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상고, 해방 직후에도 야구부 존재

군산에는 ‘20세기 전설’이 된 학교가 하나 있다. 불굴의 의지와 끈기로 1970년대 고교야구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군산상고다. 불모지였던 호남 야구의 기수로 떠오르면서 ‘역전의 명수’ 신화를 창조한 그들. 1972년 7월 19일 부산고와의 결승 9회 말에서 대역전극을 펼쳤던 황금사자기 우승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한국 고교야구 역사에 전설처럼 전해진다.
승부 근성과 패기로 똘똘 뭉친 선수들이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역전극은 군산을 야구의 도시로 만들었다. 군산상고 경기가 있는 날 도심지와 상가는 정적이 감돌았다. 택시 운행도 뜸했다. 시민의 눈과 귀가 TV와 라디오로 쏠렸기 때문이었다. 우승이 확정되면 시내는 온통 축제 분위기. 이튿날 거리에는 각양각색의 환영 현수막이 하늘을 뒤덮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선수들은 전북도청 광장에서 열리는 환영대회에 참석,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환영대회를 마친 선수들은 오픈카에 올라 전주를 출발, 이리에 들렀다가 군산에 도착하여 팔마광장, 군산역 로터리, 도선장, 중앙로, 경찰서, 금광동(대학로)을 지나 시청 광장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꽃가루가 뿌려졌고, 시민들은 환호했으며 선수들은 감격했다.
군사정부의 편향적인 개발정책으로 도민 모두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렸던 70~80년대, 역전의 명수들은 경기 때마다 득점, 실점, 타이, 역전, 재역전 등 파란과 이변을 연출하였다. 고달픈 시민에게 기쁨과 희열을 맛보게 해준 군산상고 야구부는 1968년 창단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격변기였던 해방 정국에도 야구부가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아래는 1926년 6월 28일 자 <동아일보> 기사(제목: <재등총독(齋藤總督)에게 4개항(四個項)을 진정(陳情)>) 내용이다.

“금반 군산축항기공식(今般 群山築港起工式)에 참석차(參席次)로 재등총독(齋藤總督)의 내군(來群)을 기(期)하야 군산부민 일동(群山府民 一同)은 거24일 오후(去二十四日 午後)에 학교 평의원 김홍두씨(學校評議員 金鴻斗氏)와 학무위원 편무송씨(學務委員 片茂松氏)를 부민대표(府民代表)로 일선 부윤(一先 府尹)을 경유(經由)하며 재등총독(齋藤總督)에게 좌기 각항(左記 各項)을 진정(陳情)한 후 차(後 次)에 대(對)한 일절책임(一切責任)은 부민(府民)에게 부대(附帶)식히겟다더라...(아래 줄임)”
신문은 군산 부민(府民) 대표의 4가지 진정 사항인 ▲군산에 제2공립보통학교 또는 여자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해줄 것 ▲군산에 갑종상업학교(甲種商業學校)를 설립해줄 것 ▲현재 군산중학교를 조선인과 일본인이 협력하여 도립으로 이관케 하는 동시에 1학급을 증설하여 조선인 학생을 다수 수용케 할 것 ▲군산 조선인 거주지에 조금이라도 조선인과 일본인 차별이 없도록 도로와 하수구를 개선해줄 것 등을 덧붙여 보도하였다.
기사에서 언급된 ‘갑종상업학교’는 야구 명문인 군산상고 전신이다.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당시 조선인 유지들은 갑종상업학교 외에 두 개의 보통학교(조선인 학생 중심 교육기관) 설립과 군산중학교 조선인반 증설, 조선인 동네 도로 및 하수도 개선 등 4개 항의 진정서를 작성, 군산 부윤을 통해 축항공사 기공식에 참석한 사이토(齋藤) 총독에게 전달하였다.
부민(시민)과 지역 상공인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그들은 부민 대표로 선출되어 진정서를 부청에 제출한 김홍두 평의원과 편무송 학무위원 중심으로 1930년대에도 항구도시이자 상공업중심 도시임을 강조하며 갑종상업학교 설립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결국 주민들의 뜻을 받아들여 1941년 4월 개교하게 되는데, 이는 전북지역 최초 상업교육기관으로 전해진다.

군산상업학교는 1941년 군산공립상업학교(4년제)로 설립 인가를 받고, 그해 4월 19일 입학식을 가졌다. 설립 당시에는 교사(校舍)를 마련하지 못해 군산심상고등소학교(군산초등학교전신) 교실을 빌려 수업하다가 1942년 12월 1일 지금의 자리에 본관 건물을 신축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1944년 3월 제1회 졸업생 46명(일본인 22명)을 배출했으며, 그해 4월 군산공립공업학교로 개편된다. 1945년 10월 김부영(金富榮) 초대교장이 취임한다. 당시 학생은 144명이었다. 1946년 1월 군산공립상업학교, 1947년 5월 군산공립상업중학교로 개칭된다. 1951년 3월 교육법 개정으로 남중학교와 분리, 3년제 고등학교 모습을 갖춘다. 1954년 6월 화재로 본관이 전소(全燒)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군산상고는 광복을 전후해 야구부가 존재했던 것으로 자료와 증언을 통해 확인하였다. 비록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지는 못했으나 1946년 10월에 개최된 제27회 전국체육대회에 군산을 대표해서 참가하였고, 제1회 황금사자기 지역예선 대회(1947)에 출전한 기록 등으로 미뤄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직 언론인 채규이 씨도 “군산상고 야구부는 해방 이전에 이미 구성되어 열정적으로 활동했음을 선배들에게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라며 “해방 후 활동만 전해지고, 일제강점기 활동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다.”라고 덧붙였다.
군산상고는 한국 농구 위상을 세계에 떨친 오수철(1917~1995)에 의해 1946년 농구부가 만들어지고, 1948년에는 당시 김상선 교장이 탁구부를 창단하여 지역 탁구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오수철은 군산 출신으로 1948년 전라북도 농구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제14회 런던올림픽에 출전하였다. 그는 1988년 세계농구연맹(FIBA)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으며, 대한농구협회 고문을 지내기도 하였다. (계속)
/조종안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