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기 교사, 군산중학교 야구부 재창단

조선야구협회(초대회장 서상국)는 1946년 3월 18일 창립된다. 그해 5월 13일에는 조선학생야구연맹(초대회장 이원용)이 발족한다. 이를 신호탄으로 학원들이 우리 손으로 정비되고 학생 체육이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선다. 군산에도 새로운 바람이 일어난다. 일제 패망과 함께 해체됐던 군산중학교 야구부가 정윤기(鄭允基) 교사 노력으로 부활한 것.
광복(1945) 후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8도선을 경계로 남쪽 지역에 미 점령군이 들어오고, 북쪽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했던 미군정기 3년(1945년 9월~1948년 8월)
당시 군산은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쌀 파동’으로 ‘쌀 한가마 사려면 돈을 한 가마니 담아가야 겨우 구입할 수 있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물가 폭등에 좌우 이념 대립으로 민심까지 흉흉했던 1946년 봄, 군산중학교(아래 군산중)는 정윤기 교사와 황 동(黃 童)씨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야구부가 재창단 된다.
이듬해(1947년) 5월에는 정윤기 교사가 군산중 야구부장과 감독을 겸하게 된다. 정윤기 감독은 선수들을 인솔하고 서울로 원정 휘문중학교, 경동중학교, 인천공업학교, 인천상업학교 팀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둬 야구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해 6월에는 공주중학교, 이리농업학교 팀과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둔다. 이후 군산중 야구부는 야구 평론가들로부터 기량이 뛰어난 강팀으로 인정받는다.

“동팀(군산중 야구팀)은 지난 5월 서울에 원정하여 휘문(徽文), 경동(京東), 인천공업, 인천상업팀과 싸워 연전연승의 개가를 올린 맹자일뿐 아니라 또 지난 육(六)월에 공주(公州) 중학, 이리(理里) 농림팀과도 격전 끝에 대승의 기세를 올리었는데 이번 본사 주최의 야구전에도 필승불패의 신념 그대로 염천하를 무릅쓰고 맹열한 연습을 게속하고 있다. (아래 줄임)”
위는 제1회 황금사자기대회에 출전한 군산중 야구팀을 소개하는 1947년 8월 21일 치 ‘동아일보’ 기사(제목: <연전연승(連戰連勝)의 강호(强豪) 군산중학(群山中學)팀 출전(出戰)>)의 한 대목이다.
신문은 “특히 동팀(군산중 야구팀)은 정윤기(鄭允基) 감독과 황 동(黃 童), 최문포(崔文浦) 양씨의 코치를 받어 날로 그 기술의 발전을 노래하고 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1947년 8월 군산중은 전북지역 예선에서 전주공업학교를 14-1, 군산상업학교를 11-6으로 제압하고 서울에서 열리는 제1회 황금사자기 대회 본선에 진출한다. 군산중은 첫 경기에서 인천 동산고와 공방전 끝에 1점차(4-5)로 아깝게 패한다. 비록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창단 1년 만에 서울지역 강팀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고, 전북 대표로 전국대회에 출전한 것은 놀라운 발전이었다.
정윤기 교사는 누구?

정윤기 감독은 동산학원(東山學園) 설립자 매촌(梅村) 정만채(鄭萬采: 1884년~1961년) 손자이다. 그는 대구 계성중학교(5년제) 재학시절 야구와 인연을 맺는다.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일본대(日本大) 야구부에서 1루수로 활약하였다.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1946년 군산중학교 교사로 발령받는다. 이후 야구부가 해체된 것을 알게 된다. 야구에 열정이 많았던 그는 재창단을 결심하고 할아버지(정만채)를 설득하여 비용을 지원받는다.
매촌은 정 감독이 ‘가난한 야구선수들 밥도 사 먹이고, 장비도 구매해야한다’고 통사정하자 두말없이 뭉칫돈을 내준다. 조선 시대 대지주 집안 차남으로 지금의 조촌동에서 태어난 매촌은 일제 강점기(1915년) 야학당 ‘매촌의숙’을 세워 청소년들에게 학문과 한글을 가르쳤다. 그는 광복 후에도 쌀 1천석을 쾌척하여 ‘동산학원’을 설립한 인물이다. 아래는 정회상(정윤기 감독 3남) 군산동중·고 총동창회장의 전언이다.
“해방을 전후해 군산에는 성인 야구팀이 여러 개 있었는데, 아버님이 남전(한국전력 전신) 군산지점 후원으로 군산중학교 야구팀을 창단시켰답니다. 남전에서 군산중학 출신을 스카우트하겠다고 약속하니까 선수들 미래가 보장됐던 것이죠. 장비는 군산비행장을 통해 구입했고 미군들에게 지원받기도 했는데, 글러브가 선수들 손에 맞지 않아 실책을 자주 범하는 등 웃지못할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래도 연습이 끝나면 선수들 짜장면 사주는 일은 잊지 않으셨다고 하더군요.
‘군산 야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 있잖아요. 그분도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어느 날 선수들을 데리고 서울로 시합하러 갔는데 경동중학 선수로 활약하고 있더라면서···. 아버님은 1951년 군산중학이 중·고(3년제)로 분리된 후 군고에서 1958년까지 재직했는데 문동신 군산 시장을 비롯해 고은 시인, 강현욱 전 장관, 강근호, 채영석 전 의원, 양희철 회장 등 모두 애제자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님 별명은 ‘정대포’였다고 합니다. 사물을 실제보다 크고 재미있게 표현해서 붙여진 별명이라고 하더군요. (웃음)”
재미있는 현상은 지금도 70대 이상 군산 토박이에게 ‘정대포’란 사람 아느냐고 하면 정찬홍(군산동고 초대 교장) 아들이고 정만채(동산학원 설립자) 손자인 것을 기억하고 안부를 묻기도 한다. 그러나 광복 후 군산중학교 야구부를 재창단하고 감독과 매니저 겸했던 정윤기 교사 아느냐고 물으면 그런 사람 잘 모른다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는 것이다. (계속)
/조종안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