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 싸움닭’ 조계현②
군산남중 2학년 때 '노히트 노런' 기록

초등학교 시절부터 파워 넘치는 투구로 주변을 놀라게 했던 조계현은 1978년 장호익, 고장량, 한경수 등과 함께 군산남중에 진학한다. 중학교에서도 장호익과 호흡을 맞추면서 전국규모 대회에서 두 차례 결승에 진출한다. 투수라면 누구나 욕심내는 노히트 노런도 달성한다. 그럼에도 우승기는 한 번도 거머쥐지 못한다.
중학생 조계현의 롤모델은 고교 시절부터 초특급 투수로 찬사를 받으며 연세대 마운드를 굳건히 지키는 최동원(2011년 타계). 소년 조계현은 각종 타이틀을 거머쥐고 당대 최고 투수로 군림하는 최동원을 보며 꿈을 키운다. 어떤 역경과 고난이 닥쳐도 열심히 노력해서 연세대에 진학하고, 국가대표 선수도 되어 야구장을 호령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1979년 5월 30일, 충북 청주에서 제8회 전국소년체육대회가 열렸다. 군산남중 2학년 때였다. 전북 대표로 참가, 개막전 선발로 나서 강원 대표 타자들을 압도하며 7회 2사까지 퍼펙트 행진 이어갔다. 한 명을 볼넷으로 내보냈으나 곧장 견제구로 잡아낸다. 경기 결과는 전북이 1-0 승리. 그는 대회를 앞두고 개장한 청주구장 첫 번째 승리투수이자 노히트노런 기록 보유자가 된다.
1980년 6월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제35회 청룡기쟁탈 중학부 결승전에서 군산남중은 충남중에 1-3으로 석패, 준우승에 머문다. 이 대회에서 조계현은 감투상 장호익은 타격상 받는다. 그해 8월 서울에서 열린 제23회 문교부장관기 중학 야구대회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한다. 조계현·장호익 배터리는 이 대회에서도 감투상과 타격상을 각각 받는다.
군산상고 1학년 때 스타로 떠올라
조계현은 군산상고에 입학하는 1981년(야구부 14기)부터 스타 반열에 오른다. 야구전문가들이 가장 좋은 구질을 보유한 유망주로 평가한 것. 그해 5월 대통령배 대회와 7월 미국에서 열린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 선발 및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우승을 견인한다. 9월에 열린 한·일 친선 고교야구대회에서도 완숙한 투구로 팬들의 사랑을 받는다.

조계현·장호익 배터리가 이끄는 군산상고 야구부(감독 백기성)는 유난히 무덥고 가물었던 1981년 5월 15일 대망의 대통령배 정상을 탈환한다. 특히 1년생으로 에이스 자리를 굳힌 조계현은 장충고와 2회전을 제외한 4게임에 위기 때마다 구원 투수로 나와 방어율 1.29의 놀라운 투구로 우승을 이끈다.
제15회 대통령배 고교야구 결승전이 열리는 그날 오후 3시, 서울운동장 야구장은 스탠드를 꽉 메운 3만 5000여 관중과 응원 열기가 더해져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응원 함성이 하늘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결전(군산상고-북일고)의 막이 올랐다. 그리고 전국의 고교 야구팬과 많은 군산 시민이 라디오와 TV 앞에서 숨을 죽였다.
군산상고의 선공. 1회 초 톱타자 김평호와 4번 임동구가 포볼을 골라 1사 후 주자 1, 3루 기회를 잡는다. 이때 5번 조계현이 북일 선발 안성수의 두 번째 공을 휘어 치는 순간, ‘딱’ 소리와 함께 우익수 오른쪽으로 빠지는 통렬한 주자 일소 2루타가 되어 2점 선취한다.
1회 말 군산상고 선발 강대호 투수가 2루타 맞고 실점 위기에 놓이자 그날의 히어로 조계현이 마운드에 올라 나머지 타자들을 3진으로 가볍게 처리한다.
다시 2회 초. 연속 포볼과 야수선택으로 만루를 만들어 스퀴즈로 1점 뽑고, 2번 고장량의 적시타로 2점 추가 5-0으로 대세를 굳히자 군산 시내는 흥분의 도가니. 그에 화답하듯 조계현은 완벽한 투구로 2, 3. 4. 5회를 범타로 처리한다. 공을 던질 때마다 터지던 환호성이 잦아든 것은 2점을 내준 6회 이후. 사람들은 TV 앞에서 가슴을 조였다.
드디어 7회 말. 공의 위력이 떨어져 데드볼을 내주고, 장호익마저 파울볼로 팔을 다쳐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강한 배짱의 조계현은 빠른 직구로 승부수를 던지며 1점만 허용한다. 쫓고 쫓기는 공방전. 모두 숨을 죽였다. 8회 말은 무실점. 9회 말 조계현의 마지막 직구가 범타로 끝났을 때 땀으로 범벅된 선수들은 얼싸안았고, 군산 시민들의 함성은 높이 솟은 월명공원 수시탑 주위를 맴돌았다.
군산상고 우승(5-3)이 확정되자 다방에서 TV 중계방송을 시청하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술집으로 향했다. 초여름 밤, 아름다운 항구도시 군산의 밤은 야구 이야기와 술에 흠뻑 젖은 채 깊어갔다. 다음 날 아침, 도심지 거리에는 색색의 환영 현수막이 하늘을 물들였고, 남녀노소 많은 시민과 조계현·장호익 배터리를 꿈꾸는 야구 꿈나무들은 역전의 명수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조계현 감독은 “50년 야구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 깊었던 경기(대회)를 몇 개 기억하는데, 군산상고 1학년 때 대통령배 우승을 첫 번째로 꼽는다”며 “가슴 뭉클한 환영을 받아서 그런지 군산 시내 카퍼레이드를 생각할 때마다 전율을 일으킨다”고 덧붙인다. 이어 그는 시원한 음료수를 기자에게 권하며 ‘한탄’ 한마디를 남겼다.
“세월 참 빠릅니다. 초등학교 때 소사 아저씨가 깎아준 야구방망이에 글러브를 끼워 메고 서울로 시합 나가고, 고무신 신고 냇가로 물고기 잡으러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아들이 장가들게 생겼으니, 차~암나, 서글퍼요 서글퍼···.”
“크게 손해났다가 본전도 뽑고 이익도 챙긴 경기”

