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일 전 KBO 총재 대행의 야구 인생② 창단 1년만에 전북 대표로 전국대회 참가

이용일 경성고무 사장이 거금(2000만원)을 쾌척했다는 소문과 함께 군산남중·상고 야구부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자 서울로 진학했던 군산중 졸업생 가운데 두 명이 다시 내려와 합류한다.
정읍에서 노석균, 전주에서 나창기·김준환 등이 군산상고에 입학한다.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김봉연도 전주북중에서 군산남중으로 전학하는 등 우수한 유망주들이 모여들었다. 김일권, 송상복(스마일 피처), 양기탁, 양종수 등은 군산남중 창단 멤버다.
군산상고 야구부가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규모 대회에 출전해서 중간에 탈락해도 이용일은 선수들을 곧바로 내려보내지 않고, 며칠씩 머물게 하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의 고교 강팀들과 친선게임을 하거나 일본 고교야구 상징인 갑자원(甲子園) 대회 우승팀 경기를 관람시키는 등 시골학교 선수들의 경험과 시야를 넓혀주기 위함이었다.
이용일은 선수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일본 야구계의 전설이자, 재일교포 야구 영웅으로 불리는 장훈(張勳:1940년~ ) 선수를 군산으로 초대해 시민은 물론 군산상고 선수들과 자리를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군산상고는 창단 1년만인 1969년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국내 고교야구 정상 대열에 뛰어든다. 그해 봄 전주상고를 6-0으로 물리치고 전국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것. 9월에는 지역 예선에서 전주상고를 1-0으로 물리치고 전국에서 15개 팀이 참가하는 제23회 황금사자기 대회에 출전한다. 그러나 10월 6일 배문고와의 경기에서 안타 10개(배문고 9개)를 기록하고도 2-4로 패한다.
이날 군산상고는 1회 초에 2점을 내주고 1회 말 4안타를 집중시켜 2점을 만회한다. 이어 2회에서 1사 주자 2·3루, 3회에 노아웃 주자 1·2루, 5회에 2사 만루, 7회에 노아웃 주자 1·2루 등 여러 차례 찬스를 맞이하면서 역전승의 계기를 만든다. 그러나 견실치 못한 작전과 후속타 불발로 기회를 득점에 연결하지 못하고 패배를 감수해야 했다.
1969년 10월 당시 군산상고 야구부는 김병문(대표), 서창활(감독), 송경섭(부장), 선수= 노석균(투수), 한상선(포수), 김용석, 조준기, 오승열, 한연상(내야수), 소재덕, 김용배, 박만천(외야수), 최종수, 김성태, 하태문, 유희명, 오덕환, 나창기, 김복근, 김갑순, 김주철(후보) 등으로 짜여 있었다.
제24회 황금사자기 대회(16개팀 참가)를 앞두고 있던 1970년 9월 당시 군산상고 진용은 김병문(대표), 최관수(감독), 송경섭(부장), 선수=소재덕(주장) 노석균(투수), 한상선(포수), 김용석, 나창기, 오승열, 하태문(내야수), 김복근, 박만천, 김성태(외야수), 김봉연, 김준환, 한연상, 조준기, 최병태, 유희명, 김용배, 김갑순, 오덕환(후보) 등이었다.

최동현 초대 감독은 1969년 여름 도저히 못 하겠다며 전주 출신 서창활을 2대 감독으로 추천하고, 감독직을 내려놓는다. 두 감독은 2년 동안 토대를 닦으면서 열과 성을 다했다. 선수들 기량도 향상됐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이용일은 선수들이 지방 출신 감독을 신뢰하지 못하는 기미를 보이자 새로운 지도자를 스카우트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1970년 봄쯤 됐을 거야. 그때는 실업야구가 열서너 개 있었는데, 감독들이 나에게 신세를 졌거나 친한 사람들이어서 서울로 올라가 유망한 코치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지. 며칠 지났는데 대한야구협회 전무 김정환이 전화를 해왔어. ‘야! 기업은행 최관수가 은퇴한단다, 마산상고에서 데려갈 모양인데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묻더군. 인천 동산고 시절 유일하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김응용, 백인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이영민 타격상도 받은 야구 천재여서 ‘좋다, 잡아라!’라고 했지.
