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계의 신사’ 김준환 ②
사에끼 회장, 한국 고교 야구팀 초청 밝혀

황금사자기 우승의 여파는 지방의 작은 항구도시 군산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었다. 대한야구협회·동아일보사 공동초청으로 일본 사회인 야구 정상을 달리는 산꼬(三協) 팀이 그해 9월 내한한 것. 산꼬팀은 국내 실업 및 대학팀들과 서울에서 12차전(14일~24일)을 펼친다. 그중 한 게임이 군산상고 교정에서 열렸다. 일본 실업 야구팀의 군산 경기는 광복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일 오후에 열린 경기(산꼬팀-기업은행 1, 2차전) 역시 관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일본 선수들 경기 구경하려는 야구팬들이 군산은 물론, 이리, 전주, 김제, 충남 서천, 장항 등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날 경기에서 산꼬팀은 긴노(金野滿)의 그랜드슬램(만루 홈런)을 비롯해 장단 17안타를 터뜨리며 기업은행을 11-4로 제압한다.
한편 기업은행은 이건웅, 최주현의 홈런을 포함, 9안타 몰아치며 선전을 펼쳤으나 끝내 역부족,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산꼬팀은 이날까지 내한전적 6전 4승 2무를 기록하였다.
산꼬팀과 함께 군산을 방문한 사에끼(佐伯) 일본 고등학교야구연맹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우승한 군산상고 선수 주축으로 한국 고교야구팀을 11월 5일 일본에 초청하겠다고 밝힌다. 사에끼 회장은 군산상고 9명 경북고, 중앙고에서 각 3명씩 모두 15명의 선수를 초청, 오사카(大阪) 지방에서 친선 경기 갖겠다고 약속한다.
산꼬팀-기업은행 경기에 앞서 군산상고는 그해 봉황대기 우승팀인 배명고 야구팀을 초청, 운동장에서 이틀에 걸쳐 경기를 가졌다. 경기결과는 1차전, 2차전 모두 군산상고가 2-1로 승리하였다.
군산상고의 눈부신 활약, 군산을 ‘야구의 도시’로 만들어

1972년 7월, 믿기 어려운 9회 말 대역전극으로 황금사자기 패권을 차지하며 ‘야구는 9회 말 투아웃부터!’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낸 군산상고는 가을에 열린 국회의장배 대회도 우승, 그해 2관왕에 오른다. 이어 제29회 청룡기대회 준우승(1974), 제56회 전국체육대회 우승(1975), 제10회 대통령배 우승(1976) 등 괄목할만한 성적을 거두며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를 배출한다.
군산상고의 눈부신 활약은 군산을 ‘야구의 도시’로 만들었다. 시민의 생활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고등학교 야구대회가 열리면 시민들은 야구장을 찾았고, 전국 규모대회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중앙로, 영동, 평화동 등 시내 중심가는 정적이 감돌았다. TV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다방과 전파상 앞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일부 택시 기사들은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TV 중계를 지켜보며 수준 높은 해설과 이론을 펼치기도.
결승전을 앞둔 날은 시내가 들끓었다. 도지사, 시장 등 각급 기관장들은 축전을 보냈고, 시민의 기대는 월명공원 산책로를 뒤덮은 아카시아처럼 만발했다. 시청 직원들은 환영식 준비에 바빴고, 군산상고 재학생들과 시민응원단은 상경 준비를 서둘렀다. 우승이 확정되면 시내는 온통 축제 분위기. 다방에서 응원하던 사람들은 술집으로 이동, 서울에서 내려온 응원단과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웠고, 이튿날 거리에는 각양각색의 환영 플래카드가 넘쳐났다.
서울에서 내려온 선수들은 35사단 지프에 올라 전주 시내를 가르고,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리는 도민 환영대회에 참석해서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환영대회를 마친 선수들은 오픈카에 올라 전주를 출발하여 이리(익산)에 들렀다가 군산에 도착, 팔마광장, 째보선창, 도선장, 서초등학교를 돌아 우체국, 경찰서, 군산역 로터리, 군산상고, 금광동을 지나 시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꽃가루가 뿌려졌고, 시민들은 환호했으며 선수들은 감격했다.
군산상고의 연이은 우승은 시내 어린이들 꿈까지 바꿔놓았다. 골목의 공터에서는 ‘스트라이크!’ 소리가 요란했고, 차량이 뜸한 도로에는 ‘거리의 야구’가 등장했다. 선수층은 시멘포대로 만든 글러브와 빨랫방망이를 손에 쥔 8~12세 꿈나무들. 그들의 꿈은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스마일피처(송상복), 김성한, 김용남, 조계현, 장호익 같은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 엄마들은 어렵고 복잡한 야구 룰(rule)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아빠들은 꼬마선수들이 자전거를 넘어뜨려도 혼내지 않았다.
김준환 감독이 전하는 70년대 일본 고교 야구

