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우익수’ 이진영②

2년 연속 청소년 대표로 출전, 모교에 영광 안겨

캐나다 멍크턴시 해변에서 나창기 감독과 이진영 선수(1997년)
캐나다 멍크턴시 해변에서 나창기 감독과 이진영 선수(1997년)

1학년 내내 지각 한 번 안 하고 학교와 집만 오가며 기본기 다지기에 몰두했던 이진영. 그는 1997년 여름 캐나다에서 개최되는 제17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한국대표 선수로 선발된다. 군산상고 2학년 때 일이었다.

“제17회 세계청소년야구대회 한국대표팀 감독을 제가 맡았었죠. 선수 18명 중 군산상고 출신은 이진영(2학년) 한 명뿐이었습니다. 대한야구협회는 2학년이라 곤란하다고 했지만, 강력히 추천했죠.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려면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타력·수비력 등)을 거두는 것은 물론 품성과 기본기를 충실히 갖춰야 하는데, (이)진영이만한 외야수가 없었거든요.”

1991년부터 2002년까지 군산상고 사령탑을 맡았던 나창기 호원대 야구감독 회고다. 그는 “당시 청소년 국가대표팀은 고교 3학년과 대학 1학년 선수 중심으로 구성됐다”면서 “진영이는 나이만 어릴 뿐, 성적이나 기량은 대학생 선수들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고 부연하였다.

나 감독 말처럼 선배들을 제치고 국제대회에 처음 출전한 이진영은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듯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살림꾼 역할을 해내며 도루왕 타이틀을 따낸다.

1997년 세계청소년야구대회(8월 8일~17일)는 캐나다 항구도시 멍크턴시에서 개최됐다. 예선성적 4승 1패로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한 한국은 15일 미국에 패해 4강 진출이 좌절된다. 이튿날 열린 베네수엘라와의 5~6위 진출전은 이진영이 홈런을 포함, 5타수 3안타의 맹타를 휘두르는 등 소나기 안타를 퍼부어 7회 콜드게임승(18-1)을 거둔다. 17일 벌어진 5~6위 결정전에서는 한국이 브라질을 5-0으로 누르고 5위에 오른다.

당시 대회 통산타율 1위(5할)와 네 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린 봉중근(신일고)은 우승팀 쿠바 선수들을 제치고 한국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대회 최우수선수상(MVP)을 차지하였고 이진영은 도루상을 수상하였다.

이진영은 1998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개최된 제3회 아시아 청소년야구대회(9월 4일~13일)에도 출전, 2년 연속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는 대회 마지막 날 고시엔(甲子園) 구장에서 벌어진 3~4위 결정전 2회에 2점짜리 그라운드홈런을 날리는 등 중국을 7회 콜드게임(20-2)으로 물리치고 3위를 차지하는 데 일조한다. 또한, ‘베스트 9’에 들어 개인의 영예와 함께 모교에 영광을 안긴다.

그해 가을에는 제주도 일원에서 개최된 제79회 전국체육대회(9월 25~10월 1일)에서 군산상고를 우승으로 이끈 주인공이 된다. 김상현(SK) 이승호(NC) 이대수(SK) 등이 당시 함께 뛰었던 선수들. 이진영은 “누구나 학창시절을 그리워하듯 나도 가끔 그립다. 훈련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프로와는 다른 순수한 열정이 있었다”며 “어쩌다 ‘군산상고’ 관련 뉴스나 신문을 보면 꼼꼼하게 읽는 편”이라며 추억을 떠올렸다.

군산상고 졸업 후 곧바로 프로 선택

1998년 전국체전 수상식에서 악수하는 이진영 선수
1998년 전국체전 수상식에서 악수하는 이진영 선수

이진영은 군산상고 시절 봉황대기 대회와 전국체전 우승에 큰 공을 세운다. 국제대회에서도 빼어난 실력을 발휘, 타력·수비력·주력 등을 두루 갖춘 유망주로 인정받는다. 각종 대회에서 보여준 뛰어난 재능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름방학 끝나기 무섭게 전북 지역 연고팀인 쌍방울 레이더스와 전국 유명 대학에서 스타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아래는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가 군산상고 이진영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소개한 신문 기사이다.

“연고 지역 고교야구 저변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쌍방울은 공·수·주 3박자를 갖춘 군산상고 외야수 이진영 외엔 대안이 없다고 판단,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1998년 9월 23일 자 <경향신문>)

“쌍방울 레이더스는 16일 신인지명 1차 1순위로 뽑은 군산상고 외야수 이진영과 계약금 1억 원, 연봉 2천만 원에 계약했다.”-(1998년 11월 17일 자 <한겨레>)

지방의 고교 야구선수들은 대부분 서울의 명문대학 진학과 가슴에 태극마크를 다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도 이진영은 곧바로 프로를 택했다. 전북 연고팀 1차 지명을 받았다고 하지만, ‘대학 포기하고 프로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지’ ‘후회가 안 되는지’ 궁금했다. 그는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3학년 여름방학 앞두고 연세대와 건국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었죠. 대학이냐 프로냐, 갈등이 있었지만 쉽게 결정 내렸습니다. 훌륭한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거든요. 그래서 대학보다는 내가 필요한 팀, 즉 지명하는 구단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님들이 모 대학팀 야구부장과 식사도 하고 봉투(스카우트비)도 받았다고 하시기에 돌려드리라고 했죠. 지금 생각해도 그때 선택이 옳았다고 봅니다.”

