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삶-임양원 회장

2017년 4월 20일 한국소리문화의의 전당 모악홀에서 있었던 기접몽(技椄夢)공연 사진으로 2,200석 메머드 공연장에서 가진 최초의 유료공연이다.
2017년 4월 20일 한국소리문화의의 전당 모악홀에서 있었던 기접몽(技椄夢)공연 사진으로 2,200석 메머드 공연장에서 가진 최초의 유료공연이다.

마을놀이에서 전통예술로 인정받은 전주기접놀이. 전북 전주시 삼천동과 평화동의 여러 마을에서 농기를 가지고 벌이던 민속놀이인 전주기접놀이 과거와 현재, 시간과 장소, 사람과 공연 등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된 바가 없다.

전주기접놀이는 농악・춤・용기놀이・두레로 구성된 전주의 합굿으로 지금도 대보름, 백중 등의 세시(歲時)에 삼천동 일원에서 해마다 정기 공연이 이루어지는 민속이다.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우리의 전통 문화는 산업화 도시화된 현대사회에서는 그 존립 기반 자체가 붕괴되어 소수의 전문가 집단에 의해 공연되며 간신히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전주기접놀이는 실제 농사일을 하시는 자연마을의 80대~90대 어르신들부터 직장인 가정주부, 초등학생 유치원생 까지 참여해 생활 속에서 해마다 정기 공연을 하는 살아있는 민속이다. 박물관의 유물(遺物)처럼 화석화된 민속이 아닌 지금도 생활 속에서 즐기며 전승(傳承)이 이루어지는 살아있는 민속인 전주기접놀이에 대해 3회에 걸쳐 이야기 하고자 한다.

제57회 한국민속예술축제 대통령상 수상하기까지

2017년 4월 20일 한국소리문화의의 전당 모악홀에서 있었던 기접몽(技椄夢)공연 사진으로 메머드 공연장이었기에 많은 출연진과 큰 용기 공연을 넉넉하게 펼 칠 수 있었다.
2017년 4월 20일 한국소리문화의의 전당 모악홀에서 있었던 기접몽(技椄夢)공연 사진으로 메머드 공연장이었기에 많은 출연진과 큰 용기 공연을 넉넉하게 펼 칠 수 있었다.

전주기접놀이는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문화부장관상(경기 포천), 은상(경남 사천), 동상(전남 여수)을 수상한 적이 있다. 세 번의 도전에도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지 못해 전주에서 열리는 제57회 한국민속예술축제 참가를 결정하고 막 연습을 시작한 2016년 1월 필자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임양원(92. 전주시 삼천동) 전주기접놀이 회장을 처음 만났다.

한 마을에 30명씩 4개 마을로 구성된 공연으로 출전하기에 인원이 맞는 마땅한 연습장이 없어 개발 중인 전주 효천지구 공사 현장에서 저녁 시간을 이용해 화요일 풍장패, 금요일 두레패, 토요일엔 총연습을 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연습의 전 과정을 함께 하던 회장을 연습이 끝나고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는 일을 홍보를 맡은 내가 하기로 자청했다.

당시는 전 단원이 일과를 마치자마자 끼니를 거르고 연습에 나와 쉬는 시간에 준비된 김밥과 어묵으로 허기를 달래가며 전 단원이 일치단결해 대통령상을 목표로 맹연습을 하던 때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2016년 5월 21일 전북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전북대표로 확정된 후에는 매주 전북대학 부설 민속연구소의 연습과정 모니터링과 자문, 한국전통문화전당, 전주한옥마을, 삼천동 등지에서의 공연을 통해 실전감각을 익혀가며 고된 노력과 반복된 연습을 이어갔다.

당시 고령인 임양원 회장부터 최연소 단원인 이지훈(11. 초등학생)까지 전 단원이 합심하여 노력한 끝에 마침 2016년 전주에서 열린 ‘제57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는 70년대 초 전주농악이후 전주가 이룬 전통문화도시 전주가 이룬 쾌거였다.

