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사람-유지화 정읍농악보존회장(전북무형문화재 제7-2호)
한 장단에 징을 다섯 번 치는 ‘오채질굿’
동서남북 방향으로 오방진을 지었다 풀었다 하는 ‘오방진굿’ 등
자타가 공인하는 호남우도농악의 거장
-10살 소녀 때 설렘으로 만난 농악
-아홉 분의 스승에게 가르침 받아
-전국 방방곡곡 누비며 후진양성
그녀가 관중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상쇠여서가 아니다. 손짓, 몸짓, 꽹과리나 채의 움직임만으로 농악대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서다. 빠르고 격정적인 휘모리에서는 치열한 전투를 이끄는 장수의 눈빛으로, 느리고 평화로운 굿거리에서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시선으로 농악대의 숨소리까지 능수능란하게 이끌어 내는 게 주특기다.
유지화.
올해 나이 75세. 평생을 농악인으로 살아온 그녀를 처음 본 것은 2018년 6월 22일. 전주기접놀이가 주관하는 전라북도 두레 풍물축제의 일환으로 (사)정읍농악보존회와 정읍시 송산동 일원에서 가졌던 합동공연에서였다. 이날 공연은 수백 년 수령의 정자나무 아홉 그루가 버티고 있는 마을을 방문하는 기접놀이 농악대를 정읍농악대가 마을 입구에서 영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수 킬로미터의 종산, 송령을 지나 송학의 마을회관인 송정회관에서 두 농악대가 어우러지는 순서로 진행됐었다. 공연의 이모저모를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던 필자의 눈에 상쇠로 정읍 농악대를 이끌던 그녀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행렬의 맨 앞에서 상쇠가 농악대를 이끌기에 어느 공연에서든지 상쇠가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날 그녀의 모습은 농악을 온전히 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경지에 이른 진정한 문화재의 모습이었다. 70대 여성인 그녀가 펼치는 농악은 그동안 필자가 보았던 수많은 농악과는 그 격이 다른 것이어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시 <별난 사람>을 취재를 위해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7월 17일 정읍시 정읍사로에 위치한 정읍농악전수회관을 찾았다.
“부포놀이, 거들먹거림조차 흥이 되고 아름답다”
첫 인상에서 구전심수[(口傳心授) :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을 통하여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도록 가르침]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농악을 배운 과정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라 생각한다. 호남우도농악은 가락이 다양하고 화려한 게 특징이다. 거기에 개인놀이가 다양하게 발달했는데 상쇠는 백로나 오리의 깃털로 만든 부포놀이를 한다. 당대에 부포놀이는 부안농악의 나금추(1938~2019)와 정읍 농악의 유지화(1945~)를 꼽는데 누구나 이견이 없다. 그 중 유지화 씨의 부포놀이는 ‘거들먹거림조차 흥이 되고 아름다움이 된다’는 평을 받는다. 거들먹거림조차 아름다워 흥이 되고 아름다울 수 있는 몸짓이 어디에서 나올까? 이는 마음으로 배워 일상에서 몸에 배도록 했기에 이를 수 있는 경지일 것이다.
그녀는 10살 소녀 때 심부름을 가는 길에 농악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됐다고 한다. 어느 집에서 우연히 들려오는 소리에 이끌려 무심코 들어간 자리에서 권유받아 몰래 배우기를 몇 개월 만에 이를 알아챈 어머니에게 죽도록 맞아 물 한잔도 마시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집안의 모진 반대에 가출을 감행해 본격 예인의 길에 접어든 그녀는 26살에 여성농악단을 창단해 이끄는 등 의욕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전국을 유랑하며 공연을 하다보면 객석이 좁을 정도로 잘되는 지역도 있지만 손님이 귀해 손해를 보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거기에 많은 인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다 보면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 종종 환자가 발생해 전북여성농악단, 아리랑여성농악단, 새마을농악단 등 여성 농악단 활동은 처참한 실패를 하고 만다. 이때의 활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결국 우도농악의 명맥을 유지하는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훗날 평가 받게 된다.