쌍방울 마지막 시즌 함께한 신인 선수

쌍방울 시절 동료들과 훈련하는 이진영 선수(맨 왼쪽)
쌍방울 시절 동료들과 훈련하는 이진영 선수(맨 왼쪽)

고교 시절 외야수와 시속 140km대 중후반의 직구를 뿌리는 좌완투수로 주목을 받은 이진영은 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 타자로 전향한다. 프로입단 첫해 성적은 65경기에 출전 190타수 49안타(타율 2할 5푼 8리) 13타점 홈런 4개.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쌍방울의 마지막 연고 지역 1차 지명 대상자이자 최후의 신인 선수이기도 하다.

“솔직히 투수보다 타자가 성향에 맞고 성적도 좋았습니다, 프로(쌍방울)에서 처음 만난 김성근 감독께서 부상인 저를 한두 달 테스트해 보더니 타자를 하라고 권하셔서 타자(외야수)로 활약했죠. 입단 당시에는 최고 구속 150km/h에 이르는 빠른 볼이 주 무기였거든요. 김 감독님도 투수로 쓸지 야수로 쓸지 마지막까지 고민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쌍방울은 외환위기(IMF) 후폭풍으로 재정이 열악했어요. 연습 때 부러진 방망이를 모아 드럼통에 불을 지피고 동계훈련을 하고, 경기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거든요. 미래가 불투명하니까 계획을 짜기보다 불안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결국, 쌍방울은 1999시즌을 끝으로 해체되고 SK 그룹으로 넘어갔죠. 저도 2000시즌부터 신생팀 SK 와이번스 선수로 뛰었습니다.”

SK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이진영은 슬럼프에 빠진다. 2000시즌 통산 안타 72개(2할 4푼 7리), 2001시즌 90개(2할 8푼) 등 2년 연속 두 자릿수 안타를 기록한 것. 그러나 2002시즌이 시작되면서 타력이 살아나기 시작, 매년 세 자릿수 안타와 3할대 타율을 유지하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MVP 차지

시즌 초부터 불붙기 시작한 이진영의 방망이는 거침없이 타올랐다. 그는 2002시즌 통산 타율 3할 0푼 8리로 SK에서 수위타자를 차지한다. 2003시즌에는 타율 3할 2푼 8리(5위), 안타 158개(4위), 2루타 29개(5위), 3루타 6개(1위), 홈런 17개 등 공격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상위권 성적을 기록하며 SK의 정규리그 4위와 플레이오프 진출에 1등 공신이 된다.

2003년 10월 12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3차전(SK-KIA). 창단 이후 처음으로 만원 관중이 들어찬 홈구장에서 그는 선제 2점 홈런을 포함, 4타수 3안타로 팀을 승리(10-4)로 이끌면서 대망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 짓는다. 정규리그 4위 팀이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5연승으로 끝낸 것은 1990년 삼성 이후 SK가 두 번째였다.

시즌 중반까지 타격왕 경쟁을 벌이다 막판 체력이 떨어져 타격 5위(0.328)로 마감한 그는 KIA와의 플레이오프 3경기에서 고교대회에서조차 나오기 힘든 기록을 작성, SK 관계자들로부터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럴 만도 했다. 무려 10타수 8안타(8할)의 맹타를 휘두르며 플레이오프 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은 것.

2003 한국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현대가 4승 3패로 우승을 차지한다. 1차전에서 패하고 2차전 승리로 기세가 오른 SK는 3차전 초반 연속안타를 맞으며 0-2로 끌려갔으나 3회 2사 1루 때 타잔처럼 등장한 이진영의 동점 홈런에 힘입어 5-3으로 승리한다. 그는 6차전에서도 3회에 오른쪽 담장을 넘기는 2점 홈런을 날리며 2-0 승리로 이끄는 등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한다.

그 후 이진영은 안정된 수비와 강력한 타력을 보여주며 박경환·이호준 등과 더불어 SK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한다. 2004시즌에도 4할을 웃도는 높은 타율을 오랫동안 유지했으나 정규리그가 끝날 때까지는 지키지 못했다. 결국, 그해 타격왕 현대 브룸바(0.343)에게 1리 뒤진 3할 4푼 2리(타격 2위)로 시즌을 마쳐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계속)

※ 등장 인물의 나이와 소속 직책은 2014년 6월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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