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근의 지리산 문화대간(68 )

조선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8월 13일에서 16일까지 전라도 남원에서 고을백성 모두가 나서 왜군과 싸운 전투가 있었다. 남원성 전투다. 그때 만여명의 사람들이 나라에 목숨을 받쳤다. 후세사람들은 그때 순절한 영혼을 만인의 총에 모셨다.
남녀노소 그 누구랄 것도 없이 운명공동체에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묶어 나라를 지켜내야 했을 절박한 운명 앞에 자기의 작은 이야기는 우주속에 미아가 되어 버렸다. 만인이 가졌을 만가지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떠돌고 있을까?
향토사는 숨어사는 조상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병아리 눈물보다 적은 기록이나 구전을 포장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원성 안에 들었던 만여명의 영혼에 잠든 이야기를 꺼내 어떤 것은 영화로 만화로 웹툰으로 창작판소리로 동화 같은 것으로 세상을 향하게 해드리는 것이 그분들의 원한을 갚아 드리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며칠전 지나다가 남원성 정비 현장에 가보았다. 성문 기둥 받침으로 쓰였을만한 문돌확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돌에 구멍을 내고 문기둥 받침돌을 만들었을 석공은 무슨 이야기를 가지며 왜놈들의 칼에 죽어 가야 했을까?
만인 만담의 이야기를 찾아 보겠다는 생각은 우공이산 愚公移山을 꺼내야 했다. 오래전에 지리산의 구전자원을 조사하다가 선조들이 석공이었다는 후손을 만났고 집안에 내려오는 몇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 하나는 이렇다.
"조선시대 고을마다 쌓은 성문 기둥을 받치는 돌쪼구는 동문서문남문북문마다 다르게 만들었대요. 아 ~ 왜 예를 들어 남원성문도 동서남북마다 이름이 달리 있었을것 아니오"
"예 ~동문은 향일루(向日樓), 서문은 망미루(望美樓), 남문은 완월루(翫月樓), 북문은 공신루(拱宸樓)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 예를 들어 북문은 성안에 사는 백성들이 북쪽에 계신 임금을 늘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다는 공신루(拱宸樓)라고 이름을 짓듯이 성문을 열때도 백성들의 마음이 임금에게 이어지도록 대문 소리가 우렁차야 해서 돌쪼구 윗면 기둥이 돌과 접한데를 처녀 입술모양으로 곡선으로 다듬어서 성문 기둥면과 돌의 면이 부드럽고 넓혀지게 해서 성문을 열때 소리가 우렁차고 크게 나게 했대요. 동쪽문은 해가 뜨는 곳이니 새벽에 문을 열면 장닭 소리가 나도록 기둥 돌확구멍을 원뿔형이 아니라 통구멍을 냈다고 하고 서쪽문은 해가 지는 저녁때 일하고 돌아온 황소 울음소리가 나도록 돌확구멍 윗면을 평면이 되게 했고, 남쪽문은 낮에 모두 열심히 일하다가 정오 점심 때를 맞는 소리를 내야 하니까 돌확 윗면을 약간 지그재그로 해서 문여는 소리가 찌그덕 거리게 했다고 내조부님이 말씀하셨제"
만인만담이 남원성 전투에 든 백성들의 정체성이다. 만백성이 주인으로 내는 이야기마져 표로 갈라쳐지는 시대에 산다. 누구든 만담에 들지 않을수 없다. 백성의 기록과 기억을 두려워 해야 하는 이유다.
향토의 성쇠는 향(봉임자)의 권력 이야기가 많으면 쇠이고 토(백성)의 발품으로 생겨난 선한 이야기가 많으면 흥이다.
/글·사진: 김용근(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