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기 ‘해방 정국’에도 활발했던 군산의 야구

광복 후 처음 개최된 전국 도시대항 야구대회(1946) 개막식에서 군산팀이 입장하고 있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광복 후 처음 개최된 전국 도시대항 야구대회(1946) 개막식에서 군산팀이 입장하고 있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제26회 전국체육대회가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라는 이름으로 1945년 가을(10월 27일~31일)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된다.

군산에서는 축구팀(일반부)이 지역의 명예를 걸고 출전하여 유학생팀과 수원팀을 차례로 꺾었으나 준결승에서 경성구락부에 0-1로 석패한다. 남자 농구팀(일반부)은 재영(載寧)팀에 21-37로 패하였다.

군산 야구팀(일반부)은 전라북도 대표로 출전, 예선에서 한영(韓映)팀을 18-8로 물리친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만난 대전팀에 4-10으로 대패, 3위를 차지한다.

끊이지 않는 테러와 이념 갈등으로 온 나라가 불안했던 해방정국, 인플레와 불황까지 겹쳐 총체적으로 위기였던 혼란기임에도 군산은 야구, 축구, 농구, 정구, 육상 등 다양한 종목에 출전하여 시민의 체육 열기를 반영하였다.

당시 일반부 야구팀 진용은 감독 김수복, 선수 이완동(주장), 최문보, 양태수, 이용준, 김수복, 김수연, 백판덕, 김수한, 한명수, 전익배, 서병철, 김태종, 임영권, 황용곤 등이었다. 그중 최문보 선수는 1950년대 실업야구대회에서 항상 상위권에 들었던 남선전기(한국전력 전신)팀 1루수로 맹활약하였다.

광복을 맞은 1945년, 그해가 조선체육회 부활을 신호로 체육계 재건을 시작하는 해였다면 1946년은 경기단체들이 정비되고 각종 체육행사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해였다. 육상을 필두로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주요 경기가 시즌 초부터 ‘제1회 대회’라는 명칭을 내걸고 개최됐으며 3·1절 경축대회, 8·15해방 1주년 기념대회 등이 잇따라 열렸다.

한국에 진주하는 미군의 영향을 받아 야구 경기가 다시 활기를 띠었다. 또한, 올림픽 정신을 국내에 보급 발전시키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하는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창설과 더불어 국제무대 진출 통로도 마련된다.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구장 1960년대)(출처: 군사 야구 100년사)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구장 1960년대)(출처: 군사 야구 100년사)

조선야구협회와 <자유신문사>가 공동 주최하는 제1회 전국도시대항 야구대회가 1946년 6월(7일~12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다. 이 대회는 해방 이후 정기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야구대회 효시로 전국에서 11개 도시(경성, 부산, 인천, 군산, 전주, 마산, 광주, 대구, 대전, 개성, 춘천) 팀이 참가하였다. 전북에서는 군산과 전주팀이 출전했으나 두 팀 모두 1회전에서 탈락한다. 전주팀은 마산팀에 2-4, 군산팀은 준우승을 차지한 경성(서울)팀에 2-3으로 패한다.

열화와 같은 성인야구의 인기에 힘입어 개최된 ‘전국도시대항야구대회’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1950~1953)으로 3년 동안 중단됐다가 1954년 <한국일보사>에 의해 부활하여 1959년까지 이어진 당대 최고 권위의 사회인 야구대회였다.

1946년 9월 15일 개최된 제1회 전국중등야구선수권대회 준준결승전(경기중-동산중) 경기를 경성방송 윤길구(尹吉九) 아나운서가 광복 후 최초로 라디오를 통해 중계방송을 해서 화제를 모았다. 또한, 9월 28일은 미군정청이 경성부를 경기도에서 분리해 서울특별시로 승격한 날이며, 경성운동장도 10월 1일부로 서울운동장으로 개칭하였다.