1972년 11월(11일~21일) 일본 오사카(大阪) 중심으로 간사이(關西) 지방에서 열리는 한일 고교야구 친선경기에 참여할 한국 선발팀은 최관수 감독, 선수는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송상복, 양종수, 김우근, 양기탁, 정효영, 조양연 등 대부분 군산상고 소속으로 이뤄졌다. 그해 7월 황금사자기 대회 우승팀 선수들 주축으로 짜졌기 때문이었다.
군산상고 9명, 경북고 3명, 중앙고 3명, 충암고 1명 등 모두 16명으로 구성된 한국 고교선발팀의 원정경기 5차전 종합전적은 4승 1패. 김준환 감독은 “당시 선수들은 강행군 속에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고, 히로시마 상고 학부모회와 군산 출신 일본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며 42년 전 추억을 떠올렸다.
“가는 곳마다 학부모와 재일교포들이 숙소를 제공해주는 등 열렬한 환영을 받았어요. 그때만 해도 일본에는 해방 전 군산에서 태어나 학교에 다녔거나 직장 생활을 했던 일본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고향 후배처럼 무척 친절하게 대해주었어요. 일제강점기 야구 명문으로 알려진 군산중학교(현 군산중·고등학교) 출신들도 찾아와 회식도 시켜주고, 글러브, 야구공, 배트 등 야구 장비도 선물 받았습니다.”
김 감독은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야구 인구가 많은 일본은 오사카 지방 300여 개 고등학교 중 250개 학교에 야구팀이 있었고, 운동장도 완벽에 가까운 시설을 갖추고 있어 부러웠다”며 “경기 때도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이 한국에 비해 높았고, 홈런상도 없었으며, 그래서 그런지 선수들은 단타 위주로 배트를 짧게 잡고 타석에 들어선다”고 부연했다.
당시 신문은 “강행군 원정 속에서도 흐뭇했던 것은 히로시마(廣島)에 새벽 1시에 도착했는데도 히로시마상고 자모회(姉母會)에서 환영 나와 숙소제공 등에 학부모들이 솔선수범했던 것과 나라(奈良) 와카야마(和歌山) 야나이(柳井) 등 한국팀을 유치한 각 고교 교장 및 교사들의 정중한 영접과 대전 선수들이 역(驛)마다 나와서 환송하는 것은 원정의 피로에 청량제가 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역전의 명수’ 탄생 과정, 영화로 만들어져

군산상고의 극적인 황금사자기 우승 이야기는 고교야구 붐을 타고 정인엽 감독에 의해 영화(제목: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로 만들어진다. 이 영화는 1977년 7월 16일 명보극장에서 개봉, 하루 4000여 명이 관람하는 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극장 측이 중간에 ‘관객의 격찬을 받아 장기 상영이 뚜렷한 작품이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상영을 중단하게 됐다’는 짤막한 사과문을 내고 외화를 상영해서 팬들의 반발이 컸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당시 정인엽 감독은 상영이 끝날 무렵 무대에 올라 우수 영화가 극장 측의 횡포로 내일 종영된다고 알리며 ‘우리 영화가 스크린 쿼터제에 악용되고 있다. 국내 영화의 설 땅은 어디냐!’고 절규했다. 이때 관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졌다. 그러나 그는 극장 경비원들의 제지로 끌려 나왔다. 정 감독은 연장 상영 호소가 계속 거부되자 이튿날에도 무대에 올랐다가 극장 측 신고로 서울 중부경찰서에 연행되는 소동을 빚기도 하였다.
드라마틱한 그 날의 역전 우승을 계기로 군산상고 경기가 열리는 야구장을 여름 피서지보다 더 좋아했던 군산 야구팬들은 시내 일원과 월명공원, 군산중고, 군산상고 운동장 등에서 촬영한 영화 상영이 중단됐다는 소식에 ‘차별대우!’라며 분개했다. 일부 열광팬은 중단 사태와 무관한 시내 극장주들을 원망했다. ‘외국영화 안 보기 운동을 펼치자!’는 목소리도 높았다.
진유영, 하명중, 강주희, 이동진 등이 주연을 맡은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연방영화사 제작)는 ‘야구의 천재’ 소리를 듣는 국가대표 출신 최관수 감독이 군산상고 감독으로 부임해서 역경을 이겨내고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는 과정을 그렸다. 월명상고(군산상고) 야구부 감독으로 출연한 하명중은 그해(1977년) 가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23회 아세아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받는다.
나창기 호원대 야구부 감독은 “제일은행 시절 서울 도봉동 성균관 대학교에서 영화를 촬영하는데 도와주라는 최관수 감독님 전화 받고 로케 현장으로 달려가 뒤치다꺼리해주던 일들이 생각난다”며 추억을 되살렸다. 김준환 감독은 “정작 이야기 주인공인 군산상고 선수들은 연습하는 장면을 찍을 때 엑스트라로 출연했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육군야구단 시절 지금의 아내 만나
1973년 군산상고를 졸업한 김준환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붙어 다녔던 김봉연과 함께 연세대학교에 진학하고자 했다. 그러나 희망 사항일 뿐. 이용일 당시 경성고무 사장과 송경섭 야구부장의 강력한 권유로 상업은행에 입행한다. 김 감독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오해는 풀렸지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쉽다”며 여운을 남겼다.
1975년 군에 입대한 김준환은 김봉연을 다시 만난다. 그는 호화 타선의 육군야구단에서 김봉연과 함께 중심 타자로 자리를 굳힌다. 제27회 백호기 대회에서는 13타수 6안타를 기록,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기도. 1978년 상업은행에 복직, 제30회 백호기 우승의 주역이 된다. 눈에 띄는 대목은 고교 때부터 해태 타이거즈까지 계속 주장을 맡았다는 것.
김준환은 육군야구단 시절 휴가 때마다 째보선창(금암동)에 들렀다. 자신을 친동생처럼 아껴주던 한상선 선배(군산상고 야구부 1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바다 낚시도 선창가에 살던 한 선배에게 배웠고, 지금의 아내도 소개받았다”며 사랑하는 애인과 부둣가를 거닐던 옛 추억들을 떠올렸다.
“1976년 연말로 기억합니다. 아내를 ‘이성당’에서 처음 만났는데, 첫눈에 반해버렸어요.(웃음) 다행히 서로 마음이 통해 5년쯤 데이트하다가 1981년에 결혼했죠. 처음엔 처가에서 반대가 심했어요. 저 같아도 반대했을 거예요. 프로야구 출범 전으로, 대부분 부모가 딸을 운동선수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꺼리던 때였거든요.” (계속)
※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직책 및 나이는 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