150여명의 단원들이 일치단결해 긴 시간 치열하게 노력해 목표를 이루는 과정 자체가 내게는 감동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90대 단원들까지 하나로 이끌었던 구순(九旬)의 노익장(老益壯) 임양원 회장이 바로 수훈갑이었다. 임 회장의 과거와 현재가 바로 전주기접놀이의 역사나 다름없다.

넉넉한 이해와 포용의 ‘황해론(黃海論)’ 실천

 임양원 회장 가족
 임양원 회장 가족

"황해(黃海)는 그 넉넉한 품으로 중국의 거대한 황화(黃河)를 비롯한 대륙의 오물들을 품어 정화해내는 역할을 묵묵히 합니다. 90평생을 살아보니 다른 사람의 흉허물을 덮어주고 좀 부족한 사람을 품는 사람이 결국 복을 받고 잘 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모쪼록 전주기접놀이 회원들은 서로의 흉허물을 덮어주고 감싸 안는 황해와 같은 너른 가슴으로 회원 간 화목하게 지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구순의 나이에도 정정한 체력으로 150여명 회원의 (사)전주기접놀이보존회를 이끄는 임 회장이 회원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다. 임 회장이 단원들에게 말을 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곤 하는 '황해론(黃海論)'을 대하고 많은 회원들처럼 필자도 ‘나이 드신 분들이 하는 그저 그런 말씀’ 쯤으로 여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접놀이 유래 마을인 ‘함대마을’ 출신인 심영배 기접놀이 대표와 함께한 자리에서 임 회장의 황해론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심 대표는 "회장님의 그 말씀은 경험에서 우러나와 하시는 말씀으로, 6.25때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원수 같은 사람이 실직해 아홉 식구가 식량이 떨어지는 곤경에 처한 것을 알게 되어 큰 도움을 준 일이 있었다“며 그 일은 이 근동에서 유명해 사람들은 ”그 일로 복을 받아 임 회장 자녀들이 다 잘되고 당신도 저렇게 장수하시는 것이라고 말들을 한다"며 내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6.25때 인민군 치하에서 수복되어 부역자를 색출하던 살벌하던 시절, 전주 삼천천변의 칠성뜰에 많은 농토를 소유했던 유력가가 인민군 치하에서 처형당한 뒤 수복되자마자 이 지역에서는 유난히 살기등등한 부역자 색출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유력가의 친척 중 한 사람이 당시 학생이었던 임 회장을 6.25 전 활동을 문제 삼아 연행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한 폭행을 가했다고 한다. 임 회장은 그 곤경에서 여러 사람의 증언과 도움으로 초주검이 되어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임 회장이 전주시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는데,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위안을 삼을 만큼 큰 곤경에 빠뜨렸던 6.25 직후 연행했던 그 사람이 실직해 아홉 식구가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큰 어려움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때마침 당신이 맡은 업무에 계약직 직원이 필요한지라 수년간을 일할 수 있도록 소개해 주어 간신히 생계를 꾸릴 수 있는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가난한 시절, 아내와 노점에서 고생하던 값진 경험, 훗날 큰 도움 

임양원 회장

자신을 사지에 몰아넣은 사람의 곤경을 알고도 도움을 준 회장의 황해론(黃海論)은 그때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내게 큰 울림이 되었다.

임 회장이 과거 전주시청 과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엔 이런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남부시장에 노점상의 난립으로 차량 통행이 어려워 민원이 쇄도해 시장의 특별 지시로 직원들을 데리고 단속을 나갔는데 복숭아 등 과일들을 진열해놓고 아내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어렵던 시절이라 공무원 월급이 박봉인지라 자녀들의 학비가 한창 들어갈 때여서 아내는 전주박물관 부근 과수원에서 낙과(落果)를 주워 머리에 이고 남부시장까지 7Km 남짓의 먼 거리를 걸어 노점에서 장사를 하던 것이었다.

