만 돌리는 것은 무리라며 손을 저었다. 그는 “백기성 감독의 탁월한 용병술과 지략, 그리고 선수 모두가 뛰어난 공격력과 수비력을 겸비하고 있었기에 우승할 수 있었다”며 백 감독을 떠올렸다.
“백기성 감독님은 서울 배문고를 졸업하고 한일은행에 있다가 서른세 살 때 군산상고로 오셨는데, 사납게 가르쳤습니다. 전략도 좋았어요.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팀플레이와 수비를 완벽하게 만드신 분이죠. 아침 7시 40분에 등교하면 연습, 연습, 밥 먹고 연습···. 밤늦어서야 집에 들어갔으니 선수들의 하루는 그야말로 야구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훈련은 혹독했지만, 껍데기를 벗는다는 각오로 임했기에 그해 2관왕도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조계현 감독은 “훈련 중 맞기도 많이 맞았다”며 “백기성 감독은 끈질긴 집념의 지도자로 선수들을 ‘악바리’로 만든 분이었고, 평소 ‘군산상고 야구는 군산 시민의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군산을 사랑하는 분이었다”고 덧붙였다.
구수갑 감독에 대한 오해, 32년 만에 풀려

1982년. 그해 고교야구 2관왕과 함께 ‘역전의 명수’ 전통을 화려하게 부활시킨 조계현. 그는 휴식을 즐길 사이도 없이 일본 오사카(大阪) 구장에서 열리는 한·일 고교야구 올스타전(8월 27~29)에 출전한다. 그리고 3게임 연속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 투수로 등판, 한국 선발팀(감독 구수갑) 승리(2승 1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국치일(國恥日)을 하루 앞둔 28일(2차전) 경기 때 한국은 7회까지 1-3으로 끌려가다가 8회 말 조계현이 2타점 우월 3루타를 날려 동점을 만든다. 그에 힘입어 한국은 집중 안타로 3점을 추가 6-3으로 역전승을 거둔다. 이때 TV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애국자!’라며 환호와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다. 그런가 하면 무리한 등판을 우려하는 사람도 상당수였다.
9월이 되자 시민을 분노케 하는 일이 일어났다. ‘구수갑(당시 경북고 감독)이 계획적으로 조계현을 매게임 등판시켜 팔꿈치 부상을 당하게 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진 것. ‘일본 원정 게임에서 팔꿈치 균열로 투수 생명이 위험하다.’ ‘조계현 마운드 못 선 군상, 8강도 못 가 침몰’ 등 조계현 부상 관련 신문보도는 시민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다. 이에 조 감독은 사실과 다르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세 게임 등판은 맞지만, 구수갑 감독 의도가 아니라 제가 자원해서 던졌습니다. 봉황대기 대회 끝나고 피곤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지만 워낙 지기 싫어하는 성미에 특히 일본이라서 위기 때마다 등판시켜달라고 말씀드렸죠. 구수갑 감독이 나쁜 마음을 먹고 저를 혹사했다고 욕을 많이 얻어먹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시민들의 오해가 풀렸으면 좋겠네요.”
조계현 감독의 당시 상황설명은 ‘혹사’당한 게 아니라 승부욕을 억제하지 못한 ‘자업자득’이었다는 것으로, 32년이 지나도록 기자의 가슴에 앙금으로 남아있던 오해까지 말끔히 풀어주었다.
가장 아쉬웠던 경기는 1985년 대륙간컵 결승전

