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빛낸 역전의 명수들: 나창기 호원대 야구부 감독②
“최관수 감독은 진정한 지도자”

최관수 감독은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였다. 언제나 선수들보다 먼저 운동장에 나왔고, 마음으로 가르쳤다. 야구 이론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임에도 그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새로운 기술과 전술을 습득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한 베이스 더 가는 야구를 정착시킨 것도 그였다. 나창기 감독은 “야구감독이기 전에 진정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하며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최 감독님은 선수들에게 욕설은 물론 거친 말을 한 번도 내뱉지 않은 ‘덕장’이셨죠. 최고로 화났을 때 ‘이 녀석이···’ 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요. 선수 개인별 성향을 파악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도 뛰어난 분이었죠. 저도 그분 권유로 투수에서 2루수로 전환했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선택이었는지 모릅니다. 고집을 부리고 계속 투수를 했으면 선수생명이 짧았을 테고, 지도자도 못 했을 겁니다.
제가 2학년(1970년) 추석명절 때였어요. 집에 못 간 선수 몇몇이 막걸리를 마시고 시내에서 소동을 벌였죠. 사태가 심각해지자 최 감독님이 ‘내가 책임지겠다’며 선수들을 교실에 모아놓고 야구 배트를 넘겨주며 엎드리는 거예요. 놀란 토끼가 된 우리는 바라만 봤고, 감독님이 ‘나를 때리지 않으려면 모두 유니폼을 벗어라, 나도 학교를 떠나겠다!’고 하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같은 감독님’을 때렸죠. 그때 송경섭 부장님이 달려와 멈출 수 있었고, 교실은 울음바다가 됐죠. 영화에도 소개됐던 그 얘기는 지금도 동문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습니다.”
최 감독이 얼마나 훌륭한 스승이었는지 보여주는 그 사건은 선수들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하였다. 특유의 카리스마와 경험으로 다져진 최 감독의 지도력은 1971년 가을 전국체전을 시작으로 1972년 황금사자기, 1976년 대통령배 등을 제패하며 호남 야구의 중흥을 예고한다.
특히 부산고와의 결승 9회 말에서 대역전극을 펼쳤던 황금사자기 우승은 ‘역전의 명수’를 탄생시켰고,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한국 고교야구 역사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자신의 모교, 군산상고 감독으로 부임하다

1971년 전국체전에서 기회에 강한 2루수로 명성을 떨치며 모교에 우승의 영광을 안겨준 나창기 선수는 이듬해 군산상고를 졸업하고 제일은행 야구단에 들어간다. 김우열, 이종도, 김차열, 차동열, 권두조, 김종모 등 쟁쟁한 멤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1981년 제일은행을 정상으로 올려놓은 나창기는 그해 도루왕을 차지하면서 선수로서 정점을 찍는다. 그는 프로팀의 입단 제의도 거절한다.
“프로야구 출범을 1년여 앞둔 1981년 당시 저는 제일은행 소속으로 직책은 대리였습니다. 그해 실업연맹전에서 제일은행이 우승하였고, 저는 우승의 주역으로 도루왕도 차지하면서 잘 나갔죠. 그때 프로야구 입단 제의 소식이 들리는데, B급으로 대우해준다고 해서 ‘그러냐며’ 구경만 했죠. 장래를 보장할 수 없는 프로팀에 가겠다고 안정된 직장을 버릴 수 없잖아요. 상고 졸업생 전체에서 성적 상위 5~10% 이내에 들어야 은행에 들어갈 수 있던 시절이었거든요.”
나창기 선수는 1989년 현역에서 은퇴하고 연희동 지점에서 근무 시작한다. 그때 마침 군산상고 야구부가 위기에 처한다. 선수와 학부모가 감독 선임을 두고 옥신각신하였고, 급기야 야구부 해체위기까지 몰린다. 이때 ‘군산상고 야구를 부활시킬 사람은 나창기뿐’이라는 이용일 KBO 전 총재 대행의 강력한 추천을 외면할 수 없어 모교 지휘봉을 잡는다.
“이용일 총재님은 한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분이죠. 군산상고 선수들에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고요. 해외출장 때도 꼭 야구부를 돌아보고 출발하셨고, 귀국해서도 군산에 도착하면 운동장에 오셔서 상황 파악과 선수들 격려하고 회사로 가실 정도로 애착이 강하셨죠. 제가 군산상고 감독을 할 때도 그분이 경기장에 모습만 드러내는 것으로 선수들에게 힘이 됐습니다. 그분이야 잠시 구경삼아 오셨겠지만, 우리에게는 바람막이가 됐던 것이죠.”
봉황대기와 황금사자기 우승, 최관수 감독 ‘조언’이 원동력

