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수철 군산상고 감독②
사상 첫 올림픽 본선... 그리고 쌍방울과의 인연
석수철은 성균관대 4학년(1995) 때 조성민(고려대), 임선동, 이정길(이상 연세대), 차명주(한양대) 투수를 비롯해 포수 최기문(원광대), 내야수 김종국, 홍원기(이상 고려대), 박재홍(연세대), 외야수 강영수(연세대) 등과 함께 대학선수 10걸에 든다. 1996애틀랜타 올림픽 본선 티켓이 걸린 제18회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앞둔 시기였다.
대부분 국가대표팀 멤버인 이들은 프로팀의 1차 스카우트 대상자로 1996애틀랜타 올림픽 본선 출전자격 획득 여부에 따라 영향 받는 상황이었다. 그중 일본 진출을 결정한 조성민과 프로야구 해태 입단이 확실시되는 김종국, 쌍방울 레이더스로 굳힌 석수철 외에는 진로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해 9월18일 일본 구라시키 마스카트 구장에서 벌어진 예선리그 1차전에서 한국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준우승팀 대만을 상대로 석수철의 2루타 등 장단 15안타를 몰아치며 8회 콜드게임승(15-5)을 거둔다. 첫 경기에서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한국은 19일 열린 2차전에서도 활발한 타격을 보여주며 허약한 태국 마운드를 맹폭한다. 결과는 7회 콜드게임(27-0) 제압이었다.
대회 최종일이었던 1995년 9월 23일. 구라시키 마스카트 경기장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결승리그에서 한국은 1회말 한 점 내주고 5회 초 조경환의 투런 홈런으로 2-1 박빙의 리드를 지키다가 9회말 일본에 두 점을 내주면서 2-3 역전패, 아시아 정상의 문턱에서 아깝게 주저앉는다. 그러나 한국은 이 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본선 진출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프로야구 쌍방울은 12일 96년 1차 지명 신인 석수철과 총액 1억 7천만 원(계약금 1억 5천만 원·연봉 2천만 원)에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군산상고-성균관대 출신으로 1m 78, 73kg인 석수철은 지난 9월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2루수로 출전, 애틀랜타 올림픽 티켓을 따내는 데 기여했다.” - <경향신문> 1995년 12월 13일 기사
대학 시절 안정된 수비와 짜임새 있는 공격력 보여줬던 석수철은 팬들의 기대 속에 ‘떠오르는 샛별’로 평가받으며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한다. 그해 프로로 진출한 신인은 모두 106명. 그중 억대 계약자는 42명이었다. 그나마 시즌 앞두고 열린 시범경기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은 선수는 석수철을 비롯해 한화의 홍원기, 임수민 등 10여 명에 불과했다.
1996년 3월 31일, 그해 프로야구 시범경기(쌍방울-한화) 열리는 청주구장. 쌍방울은 4회 구원 에이스 조규제가 3점 홈런을 허용하는 등 마운드가 난조에 빠져 불안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1-4로 뒤진 7회에 석수철의 싹쓸이 3타점 2루타 등 7안타를 집중시키면서 7득점, 단숨에 8-4로 뒤집는다. 이날 경기는 쌍방울이 8-7 재역전승을 거뒀다.

시범경기에서 맹타 휘두르며 타력을 인정받은 석수철은 1996년 통산 114경기에 출장, 289타수 77안타(0.266)에 2루타 16개, 3루타 1개, 홈런 3개, 32타점을 기록한다. 그는 그해 신인왕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6월에는 3할 넘는 타율로 팀의 8연승을 견인하고,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일조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준다. ‘석수철’ 이름 석 자를 연호하는 팬도 생겨났다.
1990년 창단한 쌍방울은 매년 하위권에 머물렀다. 1996년에는 설상가상으로 구단 매각설까지 나돌았다. 그뿐 아니었다. 시즌 초 중심타자 김기태의 부상으로 5연패의 치명타를 입으며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럼에도 승부사 김성근 감독의 용병술과 신인들의 신들린 플레이로 그해 정규시즌 2위를 차지하여 창단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다.
가장 가슴 아팠던 1996 플레이오프 4차전
쌍방울은 그해 돌풍을 일으키며 1996플레이오프에 직행한다. 1차전(쌍방울-현대)은 10월 7일 전주에서 열렸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군산은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쌍방울의 꼴찌행진에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사촌격인 해태를 응원하던 사람들도 술자리에서 쌍방울의 선전을 화두로 삼았다. 당시 만년 꼴찌팀 쌍방울의 선전은 전북 도민에게 운동 경기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
플레이오프 1차전 열리는 전주구장은 경기 시작 3시간 전부터 표가 매진, 전북 팬들의 뜨거운 열기를 반영했다. 그들의 소망은 내친김에 현대를 누르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팬들의 열기 때문인 듯 한국시리즈가 아님에도 유종근 당시 도지사가 1차전에 나와 시구했고, 경찰력도 여타지역보다 많이 지원했다.

