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칼럼] 나의 역사학

1.

어떤 사물이든지 근본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근본을 떠나서는 아무도 제대로 살 수가 없는 법이 아닐까. 물론 사람의 의지란 대단한 것이다. 그 여하에 따라서 근본도 바뀔 수가 있기는 하다. 그래도 한 삶의 근본적인 질서는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근본은 무엇일까. 옛 사람은 근본이란 한 마디 말에서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유형무형의 유산을 보았다. “과연 그 이에게 어떤 배움이 있다는 말인가.”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누군가의 근본이었다. 그럼 나의 배움은 무엇이든가. 누구에게 배운 그 무엇이 내 삶의 골간일까.

쉽게 대답하지 못할 질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예견된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유무형의 정신적 유산, 유구한 역사를 통해 저절로 형성된 전통사상이 근본이다. 여기서 일일이 그것을 깊게 파헤칠 시간도 능력도 없으니, 대표적인 예로 성리학을 잠깐 들여다보자.

많은 사람이 나의 이런 답변을 싫어할 것이다. 성리학이라면 조선 5백년 동안 백성의 등골을 휘게 만든 장본인데, 하필 왜 그것을 우리의 근본이라고 말하는가. 친구들로부터 이런 비판이 쏟아질 법하다.

2.

역사적으로 이미 낡아버린 이념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와 유관한 사회적 악습과 폐해를 모두 떠올리며 진절머리를 낸다. 당연하고 옳은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유감스런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과거의 유산을 부정적인 눈으로만 바라보면 오히려 스스로가 불행해질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라든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도 우리의 가슴은 회한과 적개심에 가득한가.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극복해야한다는 어떤 강박적인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에는 사회적 악습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또, 예수의 제자들이 무결점의 고상한 종교집단이었다고 볼 수도 없다. 교황청이 세상만사를 주관했던 시대를 우리는 중세 또는 ‘암흑시대’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악의 근원으로 여기지 않는다. 물론 허망하게 쓰러지고 만 고대 아테네의 찬란한 문명을 회고할 때도 패망의 원인을 소크라테스 학파에게 돌리는 법이 절대로 없다.

성리학을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 사상적 정수를 알지 못하면 맹목적인 비판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그런 격이다. 우리는 공자도 맹자도 주자도 잘 모르면서 유학 또는 성리학을 무조건 증오하는 경향이 있다. 젊은이들은 “선비”라는 말조차 혐오하는 경우가 많다. 오랜 시간 동안 나도 실은 그랬었다. 성리학의 부정적인 측면을 고발하는 목소리만 일방적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나의 생각이 점차 달라졌다. 조용히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에는 집에서도 성리학을 부정적 유산처럼 헐뜯지 않았다. 조부님께서도 그리고 윗대 조상들께서도 성리학을 좋아하셨는데, 어찌 그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나중에 철이 좀 든 다음, 나는 <<논어>>와 <<맹자>> 같은 것을 배웠다. 그 때도 사상적 거부감은 별로 크지 않았다. 도리어 인격을 도야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말씀이 많았다. 나중에 다시 유교 경전을 스스로 배우고 남들에게도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그 시절 다시 읽은 성리학 고전에는 두고두고 마음에 새길 글귀가 의외로 많았다.

서양사람들도 자기네의 사상적 전통을 중시한다. 이슬람이나 불교 국가에서도 그들 나름의 근본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을 한다. 유대인을 비롯해 다른 소규모 집단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난 5백 년 동안 온 나라가 존숭한 성리학을 구박할까. 성리학에 매달린 결과 남보다 뒤졌고, 결국 나라까지 망하는 수난을 겪었기 때문이라고들 설명한다. 옳기도 하지만 그른 설명이다.

유대인은 유대교로 인하여 지난 2천 년 동안 얼마나 모진 곤욕을 치렀든가. 근대화에 뒤진 불교와 이슬람은 또 무엇이 어떻게 달랐는가. 그들은 역사의 고통을 겪을 수록 자기네의 근본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그들의 삶을 염두에 둘 때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 더욱 애처롭게 느껴진다.

3.

우리는 성리학과 다시 화해해야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물론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킨 성리학의 폐단과는 영결(永訣)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집집마다 사당을 세울 필요도 없고, 신분적 위계질서라든가 남성 위주의 가부장주의도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럼 우리가 기꺼이 계승할 것은 무엇인가. 유교 또는 성리학의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일 것이다. 맹자는 사회정의를 힘껏 강조하였다. 공자는 학문적 수련과 실천을 일치하려고 노력했다. 주자는 단편적 지식으로서의 유교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일관되고 체계화된 사상으로 되살려내는데 성공했다.