1946년 10월,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발족을 앞두고 개최되어 ‘조선올림픽대회’로 불리기도 했던 제27회 전국체육대회에 군산상업학교 야구팀이 출전하여 경남중에 6-7로 아깝게 졌다. 28회·29회 대회는 군산중학교, 30회·32회 대회는 일반부 야구팀이 참가하였다. (제31회 전국체육대회는 한국전쟁으로 열리지 못했음)

1947년 7월 3일, <동아일보>가 주최하고 조선야구협회가 주관하는 제1회 전국지구대표 야구 쟁패전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군산, 대전, 광주 등 7개 도시 팀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대회 목적은 조선 야구의 향상 발전과 지역 간 친목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군산팀은 이 대회에 전북 대표로 출전하였다. 당시 언론들은 “역전의 맹장(군산팀)은 그 역사에 부끄럽지 않게 노련한 전술과 단련된 기술을 다하여 경기에 임하겠지만, 신진들의 왕성한 패기와 부풀어 오르는 투지를 무기 삼아 우승을 목표로 노장팀에 육박하게 될 것”이라며 “이러한 의미에서 일찍이 전북의 강호로 지명되는 군산팀의 선전이 기대된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관중들도 군산팀에게 많은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회전에서 부산팀에 1-9로 대패한다. 당시 군산팀 진용은 장준식(단장), 김□연(감독), 황 동(주장), 최문보·양태수(투수), 이완동·한완섭·김태준(포수), 황 동·홍철표(일루수), 양태수(이루수), 김진봉(삼루수), 김수운·김수한(유격수), 한명수(좌익수), 김수한·전익배(중견수), 김암천(우익수) 등이었다.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제26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 장면. 태극기를 들고 입장한 손기정 선수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치고 있다(출처=군산 야구  100년사)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제26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 장면. 태극기를 들고 입장한 손기정 선수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치고 있다(출처: 군산 야구 100년사)

제2회 월계기쟁탈 전국도시대항 야구대회가 1947년 8월 7일~13일 <자유신문사> 주최로 전국 각지에서 10개 도시(서울,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군산, 전주, 목포, 마산)팀이 출전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히 열렸다. 이 대회 우승은 인천이 차지하였다. 1회 대회(1946)에 이어 2회 대회에도 참가한 군산팀은 2회전에서 부산팀에게 0-15로 완패하였다.

1948년 군산체육회는 <군산민보>와 공동으로 호남도시대항 및 중등야구 쟁패전을 시내 공설운동장에서 5일 동안 개최하였다. 4개 도시팀과 4개 중등팀이 참가하여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열전을 펼친 결과 도시팀은 대전, 중등팀은 군산중학이 우승하였다.

당시 군산중학 야구단은 황 동(감독), 정윤기(매니저), 이상래(부장), 구한섭(주장) 외 선수 최명보, 김우철, 노재옥, 조상기, 이순철, 최문길, 이상래, 최동현, 홍종팔, 조성현 등으로 짜여있었다.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세계만방에 선포한 해이자, 처음으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런던올림픽에 참가한 역사적인 해였다. 조선체육회는 그해 9월 3일 종로청년회(YMCA) 강당에서 임시 평의회를 열고 개정된 헌장에 따라 명칭을 ‘대한체육회’로 개칭한다. 대한민국 국호를 따른 것이었다. 이어 체육회 산하 경기단체도 ‘조선’에서 ‘대한’으로 개명을 의결한다. 이후 대한체육회 산하 단체들은 모든 행사에 ‘한국’ 또는 ‘대한’을 붙여 개최하였다.

군산체육회는 1949년 6월 12일 군산 야구계 공로자 ‘양태보 추도 야구대회’를 군산중학교 야구장에서 개최한다. 군산 부청, 조선운수주식회사(丸星·마루보시) 군산지점,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대한통운 전신) 군산지점, 군산중학교 등 4개 직장팀과 군산·이리(익산)팀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조선운수와 군산중학이 공동우승, 도시는 군산팀이 우승을 차지하였다.

군산중학교 야구팀은 1949년 군산체육회가 개최한 8·15경축 야구대회(시내 학교와 직장팀 다수 참가)에서도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그해 8월 15일은 1910년 군산이 전북에서 가장 먼저 부(府)로 승격됐다가 시(市)로 개칭된 날이었다. 군산시는 1995년 옥구군(沃溝郡)과 통합, 오늘에 이른다.(계속) 

/조종안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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