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관수 감독②

창단 후 처음 거머쥔 전국대회 패권... 그날의 풍경

도선장(군산-장항)에서 최관수 감독과 선수들(1970년대 중반)
도선장(군산-장항)에서 최관수 감독과 선수들(1970년대 중반)

최관수 감독은 전심전력을 다 해 선수들을 가르쳤다. 동녘 하늘이 희번하게 밝아오면 선수들보다 일찍 운동장에 나오는 등 솔선수범의 행동으로 지도했다. 직접 마운드에 올라 위력적인 볼로 타자들의 타력과 선구안을 길러주었다. 국내 실업 야구를 주름잡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선수 개개인의 소질을 계발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경기력 수준을 한층 높인다. 또한 ‘뛰어난 선수가 되기에 앞서 도리를 다하는 인간이 돼라’고 권하였다.

훗날 영화로도 만들어진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 추석날 훈련하던 선수들이 막걸리를 몰래 마시고 사고를 쳤다. 학교는 처벌하려 했으나 최 감독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선수들을 모아놓고 “내 잘못이니 나를 때리라!”며 방망이를 건넸다. 모두 머뭇거리자 “안 때리면 내가 이곳을 떠나겠다”고 경고했고, 선수들은 펑펑 울면서 ‘하늘 같은 감독님’을 때렸다. 이후 선수들은 하나로 뭉쳤고, 그 ‘끈기와 근성’으로 1971년 전국체전 정상에 오른다.

1971년 10월 12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52회 전국체전 야구고등부 결승전(군산상고-배재고) 열리는 날이었다. 전북 대표 군산상고가 서울 대표 배재고를 1-0으로 누르고 우승하는 순간 선수들과 감독은 한 덩어리가 되었다. 감격! 또 감격... 하늘도 군산상고 우승을 축하해주는 듯, 그날의 하늘은 더없이 높아 보였고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수천의 관중들은 야구의 새 역사 탄생에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한국야구 역사상 전국대회 패권을 전북 대표팀이 처음으로 차지한 날이었으니, 군산상고 우승은 그해 체전이 낳은 가장 값진 기적이었다.

게임이 종료되자 선수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최관수 감독, 김병문 전 교장, 이용일 경성고무 사장을 차례로 하늘 높이 헹가래 쳤다. 이날 새벽에 상경한 응원단 400여 명은 목이 터지라 응원하였고, 게임이 끝나자 일제히 운동장으로 뛰어내려 광란의 물결 속으로 휩쓸렸다. 군산상고 선수들이 투숙한 퇴계로 3가 동신여관은 이날 밤늦도록 축하객이 줄을 이었고 수십 통의 축전이 날아들었다. 군산과 전주에서는 속히 내려오라는 독촉 전화가 빗발쳤다.

당시 언론들은 군산상고의 전국대회 첫 우승은 서울 세와 영남 세력의 대결장이었던 한국 야구의 세력 판도를 뿌리부터 흔든 ‘태풍의 눈’이었다며 선수들의 투혼과 최 감독의 용병술을 높이 평가했다. 군산상고는 1972년 황금사자기 부산고와 결승전에서도 9회 말 대역전극을 펼치며 우승, 국내 고교야구 강팀으로 자리를 굳힌다.

최 감독이 재임한 10년 동안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로 재탄생하면서 전국규모 대회에서 놀라운 성적(우승 6회 준우승 5회)을 기록한다. 그는 군산상고뿐만 아니라 호남야구와 한국프로야구에도 커다란 행운을 안겨주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역전의 명수들이 1982년 출범한 해태타이거즈 주축을 이뤘고, 전국 각 지역에 많은 팬을 확보했다. 해태는 그 저력을 바탕으로 한국프로야구 최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파킨슨병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

군산시 죽성동 홈런세탁소(지금은 최 감독과 동업하던 분의 2세가 운영하고 있다.)
군산시 죽성동 홈런세탁소(지금은 최 감독과 동업하던 분의 2세가 운영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자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명장 최관수가 속병을 심하게 앓고 있어 머지않아 군산상고 감독직을 내려놓을 거라는 괴이한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간 것. 사임 이유는 ‘목 디스크’, 그때만 해도 생소한 병명으로 사람들은 ‘디스크’가 무슨 병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1979년, 타락했던 그해 10월이 지나고 찬바람이 목을 움츠러들게 했던 늦가을, 최관수는 급기야 군산상고 감독직을 사임한다. 시민과 팬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아래는 “최 감독을 떠나보내며, 하늘이 다 야속했다”고 말하는 이용일 전 KBO 총재 대행의 회고다.