노점상을 단속하라는 시장의 지시를 받고 주무과장으로서 직원들을 데리고 나간 현장에서 단속대상으로 아내를 맞닥뜨렸으니 그 얼마나 딱한 광경이 연출되었겠는가?

그렇게 어렵게 교육시킨 자녀들 중 장, 차남은 박사로 지방대학 교수와 국책연구소 연구관으로, 3남(수의사, 전라북도청 직원), 4남( 행정고시 출신, 중앙부처 과장), 장녀(중학교 교사) 모두 단단히 각자의 몫을 다하고 있다고 하니 세인들이 부러워 할 만하지 아니한가?

지금도 시내버스가 다니지 않는 이른 시간에 택시를 타고 밭에 나가 일하다가 한낮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온다는 임 회장을 박물관 근처의 농장에 주말을 이용해 몇 번 찾은 적이 있다. 지난해 가을 어느 날에는 농가를 찾은 내게 농기구 작업복 등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두툼한 사진 앨범 한권을 가져와서는 “자네가 바빠도 시간을 내서 이것을 전주시 총무과에 제출 좀 하게”하며 건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3회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에 전라북도청 건설과 기원(技員)이던 1963년에 제44회 전국체전의 주경기장으로 사용할 전주종합경기장 건설의 막중한 책임을 맡았을 때의 사진으로 채워진 앨범이었다. 건설과정부터 전국체전 개막식까지 손수 찍어 앨범으로 제작해 보관해오던 것을 애써 찾아내 출품한 것이다. 장비와 자본의 부족을 창의적인 생각과 열정으로 기한 내 완공을 해 전국체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일을 공직 생활의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말하는 그 귀한 기록물은 보란 듯이 대상을 수상했다.

2017년 12월 11일부터 전주시청 로비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별도의 전시공간을 만들고 동영상으로 제작해 상영하기도 했으며 그 귀한 자리에 필자도 일부러 휴가를 내고 참여했다.

“농악에서 소고가 사라졌다, 기접놀이에서 소고춤 살려야”

밭일이 낯설지 않은 시골출신인 필자가 여름부터 감을 수확하는 늦가을까지 회장이 일하시는 농장에서 일을 거들며 인생 역정을 듣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한국민속예술축제 대통령상 수상을 이끈 구순의 회장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농악에서 소고(小鼓)가 사라졌다. 고깔을 쓴 소고가 있어야 전통농악이니 우리 기접놀이는 이 소고춤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그 말을 새겨들었던 기접놀이 소그룹 '계수나무' 회원들이 강사를 어렵게 찾아내 문화센터 자치프로그램에서 5개월여에 걸쳐 강습을 받고 연습을 해 지역 독지가의 후원으로 귀하게 마련된 어르신 농악대 공연에 선보여 큰 찬사를 받았던 적이 있다. 구순의 회장 말씀을 듣고 애써 배워 어르신 농악대의 공연을 더욱 알차게 가꾼 계수나무 회원들의 고깔 소고춤이 그래서 참으로 아름다웠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뉴스가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헛기침 소리만으로도 그 권위를 나타냈던 어른들의 자리는 사라지고 부모자식간의 천륜(天倫)마저 파괴된 시대이다.

자신을 사지에 몰아넣은 사람마저도 품은 넉넉한 품성으로 누구라도 부러워 할 가정을 이루고 책임감 강한 공무원으로 한 평생을 살아 왔음에도 구순(九旬)의 나이에도 장정처럼 기접놀이 보존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구순의 회장은 지금도 이렇게 다짐하곤 한다.

“인륜이 땅에 떨어진 현 시대를 보면서 상생과 협동의 전주기접놀이를 보급하는 일이 인륜을 바로 세우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련다.” 

/서치식(<사람과 언론>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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