이튿날 서울로 올라가 최관수를 만났어. 군산이 지방 도시여서 응낙할지 은근히 걱정됐는데 본점에서 허락만 하면 내려오겠다고 하더군. 그 길로 서울대 상대 선배 정우창 행장을 찾아가 ‘군산에서 고무신 장사(경성고무) 하면서 학생 야구를 키우고 있는데, 유능한 지도자가 필요하니 최관수를 보내달라’고 간청했지. 정 선배는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약속하더니 그해 7월 발령을 내더라고. 직책은 기업은행 군산지점 행원이니 월급은 은행에서 받고, 출근은 군산상고 운동장으로 하게 됐지. (웃음)”
“최관수 감독은 통솔력이 뛰어난 진정한 지도자”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최관수 감독 부임을 며칠 앞둔 7월 18일 경성고무(주)에 대형화재가 발생, 공장이 잿더미가 된다. 군산 시민과 관내 초중고 학생들은 경성고무 돕기에 나섰고, 각계에서 의연금이 들어온다. 화재보험도 받게 돼 빠른 복구가 가능했다.
그해(1970년) 8월 6일 자 <동아일보>는 “일제 때부터 ‘만월(滿月)’, ‘삼천리’ 등의 상표로 일본 업자와 경쟁해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무제품 메이커 경성고무는 군산공장이 잿더미로 쓰러진 후 재기(再起)하지 못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각계(各界)에서 의연금이 들어오고 화재보험을 받게 되어 곧 복구 작업에 들어가게 됐다.”고 전한다.
이어 신문은 “경성고무가 설립한 ‘수광(壽光) 장학회’와 군산(群山)의 8개 중고(中高) 및 국민학교(초등학교) 학생들이 군산 공장의 복구를 위해 의연금을 각출하고 있고, 대한화재(大韓火災)로부터 1억 4천만원의 보험금을 타게 되어 군상공장 복구가 예상보다 이른 시일 안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라고 부연한다.
그럼에도 이용일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빠질 거라는 소문이 야구인들 사이에 나돌았다. 최관수 감독에게 다시 생각해보라며 만류하는 야구인도 있었다. 그러나 최관수는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약속을 어길 수 없다며 7월 23일 군산상고 감독으로 부임한다.
“신의를 지키는 최 감독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환영 파티를 열어주고 한국합판, 백화양조, 호남제분 등 크고 작은 기업체와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부탁했지. 최관수 행원이 권유하는 형식으로 예금을 올려달라고 말이야. 반응이 예상외로 좋아서 힘이 나더군. 예금권유 실적 전국 1위 행원으로 본점에서 표창을 몇 차례 받으니까 평소 과묵했던 관수도 신이 난거지.
그뿐 아니야. 운동장에 나가보면 선수들 눈빛부터 달라. 몸놀림도 바뀌고 말이야. 그런데 하루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추석날 선수들이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패싸움을 벌였다는 거야. 경찰도 다녀가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최 감독이 모든 일은 감독에게 맡겨달라고 간청한 뒤 이튿날 선수들을 교실로 불러 야구 배트를 하나씩 주면서 ‘모두 내 잘못이니 내가 벌을 받겠다’면서 엎드렸다는 거야. 누가 감히 스승에게 매질할 수 있겠어. 그러자 ‘너희가 때리지 않으면 나는 이곳을 떠나겠다’고 호통치니까 선수들이 펑펑 울면서 때렸고, 교실이 울음바다가 됐다는 거야···.”
이용일은 “최관수 감독은 치밀하고 통솔력이 뛰어난 진정한 지도자였다. (최)관수가 있었기에 군산상고가 야구 명문이 됐고, 역전의 명수가 됐다”라며 옛일들을 떠올렸다. 그랬다. 비가 온 뒤 땅이 굳는다고 했듯, 그 사건 후 사제지간 정은 더욱 깊어지고, 선수들은 정상을 향해 하나로 똘똘 뭉쳤다. (계속)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직책 및 나이는 2013~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