팔꿈치 부상으로 미래가 불투명했던 조계현은 졸업을 앞두고 해태 타이거즈, 동국대, 원광대 등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해태 타이거즈 김응용 감독과 백기성 코치는 학교까지 찾아왔다. 그럼에도 교육열이 남달랐던 부모의 권유와 훌륭한 투수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84년 연세대에 입학한다.
그는 1984춘계 대학야구연맹전 3일째 경기(연세대-경남대)에서 34타자를 상대로 삼진 7개를 빼앗으며 첫 완투승(4-1)을 기록한다. 1986년 대학야구 봄철리그에서는 우익수로 나서 2회와 8회 홈런을 날린다. 이날 경기는 6회 초 장호익의 만루 홈런까지 가세 고려대를 8-2로 꺾는다. 이날 조계현은 1-2로 뒤져있던 3회 1사 후부터 등판 무실점으로 막으며 호투했다. 이렇듯 그는 팔꿈치 상처에도 불구하고 대학 시절 ‘팔방미인’으로 통한다.
1985년 캐나다에서 개최된 대륙간컵 세계야구대회에서 한국이 준우승하는데 견인차 역할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대학 시절 야구를 제대로 못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특히 대륙간컵 결승전(한국-쿠바)을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아쉬웠던 경기로 꼽았다. 당시 한국은 조계현의 호투로 5회까지 3-1로 앞섰으나 6회와 8회 수비 실책으로 결승점을 내줘 3-4로 분패했다.
어느 야구 전문가는 아마야구의 메카 백호기 야구대회 1988년 판도를 가늠하면서 “지난해까지 크게 활약했던 조계현·장호익 황금 콤비의 졸업으로 전력에 큰 구멍이 생긴 연세대는 중위권 진출도 힘겨운 상태”라고 분석했다. 이는 조계현·장호익 배터리가 연세대 시절 얼마나 비중 있는 선수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대한야구협회는 1988년 9월 초 88서울올림픽에 출전할 야구(시범종목) 한국대표팀 최종 엔트리 23명을 발표한다. 그중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조계현과 손발을 맞춰온 장호익이 빠져 있었다. 이에 화가 난 조계현이 야구협회를 찾아가 “장호익이 있어야 내가 공을 던질 수 있는데 왜 빼느냐, 장호익을 빼려면 나도 제외해달라”고 항의 합류시켰던 일화는 유명하다.
두 평 남짓의 마운드에서 인생 배워

싸움닭 조계현은 1989년 3월 5일 해태 타이거즈에 합류한다. 그해 4월 9일 광주구장(해태-빙그레) 개막전에서 빛나는 투구를 선보인다. 4월 20일 대구구장(해태-삼성) 경기에서 에이스 선동열이 7-0으로 크게 이기던 5회에 5실점을 당했으나 6회에 등판한 조계현의 깔끔한 마무리로 승리투수가 된다. 데뷔 첫해 성적은 7승 9패,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10월 한국시리즈 3차전(해태-빙그레)에서 승리투수(4-1)가 되면서 해태 우승을 견인한다.
선동열의 어깨 건초염과 롯데의 상승세에 밀려 1992년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 해태는 절치부심, 1993시즌을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선발이었던 선동열을 전문 마무리로 돌리고, 조계현을 붙박이 선발로 기용한다. 시즌이 시작되자 조계현은 구단이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17승을 거두고 1994년에는 자신의 최다승인 18승을 달성하면서 선발로 자리를 굳힌다.
1996년 8월 11일 광주구장(해태-롯데) 경기에서 삼진 7개를 솎아내고 3안타 1실점으로 완투승을 거두며 12연승 기록을 세운다. 그해 성적은 27경기에 출전 16승(완투승 11개, 완봉승 3개) 7패 방어율 2.07을 마크한다. 그는 선동열, 김성한이 없는 해태가 프로야구 사상 한국시리즈 8번째 우승의 일등공신이 된다. 그럼에도 1997년 시즌이 끝나고 이순철과 함께 삼성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된다. 아래는 조 감독의 소회.
“1997시즌이 끝나자 이강철과 저를 묶어서 엘지 이상훈과 트레이드한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그해 제 성적이 8승 9패이지만 이강철하고 저는 100승을 넘게 한 투수들이고 이상훈은 40~50승에 불과한데 묶어서 2대 1로 트레이드한다는 말에 열 받아서 제가 먼저 보내달라고 했죠. 그때 해태를 떠나면서 제 야구인생도 ‘하향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하향길···.”
두 평 남짓의 마운드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싸움닭 조계현. “투수는 투지와 배짱 자신감으로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는 그에게 선수들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느냐고 묻자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옛날과는 사람이 달라지고, 사회가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야구 지도도 옛날 방식으로는 선수들과 커뮤니티 형성이 어렵습니다. 문제점을 발견해도 선수들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찾아 긁어준 뒤 지적해야 공감하지, 옛날처럼 군림하려고 하면 고리타분하다는 소리 듣죠. 다시 말해 지도자(감독)는 군림이 아니라 선수들과 동행하면서 지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한 지도자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LG 챔피언스 파크’에서 나오는데 조계현 감독의 지도 이념 중 “지도자는 군림이 아니라 선수들과 동행하면서 지도해야 한다”는 대목이 귓가를 맴돌았다. (조계현 편, 끝)
※ 등장인물 나이와 소속은 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