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칼럼] 나의 역사학

1.

199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스승님의 글을 재밌어하며 읽다가 뜻밖의 한 대목에 시선이 멈추었다.

선친 이찬갑 선생이 남겨놓으신 <스크랩북>을 여러 권이나 가지고 계신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한 지식인이 신문을 읽으면서 대관절 어떤 기사를 가위로 오려 붙였을까, 그는 거기에 덧붙여 자신의 생각을 무어라고 기록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 무렵 나는 ‘미시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터라, 아직 내눈으로 보지도 못한 그 <스크랩북>이 더더욱 귀중한 자료로 여겨졌다.

여러 해가 지나고 나는 운이 좋게도 서울의 어느 대학교에 교수로 채용되었다. 스승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린 연후 그 <스크랩북>을 보여주시기를 청하였다. 스승님은 댁에서 소중하게 보관하고 계시던 일곱 권의 <스크랩북>을 내눈 앞에 펼치셨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스크랩된 신문 기사는 누렇게 바랬고, 더러는 좀을 먹거나 바스러진 곳도 있었다. 눈여겨 살펴보미 거기에는 스승님의 선친께서 깨알같은 글씨로 적어놓은 독자 평 같은 것이 군대군데 적혀 있었다. 나는 반드시 이 <스크랩북>을 연구하리라 마음 먹었다.

2.

그렇게 하여 한 권의 책이 태어났다. <<그 나라의 역사와 말>>(궁리, 2002)이었다. 책의 부제를 나는 “일제시기 한 평민 지식인의 세계관”이라고 붙였다. <신문스크랩북>의 주인공 이찬갑 선생은 정규 교육을 9년밖에 받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분은 지식인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웠으나, 평생 책을 가까이 하여 스스로를 연마하셨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이셨다.

이 책이 간행되자 어느 기자와 논평자는 이찬갑 선생으로 말하면 당대의 특권층인데 “평민지식인”이라고 부르면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저자인 내가 보기에는 터무니 없는 트집이었다. 이 선생은 평생 어떤 공직도 차지 하지 않으셨고, 사회문화적으로도 이름난 인사라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시골에서 과수원 농사를 지었고, 해방 후에는 몇몇 시골학교에서 단기간 교사를 역임한 것이 이력의 전부였다.

그런 사실을 책에 밝혔는데도, 그들은 이 선생이 남강 “이승훈의 종손”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그가 당대의 유명인사요 특수층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점도 책에서 명확히 설명하였듯,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종손”이었는데, 남강의 종손(宗孫)이 아니라 종손(從孫)이셨다. 정확히 말해, 남강 선생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형님의 큰손자였다. 이찬갑 선생은 식민지의 특권층과는 거리가 멀었고, 스스로도 늘 “평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사셨다.

3.

<<그 나라의 역사와 말>>을 집필할 때 내가 고심한 점은 다른 데 있었다. 주인공 이찬갑 선생의 올곧음이 나에게는 문제였다. 그분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바르고 깨끗하기만 하신 분이었다. 그에게는 인간적 결함이라고 들출 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주저함도 망설임도 자가당착도 모순도 찾을 수가 없는 맑은 삶이었다.

그분은 평범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셨다. 이것은 그분의 강점일 테지만 역사가인 나에게는 오히려 두통거리였다. 사람들은 내 말이 잘 이해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나의 생각은 이랬다. 한 인간의 삶이란 깊이 파내려가다보면 헝클어진 실타래 같은 모습이 보여야 읽기도 좋고 쓰기도 좋을 텐데, 이찬갑이란 인물에게서는 도무지 그런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의 내적 분열을 포착해 그것을 식민지 시대의 고통과 결부지을 수 있기를 바랐던 나로서는 도리어 허망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흐르자 나의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종교를 통해 순화되고 청순한 인격의 소유자를 만난 기쁨에 젖기 시작했다. 차츰 나는 그의 삶에서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종교의 힘이 차츰 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찬갑 선생 덕분에 나는 기독교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을 품었다. 그의 사상적 동지이자 스승이기도 하였던 김교신과 함석헌, 또 그들과 밀접한 관계였던 무교회운동의 선구자들에게서 나는 매력을 발견했였다. 그리하여 그분들이 신앙에 관해 쓴 저작을 구할 수 있는 데까지 찾아서 읽었다. 그분들은 저작도 풍부해서 나는 한동안 많은 기독교 서적을 읽어야 했다.

성경 공부도 열심히 했고, 그들이 관심을 두었던 덴마크의 농촌부흥운동에 관하여도 여러 권의 책을 찾아서 읽었다. 또, 이찬갑 선생이 해방 후 충남 홍성에 만든 풀무학교도 방문했고, 그 학교와 지역에 관한 서적들도 성의껏 구해서 읽었다.

요컨대 이찬갑 선생이 남긴 <스크랩북>을 열자 나는 기독교와 한국 근현대사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 되었다. 나는 크게 변하였다. 그때까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여러 분야가 물밀 듯이 내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밀물의 시간이었다.

4.