나창기 감독은 부임하던 해(1991년) 가을 전국체전 3위를 시작으로 1992년 화랑기대회와 1993년 청룡기대회, 1993년 전국체전에서 준우승을 차지, 옛 명성 되찾기에 불씨를 당긴다. 1996년에는 봉황대기대회 우승기를 거머쥐며 10년 만에 모교에 영광을 안긴다. 이어 군산상고는 1998년 전국체전과 1999년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제3의 전성기를 맞는다.
“제가 제일은행 소속일 때 최관수 감독님이 파킨슨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김봉연, 김준환, 김성한 등 군산상고 후배들과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1년에 몇 차례씩 뵈었죠. 모교 감독으로 부임해서도 최 감독님을 자주 뵈었습니다. 거동이 불편함에도 운동장에 자주 나오셨거든요. 하루는 운동장 바닥에 ‘찬스 때 대타 활용을 잘하라!’라고 쓰시는데 울컥 눈물이 나오면서 힘이 솟더군요. 결국 1996년 봉황대기대회 우승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1996년 9월 추석 명절을 앞둔 어느 날. 제26회 봉황대기대회 우승기를 거머쥔 군산상고 선수들과 나창기 감독이 투병 중이던 최관수 감독 집을 찾아가 인사드리는 모습이 담긴 1시간짜리 TV 프로그램이 방영되어 군산 시민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1999년 9월 6일 오후 2시 동대문야구장. 그해 고교야구 왕중왕을 가리는 제53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군산상고-부산상고)이 열렸다. 경기가 TV로 생중계된 그날 군산 시내와 학교는 축제 분위기. 단체로 상경한 군산상고 재학생 500여 명은 사물놀이를 앞세워 응원전을 펼쳤고, 동문 600여 명도 1루쪽 관중석에 모여 자체 응원에 열을 올렸다.
2회전부터 3경기 연속 역전승을 거둔 군산상고는 청소년대표 왼손 에이스 이승호의 완투를 앞세워 부산상고를 11-3으로 누르고 13년 만에 황금사자기를 품에 안았다.
군산상고는 1회 톱타자 이대수가 몸에 맞는 볼로 나간 뒤 박원대의 희생번트 때 부산상고 투수의 송구 실책으로 만든 무사 1, 3루에서 김상현의 2루타로 두 점을 선취하며 경기를 쉽게 풀어나갔다. 8회에는 네 개의 안타와 4사구 두 개를 묶어 5득점, 승부를 갈랐다. 이승호는 9회까지 4안타 3실점(2자책)으로 완투하며 승리를 견인하였다.
초고교급 투수로 인정받으며 쌍방울과 입단을 교섭중이던 이승호는 혼자서 5승(4 완투승)을 모두 따내며 우수투수상을 받는다. 결승전에서 4타점(1점 홈런 포함)을 올린 한동희는 최우수선수로 선정됐으며 김선국(0.529) 타격상, 유재건(9타점) 타점상, 감독상 나창기, 지도상 임영무 야구부장, 공로상 고석정 교장 등 개인상 부문도 군산상고가 싹쓸이하였다.

군산상고 황금사자기 ‘포옹’
군산상 우승 포효 “13년만이야”
群山상고 황금사자기 입맞춤
군산 온통 축제 도가니
群山상고 釜山상고에 융단폭격···11-3 우승
역시 군산상고··· ‘야구 명가’ 우뚝
13년만에 정상 탈환 ‘감격’
황금사자는 군산商을 택했다
1999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군산상고 우승을 알리는 중앙지와 지방지 신문 기사 제목들이다. LG트윈스 이진영을 비롯해 이대수(한화), 정대현(롯데), 이승호(SK), 문규현(롯데), 김상현(SK), 신경현(전 한화) 등을 길러낸 나 감독은 2002년 김용남 후배에게 자리를 내주고 2003년 창단한 호원대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해 오늘에 이른다. 그의 현재 직책은 호원대 야구부 감독겸 스포츠 레저학부 전임교수. 그는 “야구밖에 모르고 살아왔지만, 너무도 멋진 인생이었다”며 자신의 야구 철학을 소개했다.
“야구는 9회를 치르는 동안 한두 번, 두세 번은 반드시 기회가 옵니다. 그 기회를 잘 이용하면 승리하죠. 우리네 인생도 짧든 길든 위기가 따르기 마련인데요.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슬기롭게 넘기면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준비하고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겠죠.” (계속)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직책 및 나이는 2013~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