군산상고는 1980년대 들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 중심에는 조계현·장호익 배터리가 있었다. 1981~1983년 전국규모대회 성적은 우승 4회 준우승 2회. 다방이나 직장에서 군산상고 경기를 지켜본 시민들은 발길을 집이 아닌 대폿집으로 돌렸다. 연탄 화덕 중심으로 둘러앉은 사람들은 소주잔 부딪치며 감독도 되고, 해설가도 되고, 심판도 됐다.
조계현 어깨에 물이 오를 대로 오른 1982년. 그해 5월 건국 이후 최대라는 장영자·이철희 대형 어음 사기 사건이 터진다. 6월에는 돌아선 민심 수습 차원의 개각이 단행되고, 전북 고창 출신 김상협 씨가 국무총리에 기용된다. 그러나 군산 사람들의 화두는 야구경기 결과였다. 이는 군산 시민의 야구 사랑이 그만큼 깊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1982년 국내 고교야구 최강팀은 청룡기와 봉황대기를 석권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였다. 이는 투타에서 놀라운 기량을 발휘하는 조계현이 있었기에 그해 고교야구 무대를 주름잡을 수 있었다. 특히, 선발라인업 중 5명(조계현, 장호익, 한경수, 고장량, 오인식 등)은 2학년임에도 드라마 같은 명승부를 보여줬다. 그때마다 전문가들은 과연 ‘역전의 명수’, ‘호남야구의 기수’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계현을 향해서는 ‘팀의 보배’라 평하였다.
1982년 6월 11일. 제37회 청룡기쟁탈 고교야구 2회전(군산상고-충암고)은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야간경기로 열렸다. 서울지역 예선 우승팀 충암고는 2회 말 조계현이 난조에 빠진 틈을 이용, 대거 6점을 뽑는다. 그런데도 역전의 명수 저력을 믿는 군산 시민들은 극적인 명승부가 펼쳐지기를 고대하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4회 초 군산상고 공격. 볼넷으로 출루한 2번 오석환을 1루에 두고 등장한 5번 조계현이 3루 측 담장을 넘기는 투런 홈런을 날리며 분위기를 전환한다. 그 여세는 5회 초 공격으로 이어져 2번 한경수의 적시 2타점 등 4안타 포볼 2개를 묶어 3점을 만회한다. 그리고 5회, 6회 말에 조계현이 한 점씩 내줘 6-8, 군산상고는 7회까지 2점 차로 끌려간다.
8회 초 타이(8-8)를 만든 군산상고는 9회 초 오석환과 조계현의 연속 2루타로 전세를 9-8로 뒤집는다. 리드를 빼앗긴 충암고 마운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고 기세가 오른 군산상고는 장호익, 오인식의 연속 중전안타와 8번 이동석의 희생플라이로 2점 가산한다. 이어 충암고 내야진의 실책으로 2점을 추가 13-8 안정권으로 달아난다.
9회 말 공격에서 충암고가 1점만을 추가함으로써 장장 4시간 20분에 걸쳐 2만 관중을 열광시켰던 역전드라마는 13-9로 막을 내린다. 그날 밤 군산은 시민의 함성이 골목과 거리를 가득 메웠고, 무더운 초여름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조계현의 투구 하나, 하나에 울고 웃던 시민 중에는 “처음에는 조계현이 크게 손해났다가 본전(동점)도 뽑고 이익(승리)도 챙긴 시합이었다!”며 흐뭇해하는 40대 아줌마도 있었다. 아래는 조계현 감독의 회고.
“군산상고 선수들의 집중력이 돋보였던 경기였죠. 결승전 이상으로 통쾌했구요. 초반에 큰 점수 차로 벌어졌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역전승을 일궈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불타는 투지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된 승부 근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지옥과 천당을 오간 경기였죠. (웃음) 그래서 그런지 다음 경기부터는 자신감이 솟구치고, 우승 고지도 가깝게 보였습니다.”
대망의 청룡기, 33년 만에 호남선 열차에 싣고 군산으로