이 선생의 <스크랩북>으로 말미암아 나는 여러 해 동안 또 다른 삶의 단계를 맞이하였다. 진실한 한 지식인의 초대가 내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다시 몇 권의 책을 쓰게 되었고, 다른 분들과 힘을 합쳐 몇 권의 책을 만들기도 하였다.

-<<풀무학교를 열며>>, 이찬갑 저, 백승종 해설, 그물코, 2010

-<<기독교학교, 역사에 길을 묻다>>, 박상진 외, 예영커뮤니케이션, 2013(공저)

-<<지역아카이브, 민중 스스로의 기억과 삶을 말한다>>, 사진아카이브연구소 편, 아카이브북스, 2010(공저)

-<<김교신, 한국 사회의 길을 묻다>>,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편, 홍성사, 2016(공저)

-<<소남 이일우와 우현서루>>, 소남 이일우 기념사업회 편, 경진출판, 2017(공저)

-<<한국 사법을 지킨 양심 김병로, 최대교, 김홍섭>>, 법조삼성 평전 간행위원회 편, 일조각, 2015(공저)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50년대의 북녘, 북녘 사람들>>, 에리히 레셀 사진, 백승종 글, 효형, 2000

-<<아버지, 난 누구예요>>, 백승종 편, 궁리, 2000

차례대로 간단한 설명을 붙여보자. 이 가운데는 누구든지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 단 한 권도 없다. 사람이 훌륭해야 좋은 글이 나오는 법인데, 나라는 사람은 망망한 학문의 바다 위에 뜬 작은 조각배와 같은 존재일 따름이다. 마음을 기울여 제깐에는 무슨 일이든 성실하게 마치려고 애를 쓰지만 결과는 늘 빈약하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 머물러도 나는 늘 만족해한다. 내 공부는 자신의 성숙을 바라서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명성과 재산을 얻으려고 하는 공부가 아니다.

맨 위에 적은 <<풀무학교를 열며>>는 풀무학원의 개교사이다. 이찬갑 선생은 동지였던 주옥로 선생의 도움을 받아, 1958년 4월 23일에 충남 홍성군 홍동면 팔괘리에 작은 학교를 열었다. 이 학교는 훗날 제법 이름난 대안학교로 발전하였는데,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찬갑 선생은 큰 뜻을 품고 완전히 새로운 교육을 실천에 옮기려고 궁벽한 시골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개교사를 지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소책자가 간행될 때, 나는 이 선생의 교육사상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그랬기에 모든 일을 그만두고 그 학교가 있는 홍동에 내려가 살았다. 여러 해 동안 나는 그곳에 살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기독교학교, 역사에 길을 묻다>>에 실린 글은 내가 홍동에 살던 시절(2009-2013)의 작은 결실이었다. 박상진 교수(기독교 학교교육 연구소장)와 인연이 닿아서 쓴 글이었다. 박 교수의 요청으로, 풀무학교의 사상적 토대였던 오산학교의 이상촌 운동에 관하여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일제 강점기 평북 오산에서 이찬갑 선생 등이 펼친 농촌운동이 훗날 풀무학교의 개교로 이어졌다는 점을 애써 강조하였다. 풀무학교가 한국사회의 본질적인 개혁에 이바지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나는 이 글을 썼다.

<<지역 아카이브, 민중 스스로의 기억과 삶을 말한다>>에 쓴 글은 또 무엇인가. “농촌 마을의 역사 그리고 아카이브”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 역시 홍동에 있을 때 역사가로서 나의 할 일을 모색한 결과였다. 이 글에서 나는 장차 마을의 역사를 어떻게 연구할지, 어떤 관점과 연구 방법이 가능한지를 탐구하였다.

만약 내가 홍동에 오래 머물게 되었더라면 그 방면에 여러 가지 저술을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는 못하였다. 마을 연구는 한갓 미완성의 프로젝트로 그쳤음에도 중요한 점이 있었다.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내가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이것이 홍동 생활이 내게 선사한 소중한 지적 결실이었다.

<<김교신, 한국 사회의 길을 묻다>>에 한 편의 글을 보태게 된 것도 이찬갑 선생과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에 나는 “자율적 근대를 향한 김교신의 고뇌”라는 작은 글 하나를 보탰다.

김교신 선생은 여러 모로 이찬갑 선생과 달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점은 ‘자율적 근대’에 관한 두 분의 생각이었다. 김 선생은 되도록 한국사회의 전통을 성서적 가르침과 융화하려고 많은 노력을 쏟았다. 그 반면에 이 선생은 성서의 정신을 온전히 받아들여 완전히 거듭난 한국을 꿈꾸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 분의 사상적 입장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도 나는 김 선생의 주장에 더욱더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 글을 쓸 생각을 한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2010년대 초부터 나는 우리의 사상적 전통을 되살리는 길을 찾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소남 이일우와 우현서루>>에는 “우현서루, 근대화 담론의 장을 열다”는 글을 보냈다. 그 시절에 소남 이일우 기념사업회를 이끈 분은 이상규 교수였다. 그분의 권고로, 나는 한말 근대화가 시작될 때 대구의 신흥부호였던 이일우 선생이 어떠한 입장을 선택했는지를 따져보았다. 이일우 선생이 활동하던 때는 요즘 표현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던 긴박한 시점이었다. 보수적 분위기가 팽배한 영남의 한 복판에서, 이일우 선생은 과연 어떠한 역사적 선택을 하였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이글을 쓰게 되었으나, 주최 측과는 뜻이 잘 맞지 않아 글을 보내고도 후회한 기억이 어슴프레 남아 있다.

