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군산을 빛낸 역전의 명수들

군산상고 야구부는 최관수 감독 부임 이듬해인 1971년 가을 제52회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창단 3년만의 개가였다. 1972년 여름에는 제26회 황금사자기 부산고와 결승전 9회 말에 드라마 같은 대역전극을 펼치며 정상에 등극한다.
이후 ‘역전의 명수’라는 닉네임과 함께 호남야구 중흥의 기수로 떠오른다. 선수들이 황금빛 우승컵을 품에 안고 금의환향하는 날, 군산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하였고 환호와 박수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 후 역전의 명수들은 해마다 전국규모 대회에서 짜릿한 명승부를 보여주며 결승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최관수 감독 재임기간(1970~1979년) 우승 6회 준우승 5회의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선수들은 국내 명문대학과 실업팀, 프로팀 등에 스카우트되어 중심 타자로 활약한다.
대표적인 클린업트리오는 해태타이거즈 ‘공포의 KKK포 타선(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성한 등)’. 그들은 군산의 위상을 드높였고, 한국 프로야구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군산 시민에게 자부심과 긍지 심어줬던 수많은 역전의 명수들···
그중 나창기(호원대 야구부 감독), 김봉연(극동대 교수), 김준환(원광대 야구부 감독), 김일권(사업), 송상복(사업), 김성한(전 한화이글스 수석코치), 조계현(LG트윈스 2군 감독), 이성일(전북 도의원), 이진영(LG트윈스 주장), 석수철(군산상고 감독) 등을 2년에 걸쳐 인터뷰하였고, 그들의 회고와 기록을 정리하여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 <신문고뉴스>, 월간지 <매거진군산> 등에 연재하였다. 그 기사들을 한곳에 모았다.
나창기 호원대 야구부 감독 ①
군산상고 야구부(감독 석수철)가 오랜만에 군산 시민의 갈증을 해소했다. 1999년 황금사자기 우승 이후 10년이 넘도록 무관(無冠)에 그치다가 제41회 봉황대기대회와 제94회 전국체전 우승으로 2013년 시즌 2관왕을 차지한 것. 군산시와 시민들은 선수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시청에 군산상고까지 카퍼레이드도 벌였다. 석수철 감독만큼 많은 축하를 받은 나창기(63) 호원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만나봤다.

“저는 대학팀 감독이니 객이나 다름없죠. 그럼에도 10년 넘게 군산상고 감독을 했고, 석수철 감독과 오장용 코치는 아끼는 제자죠. 그리고 봉황기는 특별히 애착이 갑니다. 제가 감독할 때(1996년) 우승했고, 오 코치는 당시 포수였습니다. 석수철이 감독으로 부임해서 정상을 차지했으니 의미가 깊죠. 제가 군산상고 3학년이던 1971년 봉황기 대회 때는 우승팀인 경북고와 14회 연장 끝에 0-1로 분패했거든요. 이런저런 사연으로 주위 분들이 축하전화를 많이 해준 것 같습니다.”
그랬다. 1971년 군산상고는 팀 창단 3년 차 신출내기였다. 그럼에도 각종 전국 대회에 전북 대표로 출전, 강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등 고교 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당시 군산상고에서 3할을 웃도는 타자는 나창기, 하태문, 최병태, 김봉연 등으로 고교야구 최강으로 군림하는 데 손색이 없었다. 그해 5월 대통령배 대회에서 처음으로 4강에 올랐고, 가을에는 제52회 전국체전에서 우승, 호남의 기수로 떠오른다.
군산상고 선수시절 별명은 '다람쥐'
나창기 감독(군산상고 야구부 2기)은 지난 2011년 7월 22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펼쳐진 군산상고와 경남고 출신 레전드급 선수들의 추억의 라이벌전 ‘2011 레전드 리매치’에서 군산상고 감독을 맡는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역전의 명수’들 중 맏형이다.
1970년대 고교야구 열기는 실로 대단했다. 대회 하루 전날부터 입장권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서울운동장 매표구에서 꼬박 밤을 새우는 경우도 적잖았다. 1976년 당시 야구 명문 경남고와 군산상고는 제31회 청룡기 결승에서 맞붙는다. ‘무쇠팔’로 불리던 초고교급 투수 최동원이 있던 경남고는 군산상고를 승자 결승, 패자부활전을 거쳐 치러진 최종 결승에서 두 번 모두 꺾고 우승하였다.

