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중의 자전거 이야기(18)

최근 개통된 프라이부르크의 자전거도로(사진=프라이부르크 시청 제공, Michael Spiegelhalter)
최근 개통된 프라이부르크의 자전거도로(사진=프라이부르크 시청 제공, Michael Spiegelhalter)

하우턴, 폰테베드라, 보봉 그리고 대한민국의 혁신도시(2)-'보봉' 이야기

​지난 대선 때 TV토론 한 대목이 떠오른다. 윤석열 후보가 한 질문에 답을 못하자 ‘대선후보가 그것도 모르냐’고 잠시 화제가 된 RE100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본다. 많은 야권지지자는 ‘시대적 추세인 환경과 에너지문제에 관한 기본적 소양도 없다’며 조롱하는 대상이 되었다. 필자가 보기엔 이를 비판했던 야당이나 상대측 진영은 이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 얼마나 있었는지 회의적이다.

RE100은 기업들이 ‘재생에너지 100%를 사용하기로 하는 캠페인’으로 비영리단체가 제안하고 기업들이 호응하며 탄소중립의 방향성을 만든 점에서 의미가 크다. 2017년 Google사가 이를 달성했다고 홍보한다. 2020년 현재는 50여 개의 재생 에너지 프로젝트를 통해 총 5.5 기가와트에 달하는 전력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힌다. 옥상 태양광 1백만 개에 해당하는 용량이라고 한다. 애플, GM, 이케아는 물론 국내의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의 기업들도 이 클럽에 가입하고 스스로 약속한 RE100 달성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설명한 것처럼 국제기구가 국가 간 협약을 통해 마련한 것도 아니며 강제성을 띤 규범도 아니지만 이윤창출을 제일의 가치로 두고 있을 세계적 기업들이 앞장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ESG경영을 들 수 있다. 각각 환경보호, 사회공헌, 윤리경영을 기업운영의 규범으로 거론하며 기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평가의 틀로 활용하기 시작한 경영지표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왜 그럴까? 머지않은 미래에 상상 속에서만 거론되던 탄소배출권을 거래하며 국가 간 또는 기업 간 거래에서 직접 도입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들이 강제력도 없는 캠페인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선의에 기초한 윤리적 기업가정신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관한 구체적 대비에 서두르고 있는 중요한 현실로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 우리 도시들은 어떻게 임하고 있는가?

보봉의 전차(트램)노선(사진=프라이부르크 시청 홈페이지 캡처).
보봉의 전차(트램)노선(사진=프라이부르크 시청 홈페이지 캡처).

도시의 미래는 '지속가능성'에 달려있다. 전작에서 거론한 네덜란드의 하우턴, 그리고 여러 차례 앞서 언급한 스페인의 폰테베드라, 미국의 포틀랜드 등의 도시들의 미래를 대비한 차원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도시의 미래를 오래전부터 서둘러 왔다. 오늘 소개할 도시는 독일 프라이부르크시의 한 지구인 보봉에 관한 이야기다. 프라이부르크와 그 도시의 일부인 보봉은 앞서 소개한 문제의식을 일찌감치 자신의 도시의 미래의 문제로 여기며 실마리를 찾고 있었다.

프라이부르크는 세계의 환경수도라 불릴만한 족적을 남기며 걸어왔다. 일찍이 원전의 위험성에 대한 제기가 활발하고 시민운동이 벌어지면서 대안으로 태양광 발전을 서둘렀고 도시가 받아들였다. 태양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프라이부르크는 활기찬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오래된 대학 프라이부르크대학교를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도시의 주택난이 심화되었다. 이런 경우에 흔히 신규로 주택단지를 개발하는데 지자체나 기업들이 주도하기 마련.

프라이부르크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에 제동을 건 것은 특이하게도 청년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2차 대전 독일 패망의 결과로 프랑스군의 주둔 병영 지였던 보봉지구 반환이 가시화되자 이곳을 실효적으로 점유해 리모델링하고 분양하자는 ‘조용한 점거’ 방식의 전술을 제시하고 실행에 옮긴다. 프라이부르크 시당국은 이런 움직임에 난색을 표했으나 이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속박당하지 않는 주거를 제공하기 위한 이니셔티브’(SUSI)라는 이름의 협동조합과 보봉 포럼(Forum Vauban e.V.) 등을 조직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호응을 얻어 나가자 자세를 전향적으로 바꾸게 된다.(참고: 은평시민신문 2012년 7월 9일 자 ‘태양의 도시 프라이부르크의 보봉지구를 가다’ 기사)