제37회 청룡기 결승전(군산상고-북일고)은 1982년 6월 1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렸다. 스탠드를 가득 메운 3만 관중의 응원 공방전 속에 펼쳐진 결승전. 이날 경기는 고교야구의 두 기린아 조계현과 안성수의 치열한 투수전으로, 3시간 18분에 걸친 숨 가쁜 격전이었다. 연장 12회 말까지 사투를 벌였으나 결과는 1-1 동점.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다음 날 재경기를 치른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숱한 역경과 불꽃 튀는 혈투를 거듭해온 군산상고와 천안 북일고는 청룡기 역사상 처음 패권을 각각 눈앞에 두고 연장 12회에도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또다시 결전을 약속해야 했다. 1979년 대회부터 패자부활전 없는 토너먼트로 경기 방식이 바뀐 이래 결승전이 무승부를 이뤄 재경기를 치르기는 이 대회가 처음이었다.
이날 중앙로, 영동, 평화동 등 시내 중심 상가는 거의 철시했으며, 거리는 차량과 인적이 거의 끊겨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시내와 변두리 지역의 100여 개 다방은 중계방송을 보기 위해 몰려든 손님으로 초만원을 이뤘다. 한편, 시민과 재학생 3000여 명으로 이뤄진 응원단은 결승전이 열리는 17일~18일 양일간 30여 대의 전세버스와 고속버스를 대절, 상경하였다.
결승 재경기 열리는 18일 오후 6시 30분 서울운동장 야구장. 군산상고는 1회 말 공격에서 1번 선두타자 고장량의 데드볼과 2번 한경수, 3번 백인호의 연속 보내기번트, 북일고 내야수의 악송구, 4번 오석환의 희생플라이로 1점을 얻고 5번 조계현의 적시타로 추가점을 올려 2-0으로 앞서간다.
북일고는 2회 초 공격에서 6번 안성수가 볼넷을 고르고, 7번 임학빈의 내야 안타와 1사 후 9번 오효근의 좌월 2루타로 2-2 타이를 만든다. 그리고 1번 조양근의 볼넷, 군산상고 유격수 실책에 3번 조용호의 센터 앞 안타로 2점을 보태 4-2로 달아난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두 점 차로 끌려가는 군산상고에 미소를 보낸다.
반격에 나선 군산상고는 2회 말 1사 후 9번 이승우가 볼넷을 고르고 1번 고장량의 2루타에 이은 2번 한경수의 중전 적시타로 4-4 동점을 이룬 뒤 2사 후 오석환이 볼넷을 고른다. 그리고 5번 조계현의 평범한 땅볼을 북일고 유격수가 빠뜨려 1점을 낚고, 장호익, 오인식의 중전안타로 3점을 더 잡아 8-4로 재역전 시키면서 승세를 굳힌다.
2년생 에이스 조계현은 3회에 등판, 삼진 9개를 뺏고 3안타 1실점으로 북일고 타선을 요리, 추격을 9-5로 막는다. 조계현이 9회 말 마지막 공을 뿌렸을 때 감격한 군산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로써 군산상고는 1949년 광주서중(광주 제일고 전신) 우승 이후 첫 패권을 차지, 대망의 청룡기를 33년 만에 호남선 열차에 싣고 군산으로 향한다.

군상상고 우승 확정과 함께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시민들은 ‘군산상고 만세!’를 외쳤다. 시민들은 서로 얼싸안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시내를 누볐으며, 20~30대 젊은이들은 술집으로 향하는 등 열광의 도가니였다. 농방골목에서 선술집을 운영하는 모 씨는 “결승전 끝나자마자 손님이 몰려오는 바람에 술독이 모두 바닥났다. 군산상고 우승 덕분에 모처럼 호경기 누렸다”며 환하게 웃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선수들은 전라북도 도청 광장에서 열린 도민환영대회에 참석하고 오픈카에 탑승,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우승기를 앞세운 선수들은 전주 시내를 가르고 이리(익산) 시내를 돌아 군산에 도착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계속) ※ 등장인물 나이와 소속은 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