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사람- ‘삶이 끝날 때까지’...임승팔·이영희 부부의 ‘인간극장’

6년 째 부인 간병하며 종중 일까지

평택 임씨 집성촌인 청양군 화성면 수정리 물안마을에는 .임승팔·이영희 부부의 천사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지은 지 100년이 넘는 임찬주 가옥(충청남도 민속문화재 25호)에는 임승팔(86)씨와 그와 동갑내기 아내 이영희 씨가 함께 산다. 부인 이씨는 6년 전 집에서 개에게 밥을 주다가 반기던 개의 줄에 넘어져 하반신이 마비되고 말았다.

긴 세월 침대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그녀를 극진하게 돌보는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다. 2018년 10월 29일부터 11월 3일까지 KBS 인간극장(4327회- 삶이 끝날 때까지)에 방송되기도 했다. 당시 이 방송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최우수 인간극장 프로로 선정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종중의 시제에 참여한 임승팔 씨. 20여년간 종중회장을 하며 평택 임씨 재실과 ‘임찬주 가옥’을 비롯한 고택 3채를 충청남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게 해 문화유산의 유지와 보전을 국가가 전담하게 하는 등의 활동을 한 임승팔 씨가 시제에 참여한 모습(선 사람들 중 가운데가 임승팔 씨)
▲종중의 시제에 참여한 임승팔 씨. 20여년간 종중회장을 하며 평택 임씨 재실과 ‘임찬주 가옥’을 비롯한 고택 3채를 충청남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게 해 문화유산의 유지와 보전을 국가가 전담하게 하는 등의 활동을 한 임승팔 씨가 시제에 참여한 모습(선 사람들 중 가운데가 임승팔 씨)

필자가 임승팔 씨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2018년 3월 초. 필자의 14대 조(組 )만죽공 서익(1542∼1587년,, 중종 37∼선조 21)의 시제 자리에서였다. 무장현감을 지내던 서익이 1574년 모친상을 당한 절친 임식 씨의 문상을 갔다가 상을 치를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형편을 알게 돼 돌아오는 길로 쌀 삼백 석을 보내주어 무사히 상을 치르게 했다.

평택 임씨 문중에서는 임식 씨의 ‘송파집’등을 통해 이 일에 대해 후손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차 필자의 종중에서 평택 임씨 문중을 찾아 교류를 요청해 이날 임승팔 씨 등 3인의 평택 임씨가 만죽헌 서익의 시제 자리를 찾았던 것이다.

젊은 시절엔 아내에게 자신의 몸조차 온전히 의탁해야 하는 신세가 이제는...

평택 임씨 집성촌인 청양군 화성면 수정리 물안은 여덟 명의 공훈 애국지사가 배출됐는데 그 중 일곱 명이 평택 임씨라고 한다. 그런 충절을 지닌 집안과 400여년 만에 이어진 양 집안의 교류는 시제 답방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교류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 KBS1 ‘인간극장’ 방송화면 캡처
                 ▲ KBS1 ‘인간극장’ 방송화면 캡처

대대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전통을 지닌 부유한 집안의 2대 독자였던 임승팔 씨는 어려서부터 서울로 유학을 가 전통의 명문 경복고를 거쳐 중앙대학을 졸업 하고 뇌전증을 앓던 아버지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고향에서 가까운 예산 농조에 취직했다.

어려서부터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곤 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그에게 충격이어서 백방으로 수소문해 신경외과의 개척자로 초대 서울대학병원장을 지낸 명주완 박사에게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발작 억제제로 발작을 멈출 수 있었다고 한다.

뇌전증을 앓으시던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일부러 고향과 가까운 예산에 직장을 잡아 백방으로 노력해 돌아기시기까지 더 이상 발작이 없게 한 일을 그는 살면서 자기가 한 일 중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연달아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된 3남매를 입양해 키웠고 유괴 된 또 다른 형제(부모 생존 시)를 백방으로 수소문해 찾아내고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노력으로 온전한 4남매를 거두는 등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생활하던 그를 쓴 소리 없이 뒷바라지해낸 아내(이영희 씨)는 그에게는 천사와 같았다.