35년만에 재현된 추억의 라이벌전에서 나 감독은 김일권-김우근-김성한-김봉연-김준환-조종규-강효섭-정학원-박기수로 이어지는 타선에 조계현을 선발투수로 내세워 짜릿한 역전승으로 그날의 빚을 갚는다. 군산상고 레전드팀은 4회까지 0-4로 끌려가다가 역전의 명수답게 5회 말 공격에서 4점을 뽑아 단숨에 동점을 만들고, 6회 말 3점을 추가 7-5로 승리하였다.
어려서부터 운동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던 나 감독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와 인연을 맺는다.
“전주 중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죠. 야구 글러브가 필요한데 집이 가난해서 구입할 수는 없고···. 그때 급우들이 코치에게 추천해서 선수가 됐어요. 포지션은 투수. 당시에는 작은 키가 아니었거든요. (웃음) 당시 담임선생님 전언에 의하면 졸업 때까지 90전 83승으로 성적도 좋았답니다. 그리고 전주남중 졸업을 앞둔 1968년 군산상고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이듬해 진학하게 됐죠.
군산상고 시절에도 고생을 많이 했어요. 선수들 기숙사(합숙소) 지을 때 현장 일꾼으로 참여했고, 연탄재로 운동장을 고르는 일도 우리 몫이었거든요. 그래도 재학생, 선수들, 선생님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보람을 느꼈죠. 기숙사에 식량이 떨어지면 구루마(손수레)를 끌고 흥남동 부근에 있던 경성고무(주) 직영 방앗간으로 가서 쌀을 몇 가마씩 학교로 실어 날랐는데, 그때 땀 흘리던 일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호남 야구를 23년 만에 4강에 올려놓은 주역되다

나창기는 2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평생의 스승’을 만난다. 야구 천재 소리를 듣던 국가대표 투수 출신 최관수 감독이다. 1968년 군산상고 야구부를 창단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던 이용일 당시 경성고무(주) 사장 초빙으로 1970년 7월 부임한 최 감독은 나 선수에게 “너는 발이 빠르고 감각이 뛰어나니 2루수를 하라”며 ‘다람쥐’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당시 나 선수 신장은 165cm.
나창기 선수는 고교 시절 한 게임에서 도루를 4개나 성공할 정도로 기회에 강했다. 주력도 좋았던 그는 1971년 대통령배 고교 야구대회에서 찬스메이커로 활약하며 4강 합류의 주역이 된다. 군산상고의 4강 진입은 호남의 고교 야구가 전국대회에서 23년 만에 일궈낸 개가였다.
무명이었던 군산상고는 그해 5월 7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제5회 대통령배 쟁탈 전국 고교 야구대회 4일째 경기(준준결승)에서 찬스에 강한 1번 타자 나창기 선수의 눈부신 활약으로 중앙고를 6-0으로 셧아웃시키고 준결승에 진출한다.
중앙고의 압승이 예상된 가운데 벌어진 경기에서 군산상은 나창기 선수가 1회 말과 3회 말 연속 찬스메이커로 나가면서 중앙고 수비진의 잇따른 타임리 에러로 1점씩을 선취, 2-0으로 기세를 올린다. 5회 말에는 9번 김용배의 레프트 오버 2루타를 시작으로 4연타에 1개 희생타로 3점을 추가 대세를 결정짓는다. 이어 군산상은 릴리프 등판한 송상복의 변화 많은 사이드드로 투구로 중앙고의 추격을 따돌리고 완승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전북 야구가 전국의 강자로 올라선 것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초’라고 보도하였다. 이어 신문은 “팀 창설 3년밖에 안 되는 무명의 군산상고가 일약 전국 4강의 하나로 올라선 데는 전날의 명투수였던 최관수 감독의 피땀 어린 지도와 모든 재정적인 뒷받침을 아끼지 않고 있는 팀 창설자 이용일 경성고무 사장, 그리고 야구에 광적인 김병문 교장의 행정적인 뒷받침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룩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 대회에서 나창기 선수는 미기상(최고 수비수에게 주는 상)을 수상한다. 이는 전국 규모 대회에 출전한 호남 출신 선수가 받은 최초 개인상이기도 하다. (계속)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직책 및 나이는 2013~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