이후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몇 가지 원칙의 개발방침을 정하게 된다. ‘주민 전체의 자발적 참여를 위한 조직 결성, 빌딩 소유주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게 공동체 중심의 이행 지원, 공동주택 및 빌딩건축 지원, 지속가능한 본보기 마을조성 및 현실화, 특히 교통 및 에너지 분야에서의 지속 가능 정책실천 및 유지, 커뮤니티센터를 통한 이웃 간 소통 장소 마련’ 등이 주요 내용이다. 태양광의 도시, 세계의 환경수도, 지속가능한 도시의 살아있는 모델로 꼽히는 프라이부르크의 시작이 바로 시민들의 주장과 그것을 받아들인 데서 이뤄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보봉에는 동네 전체가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천국이 되었다. 굳이 차를 보유하지 않고 공유차를 많이 활용한다. 자동차를 보유한 사람들보다 보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의 시작은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 선언으로부터 이어졌다. 2017년 통계에 따르면 413,000평방미터(12만 5천 평)의 지구 내에 5,661명의 인구가 거주하며 1146대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인구 천명당 202대에 해당. 전주의 경우 450대가량)

프라이부르크 바데노바 경기장 지붕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시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프라이부르크를 태양광의 도시라고 부른다:(사진=프라이부르크 시청 홈페이지 캡처)
프라이부르크 바데노바 경기장 지붕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시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프라이부르크를 태양광의 도시라고 부른다:(사진=프라이부르크 시청 홈페이지 캡처)

도시는 욕망과 탐욕이 지배하는 대신에 살아갈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기는 삶의 터전 되어야

우리는 낡고 개발이 뒤쳐진 공간을 재개발하거나 재건축하는데 매우 손쉽게 결정한다. 지어진 지 30년이 못된 시점에 재건축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40년이면 다 허물고 새로 지어진 건축물들로 채워져 도시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유럽의 도시에서는 우리와 같은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재건축이나 재개발 대신 ‘재생’한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재건축 또는 재개발할 때 안에서 살던 원주민(이렇게 부르는 것도 참 기이하지만)에게 개발을 하는 방향에 대해 물어보는 경우를 들어 본 적 없는 것 같다. 그중 상당수는 새로 지어진 공간을 떠나 다른 지역이나 다른 도시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다. 원주민을 쫓아내고 새롭게 주인이 되는 서부 개척시대의 약탈자들 마냥 사는 사람도 바뀌고 도시의 개성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 공간을 ‘개발을 통한 집값 상승의 탐욕’이 지배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싶어 개척시대의 약탈자를 거론하는 게 과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도시로의 집중과 대도시의 번영은 세계적 추세라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겪는 부작용이라 할 부의 양극화와 빈곤의 심화는 거의 모든 대도시의 공통점이다. 대도시의 화려함과 빛나는 번영에는 인간의 소외를 비롯한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심각한 편이다.​

대도시의 번영은 일부에게 누려지는 현상이지 그 도시에 삶의 터전을 잡고 있는 모두의 것이 아니다. 한 채에 수십억을 넘어 수백억 원에 달하는 집값을 감당할 수 있는 자산가들도 많지만 월세 30만 원이 못 되는 쪽방과 고시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면 그 도시의 번영을 긍정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양극화는 1:99의 비극으로 귀결될 것으로 점치는 전문가들이 많다.

전작의 하우턴과 이번의 보봉에서의 사례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 그 도시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생각과 운명에 대한 고려가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도시의 확장과 개발을 통한 이익이 그 도시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음을 우리가 나날이 확인하고 있다. 미래의 도시로 손꼽히는 모델의 도시와 달리 우리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담보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서두에서 소개한 탄소중립 등의 환경문제에서도 우리는 손을 놓고 있다. 이는 경쟁력 약화를 의미한다. 아울러 양극단으로 치닫는 불평등의 심화가 보다 본질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욕망과 탐욕은 집중을 초래한다. 그래야 이익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용적률과 집중된 지역으로의 편의시설 확충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이는 또다시 집중을 불러일으킨다. 누가 이런 도시에서 살고 싶겠냐만 우리는 그것이 행복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보봉의 사례에서 보다시피 사람들은 안전하고 편안한 삶의 터전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찾아간다. 그 도시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목소리가 도시계획의 중심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김길중(자전거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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