쌍방울은 팬들의 응원에 화답하듯 1, 2차전 모두 승리로 장식한다. 그러나 내리 3연패를 당해 대망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 특히 5차전은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팽팽한 투수전을 펼치다 4회와 5회 초 각 1점씩 내줘 0-2로 뒤진 상황에서 5회 말 선두타자 석수철이 좌전안타가 터졌다. 그가 1루에 진루하며 추격의 기회를 잡았으나 후속타 불발과 작전 실패로 무득점에 그쳤다. 7회 1사 만루 기회도 살리지 못하고 1-3으로 패한다. 아래는 석수철 감독의 소회.
“그때 쌍방울의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 원인에 대해 말이 많았습니다. 큰 경기에 강한 에이스가 없었다는 의견, 투수 로테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견, 선수들의 타격 부진을 꼽는 사람도 있었죠. 그러나 저는 4차전(인천 경기)을 잊지 못합니다. 8회 말 3루 쪽으로 굴러오는 평범한 땅볼을 제가 놓치는 실책을 범하고, 그 실책이 안타로 이어져 2-4로 패했거든요. 그 4차전이 평생에 가장 가슴 아팠던 경기로 남습니다.”
조기은퇴 후 ‘지도자의 길’ 걸어... “야구만 가르치라면 자신 있어”

신인임에도 붙박이 내야수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던 석수철. 그는 1997년 1월 초 전년도 연봉 대비 80% 오른 3600만 원에 구단과 재계약한다. 함께 입단한 신인들 중 가장 높은 상승률이어서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호사는 거기까지였다.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환자 신세가 됐다. 결국,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엔트리에서조차 빠진다.
1997년 4월 1일, <연합뉴스>는 그해 프로팀들 전력을 점검하는 기사에서 “지난해 기적적인 페넌트레이스 2위를 차지한 쌍방울의 올해 목표는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며 “만년 꼴찌 후보 오명을 벗고 어느 팀도 쌍방울을 만만하게 보지 못하게 됐지만 빈약한 선수층으로 대변되는 객관적인 전력의 절대열세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다. 고질적인 내야 불안은 주전 3루수 석수철의 부상으로 오히려 악화됐다”고 평가했다.
석수철은 고관절 수술을 두 차례나 받고 치료 중임에도 그해 6월 1일 쌍방울-삼성 경기가 열리는 군산 월명야구장에 목발을 짚고 나왔다. 팀 동료들을 응원하는 그의 모습이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시즌 내내 부상과 사투를 벌이던 그는 쌍방울이 악조건 속에서도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그리고 복귀를 앞두고 있을 때 대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저는 선수로는 운이 지지리도 없는 것 같습니다. 복귀를 앞두고 있을 때 대만에 프로야구가 생긴다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2억 원에 계약했는데, 대만에 지진이 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됐거든요.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 남보다 먼저 지도자 생활을 하자고 마음먹고 1999년부터 성균관대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죠. 그래도 지도자 운은 좋은 것 같아요. (웃음) 해마다 우승 및 준우승을 거머쥐면서 2000년대 대학야구를 ‘성균관 시대’로 열어놨으니까요. 2009년에는 5개 대회에서 23승 1무 4패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올렸죠.
제가 대학과 고등학교 야구지도자 생활을 15년 가까이하면서 이끈 우승과 준우승을 합하면 30회 가까이 됩니다. 엄청 많은 횟수죠. 2005년 국제야구연맹(IBAF) 주최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36회 야구월드컵 준우승을 비롯해 2010년 7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5회 세계대학야구 선수권대회(4위) 등 국가대표팀 코치로도 여러 차례 선임되어 좋은 성적을 거뒀고, 그 과정에서 이기는 야구를 배웠어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야구만 가르치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미련 곰탱이’처럼 야구밖에 모르고 살아왔고, 최종 목표는 프로구단 지도자라는 석수철 군산상고 감독. 그는 “후배들 지도에 모든 역량을 쏟아 선배들이 일궈놓은 역전의 명수, 그 영광을 되찾고 더 큰 무대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며 “선수들이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석수철 편 끝)
※ 등장 인물의 나이와 소속 직책은 2014년 6월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