<<한국사법을 지킨 양심 김병로, 최대교, 김홍섭>>에 나오는 두 명의 인물, 즉 최대교 검사와 김홍섭 판사 부분을 내가 집필하였다. 그들 법조인에 관해서 제법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한국 근현대사회에서 사법부의 역할은 상당하였다. 최 검사와 김 판사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법조인이 호평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최 검사는 친일행적이 시빗거리가 되기도 하였으나 검사로서 강직한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김 판사는 진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자애롭기 그지 없는 인물이었다. 그분들의 저술을 검토하여 사상적 특징을 알아내고, 법조인으로서 그분들이 보인 특별한 활동을 체계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나는 현대한국사회를 좌우한 사법계의 구조적인 문제점에 접근할 수 있었다.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50년대의 북녘, 북녘 사람들>>은 희귀한 북한 사진을 설명한 책이다. 이책이 간행되기가 무섭게 정보기관에서는 그 사진들을 구할 방법이 없겠느냐며 전화 문의를 해올 정도였다.

1950년대 후반 북한에 체류하며 많은 사진을 찍은 에리히 레셀은 탁월한 건축가였다. 그의 펜끝에서 전쟁 후 함흥과 원산이 부활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그가 찍은 낯선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확대해서 살펴보며 1950년대의 북한으로 여행을 떠났다.

독일 튀빙겐 대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그의 아들과 우연한 인연이 닿았다. 그 덕분에 말하자면 횡재를 한 셈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만 해도 북한에 관해 다른 자료는 거의 보지 못한 상태였다. 오직 레셀의 렌즈에 의존하여 그 당시 북한사회를 깊이 들여다 보고자 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여러 모로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사진이라고 하는 시각자료가 담보하는 현장 특유의 생생한 느낌과 감동이 세월의 한계를 넘어 아직도 살아있었고, 게다가 “이방인”인 독일 건축가의 눈을 통해서 북한의 내밀한 풍경을 들여다 보았다는 점에서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특수효과도 있었다고 본다.

이 책을 쓸 때 나는 장차 일어날지도 모르는 정치적 논쟁을 회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관점을 차용하였다. ‘실향민’의 관점에서 북녘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진보’ 쪽의 입장에서는 내 책이 우파적인 편견에 가득 찬 것으로 읽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북한에 관해 처음 내는 책이라, 나로서는 혹여 일어날지도 모르는 정치적 파장을 차단하고 싶었다.

끝으로, <<아버지, 난 누구예요>>는 또 하나의 역사적 실험에 대해서도 설명을 조금 보탠다. 37명의 대학생들과 함께 한국현대사를 미시사의 관점에서 쓴 것이었다. 한 학기 동안 나는 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역사쓰기의 가능성을 탐색했는데, 그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학생들은 각자의 눈높이와 시각을 유지하며 현대 한국사회의 다양한 문제점을 파헤치고 진단했다.

그 당시 어느 일간지도 이 책의 출현을 환영하였다. 미국의 유수한 어느 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김기충 교수도 크게 환호했다. 김 교수는 우호적인 서평을 써서 미국서 간행되는 학술지에 싣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나는 이책을 조금씩 다시 읽는다. 젊은 대학생들이 자신들의 소소한 인생 체험을 솔직 담백하게 잘도 서술하였다. 읽기도 여간 편하지 않은 것 같다. 그들 저자는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되었던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간명하고 날카롭게 분석하였다. 그들의 글을 대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른바 전문적인 역사가란 과연 필요하기나 한 것인가.

5.

이찬갑 선생의 <<신문스크랩북>>은 내 인생에 하나의 변곡점을 만들었다. 그분과의 인연으로 나는 여러 해 동안 한국근현대사의 다양한 측면을 바라보게 되었다. 또, 햇수로도 5년 동안이나 이 선생이 만들었던 학교를 찾아 한적한 시골에서 살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는 누구의 인생에서라도 갑자기 일어날 수 있는 생의 예기치 못한 굴곡들이 겹치기도 하였다.

백승종 교수

결과적으로, <스크랩북>을 만나기 전에는 한국의 역사라면 으레 조선시대만 염두에 두었던 나의 시야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곧 사고의 확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한 가지 유감스런 일이 있기는 하였다. 마을에 관한 연구를 나는 오랫동안 장기적으로 실천하고 싶었으나, 결국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인생은 나의 것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홍동에 체류하면서 나는 “생태주의적 관점”을 역사공부의 구심점으로 삼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더하여 나는 인생의 안착점을 발견하였으니,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행운을 얻은 셈이었다.

/백승종(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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