직장에 종중, 마을일까지 돌봐야 했던 그를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소리 없이 뒷바라지 하던 그의 아내에게 자신의 몸조차 온전히 의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난 저렇게 잘생긴 코를 본적이 없어”

난방으로 연탄을 사용하던 때, 예산 농조(農組) 출장소장으로 근무 하던 중에 숙소에서 일산화탄소중독 사고를 당하게 되는데(응급의료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시절 인지라), 택시로 3시간여 걸려 서울대학병원에까지 가 가까스로 고압산소치료는 받았지만 극심한 기억 상실증과 신경병증의 후유증을 남기고 만다.

집을 못 찾고 대 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상황인지라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그는 이때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게 되는데 아내의 헌신과 노력으로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한다. 지금 아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 비하면 그 어려운 상황에서 다시 건강을 찾는데 절대적인 힘이 되어준 아내에게 한없이 미안할 뿐이라고 그는 말하곤 했다.

“대한민국에서 난 저렇게 잘생긴 코를 본적이 없어! 수재들만 간다는 경복고를 나오고도 서울대에 떨어진 건 저 코에 반한 여학생들과 연애질하다 그렇게 된거여”

처음 찾았을 때 인사하는 필자에게 병상에 누운 아내 이 씨가 한 말이다. 이 씨는 이어 필자에게 “누구 아들인지 인물도 좋다. 장가는 갔어? 사위 삼으면 딱 좋겠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긴 시간 좁은 방에 누워만 있던 분이 처음 인사하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농담을 하며 밝은 표정으로 환대를 받을 줄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격의 없이 대하니 필자도 환자에게 다가가 맞장구를 치며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었다.

누워 지내야 하는 환자들에게 욕창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잘 아는 필자는 환자를 돌보는 그를 보며 그녀가 누워서 지내지만 왜 그렇게 쾌적하게 밝은 표정을 지으며 생활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신혼부부처럼 마주보는 눈길에서 진한 애정이 느껴져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는 아내 이영희 씨. 좁은 방안에 놓인 환자용 침대에서만 6년여를 지냈다.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는 아내 이영희 씨. 좁은 방안에 놓인 환자용 침대에서만 6년여를 지냈다.

부상 초기 5개월 입원 중에 3번 욕창으로 큰 고생을 했던지라 퇴원하며 의료진에게 욕창방지를 위한 주위사항을 충분히 습득하고 환자용 침대를 준비하는 등 철저한 대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 5번 30분씩 정확한 간격을 두고 바르게 앉게 하고 최대한 스스로 관절을 움직이는 운동을 시키고 있었다.

실제 그 광경을 보니 중심을 잡지 못하는 ‘천사’를 자신의 몸으로 부축하고 손으로는 연신 등이며 손, 발 등을 주물러 주었다.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그의 아내는 입으로 연신 그러는 남편에게 씰룩거리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분명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갖은 인상을 쓰면서도 표정은 해맑고 일정한 가락까지 있었다.

그렇게 심한 통증을 수반한 하루 5번의 힘든 운동을 했다.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그 일로 인해 그들이 함께 할 시간을 더 연장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그의 ‘천사’는 어리광처럼 사랑의 ‘욕’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아내를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지탱하며 두 손으로는 연신 등이며 관절을 주무르는 그의 동작은 그렇게라도 사랑하는 그의 천사와 함께 할 시간이 더 길어지길 바라는 간절한 기도라는 생각을 하며 군불이 지펴진 아궁이를 지나 ‘천사’가 사는 고택을 나섰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부부임에도 이들은 막 결혼한 신혼부부처럼 마주보는 눈길에서 진한 애정이 느껴졌다. 

/서치식(<사람과 언론> 제5호(2019 여름))

저작권자 © 전북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