“적당히 살살 좀 하지··· (한참 침묵하다가). 최관수 얘기는 할수록 가슴이 아파. 군산상고가 1976년 대통령배 우승하고 얼마나 있다가 기업은행 전·남북 지점대항 축구대회가 열렸지. 직원들 친목을 다지는 친선경기니까 적당히 해도 되는데, 전력으로 질주하다가 그만 철봉에 부딪혀 쓰러진 거야. 얼마 후 후유증이 나타나더군.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가니까 파킨슨병이라는 거야. 어떻게 해. 감독 10년째 되는 해(1979) 감독직에서 물러났지.”

최 감독은 군산 시민의 모금 운동과 팬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받는다. 이후 기적적인 회복을 보여 산책도 하고 부둣가로 바람도 쐬러 다녔다. 그러나 예전처럼 활동은 못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을 더듬는 등 병세는 날로 깊어갔다. 남에게 도움만 받을 수 없었던 그는 1983년 생계를 위해 군산시 죽성동에 전세 건물을 얻어 ‘홈런세탁소’를 개업한다.

최연소 국가대표 출신 명장 최관수가 제2의 삶을 시작한 홈런세탁소. 다행히 일감은 많았다. 일손이 부족할 정도였다. 군산상고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고 세탁소를 개업했다는 소문이 금강 건너 충청도 장항, 서천 지역까지 알려졌던 것. 그는 손님들이 가져온 양복에 주소와 이름이 적힌 딱지 붙이는 작업을 낙으로, 또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병마와 싸운다.

역전의 명수가 탄생하던 그 날을 잊지 못하는 최 감독. 그는 1985년 여름을 앞두고 병세가 호전되는 기미를 보이자 ‘뭔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군산상고를 찾아간다. 황금사자기 대회를 겨냥, 투수코치를 자청했던 것. 그러나 며칠 후 뙤약볕 아래에서 코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져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지역 야구인과 독지가들의 온정의 손길이 이어졌다.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성한 등 해태타이거즈 중심타자로 성장한 제자들은 하태문, 김용배, 유희명, 최병태, 나창기 등 실업팀에서 활약하는 옛 야구부 동료들과 모교 운동장에서 ‘보은경기’를 열고 사인볼을 팔아 치료비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최 감독의 병세는 깊어만 갔다.

최관수 감독은 영원한 군산사람

감독직을 사임하고 은행에서 근무하는 최관수 전 감독(1980년 10월)
감독직을 사임하고 은행에서 근무하는 최관수 전 감독(1980년 10월)

최관수 감독의 뜨거운 야구사랑은 투병생활 중에도 식을 줄 몰랐다. 1996년 여름, 그는 대화가 어렵고 거동이 불편함에도 군산상고 운동장에 나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루는 연습을 지켜보다가 운동장 바닥에 ‘찬스 때 대타 활용을 잘하라!’고 써서 제자(나창기 군산상고 감독)의 눈물샘을 자극하였다. 그토록 야구에 집념이 강했던 그는 1998년 3월 7일 타계, 영광과 좌절로 점철된 야구 인생을 마감한다. 아래는 양희철(81) 전 전북체육회 부회장의 회고다.

“그때 내가 전라북도 체육대상 부상으로 받은 상금 500만 원 가지고 있었지. 그 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는 최관수 감독 부인이 세탁소도 그만두고 삯바느질로 근근이 살아간다는 얘기가 들려오는 거야. 그 얘기를 듣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돕기로 했지. 그때는 내가 볼링장도 운영하고 잘 나갈 때였잖아. 체육인으로서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입원과 치료비는 얼마나 드는지 서울의 유명한 병원으로 알아봤지.

며칠 후 350만 원이면 가능하다고 연락이 오더군. 곧바로 최 감독 부인에게 돈을 전달했지. 그런데 얼마 후 최 감독이 덜컥 죽어버렸네. 부인은 병원에 가자고 하고, 최 감독은 안 간다고 우기고 싸웠나 봐.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상(喪) 치르고 최 감독 부인에게 전화가 걸려왔어. ‘애기 아빠 병 고치라고 주신 돈이지, 저희 생활비를 주신 게 아니니 돌려드리겠다’는 거야. 얼마나 감동했는지. 살면서 그렇게 착하고 고지식한 부부는 처음 봤어. 오죽했으면 맹자의 성선설을 생각했겠느냐고. 아무튼, 최관수 감독은 영원한 군산사람이야···.”

양희철 부회장 말마따나 군산의 야구팬을 비롯해 예술인과 체육인들도 ‘최관수 감독은 영원한 군산사람’이라는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놀라운 사실은 군산상고를 찾는 외지인 발길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얘긴데, 지역의 야구 꿈나무들에게 동기부여를 위해서라도 군산상고 입구에 ‘최관수 감독 흉상’ 제막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군산야구 100년사’ 연재 끝.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조종안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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