아홉 분의 스승들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고스란히 전수

우리 것은 낡고 후진 문화로 치부하며 근대화를 국가발전의 기치로 삼던 시대에 농악을 하는 예인으로 사는 일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운 길이어서 때려치우고 싶은 것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 이었지만 호남우도농악의 내로라하는 아홉 분의 스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그녀인지라 쇠, 장구, 부포놀이 등 여러 분야의 재능이 워낙 출중해 중앙무대에서 활동을 하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읍으로 농악을 배우러 다니던 때부터 거래하던 정읍의 악기상과의 인연은 그때도 이어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정색을 하고는 “인자 정읍 농악은 다 죽어 버렸소. 난다 긴다 하던 분들도 나이 들어 돌아가시거나 농악을 하는 사람이 없어진 게 그만둬 불고 정읍을 떠버렸소. 그래서 사람들이 뜻을 모아 한번 배워볼라고 하는데 가르칠 선생을 구할 수가 없어요. 정읍 와서 우덜 좀 갈켜 주소. 무너진 정읍 농악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어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도 이미‘유지화속에 정읍 농악이 있다’는 세간의 평이 있던 지라 평생을 악기상으로 농악판을 누빈 악기상의 안목은 정확한 것이었다. 간청에 못 이겨 농악을 가르치러 정읍에 와보니 배우려는 사람들 300여명을 모아놨더라는 것이다. 왕성했던 정읍농악에 대한 향수를 가진 노년층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모인 것을 보고 서울에서 정읍을 오가며 열심히 가르쳤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다보니‘정읍농악을 살리자’는 지역 여론이 일면서 정읍 국악원에 정식으로 강좌가 개설되면서 1993년에 정읍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농악은 글케 하문 안 되는 거여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혀야 하는 거여”
그러면서 ‘정읍우도농악보존회’가 설립되고 그녀의 명성으로 인해 우도농악을 배우려는 수강생들이 줄을 잇는다. 수강생들이 생활할 숙박시설이 마땅치 않아 민박을 시켜가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정적으로 농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녀의 그런 각고의 노력과 지역에 모처럼 일어난 농악에 대한 열풍에 힘입어 1996년에 정읍농악은 전라북도무형문화재 7-1호에 지정되고 그녀가 쇠 전수자로 등재되니 정읍으로 거처를 옮긴지 3년 만에 이룬 쾌거인 것이다. 문화재가 되면서 정치권에서도 발 벗고 나서 지상3층의 정읍우도농악전수회관을 짓게 되고 시립농악단 창단까지 이어져 호남우도농악의 본산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녀는 10대 소녀의 설레는 마음으로 농악을 만나 호남우도농악의 내로라하는 아홉 분의 스승에게서 마음으로 쇠, 장구, 부포놀이 등을 배우고 몸으로 익혀 무너진 정읍농악을 일으켜 문화재로 만드는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76세로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대불대학교(세한대학교), 중앙대학교, 정읍호남우도농악전수회관 등에서 왕성하게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 그녀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문화재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와의 긴 대화를 마쳤다.
“내가 여기 정읍부터 목포, 당진, 서울까지 댕기며 갈치다보니 제자덜이 많은데 그 제자들에게 내 스승들이 그랬던 것처럼 큰 나무가 돼주고 싶은 게 내 마지막 바램이여. 사람마다 먹고사는 문제가 젤로 중 한디 이는 농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라 돈이 얽히면 본질을 잃고 문제가 복잡해져.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최고로 경계해야 돼. 그라고 요즘 사람들은 농악을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뎀비는데 농악은 글케 하문 안 되는 거여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혀야 하는 거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2호 유지화 씨의 말이 돌아오는 내내 긴 여운으로 남았다.
/서치식(<사람과 언론> 제6호(2019 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