그들의 제자 격인 한국의 탁월한 성리학자들도 훌륭했다. 그들은 사람이 본래 타고난 사회적 지위와 그 위세를 중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라도 끊임없는 학습과 수련을 통해서 인격을 연마하고 지식을 키워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 유학자는 신비주의에 빠져 미신을 숭상하는 법도 없었다. 그들은 만물의 상이한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이 제도화된 차별과 불의에 늪에 함몰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런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가며, 우리 역사상에는 다수의 선구자가 출현했다. 그들의 머리와 가슴에서 새로운 사상과 문물제도가 찬란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삼봉 정도전, 정암 조광조, 율곡 이이,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추사 김정희, 담헌 홍대용, 혜강 최한기, 환재 박규수 등 고귀한 사상가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왔던가.

우리가 전통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도 크게 경계할 지점은 있다. 자신들의 문화전통을 너무 미화하거나, 앞서 살았던 선구자의 사상을 교조적으로 떠받드는 것은 도리어 폐단을 낳는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허물이 있기 마련이고 시대적 한계도 따른다. 그 점을 보지 않으려 애쓰다보면 우리는 다시 역사의 절벽에서 추락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하필 성리학만 전통사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도 좋고, 도교/도가도 부족할 리가 전혀 없다. 무교라고 안 될 일도 아니다. 전통문화와 사상 또는 종교를 일방적으로 폄하하거나, 그와 반대로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태도를 멀리하기만 하면 좋다. 누구의 역사든 그것은 결국 과거의 경험과 전통 가운데서 보편적 타당성을 가진 유산을 살리는 작업인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거기서 아름다운 새 문화의 싹을 길러내려고 역사를 배운다. 역사의 목적이 이 한 가지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역사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위에서 내가 장황하게 성리학을 설명한 것은 그저 한 가지 예를 든 것 뿐이다. 불교, 도교, 무교, 가톨릭, 개신교도 이미 오래 전에 수용한 우리의 사상이요 문화이다. 이들을 고유문화의 일부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

4.

2000년대에 들어서자 나는 전통사상과의 만남을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정감록>도 동학도 미륵신앙도 다 좋으나, 그동안 우리가 외면한 성리학도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내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쪽으로도 몇 권의 책을 쓰게 되었다.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 16세기 큰선비 하서 김인후를 만나다>>, 돌베개, 2003

-<<조선의 통치 철학>>, 백승종 외, 푸른역사, 2010(공저, 문화관광부 우수 교양도서)

-<<조선의 아버지들>>, 사우, 2016(세종 우수 교양도서, 경기도 평택시 ‘한 책’)

-<<선비와 함께 춤을>>, 사우, 2018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사우, 2019

<<대숲>>은 16세기의 문인학자 하서 김인후의 평전이었다. 그를 “선현(先賢)”이라며 무조건 미화하고 떠받들기보다는 그와 저자인 나를 수평적인 관계로 설정하여, 서로 묻고 대답하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사랑해주어서 저자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

<<조선의 통치철학>>은 의욕적이고 유능한 몇 명의 역사가들과 함께 조선시대의 정치사상을 점검한 책이었다. ‘통치 철학’이란 차원에서 최초로 조선의 왕과 성리학자를 만나는 작업이었다. 문화관광부의 우수 교양도서로 선정되었고, 외국어로 번역할 만한 책으로도 뽑혔다. 나는 이 책을 처음부터 기획하였고, 그래서 서문도 썼다. 아울러, 조광조의 통치 철학에 관해서도 부족한 의견을 냈다. 자신의 분수에 넘치는 외람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아버지들>>은 우리 시대에 과연 아버지란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를 따져 묻는 하나의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사우출판사의 문채원 사장님이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에게서 나는 아버지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성공한/실패한 아버지인지를 알아보았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독자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세종 우수교양도서로도 선정되었고, 경기도 평택시민들이 선정한 ‘한책’도 되었다. 그밖에도 많은 영광을 저자에게 안겨주었다. 이책과 함께 시작된 사우 출판사와의 좋은 인연은 지금도 당연히 계속된다.

<<선비와 함께 춤을>>도 우리 시대가 옛 선비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들을지를 검토한 작업이었다. 2005년부터 나는 신문과 잡지에 역사칼럼을 쓸 기회를 많이 가졌다. 크나큰 행운이요,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에 끊임없이 글을 싣는다는 것은 지식인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말 특별히 운이 좋았다. 그렇게 해서 쓴 칼럼 가운데서 조금 더 길게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은 주제와 인물을 선정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이것이 바로 <<선비와 함께 춤을>>이었다.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은 나에게 참으로 소중한 결실이다. 그 시작은 매우 간단한 부탁이었다. 사우 출판사에서 동양 고전 한 권을 간단히 소개하는 글을 써보라고 권유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요령이 없어서 간단 명료하고 감칠 맛 있게 글을 쓸 재주가 없었다. 그 대신에 무겁고 심각한 또 한 권의 책을 지었다.

조선 5백 년 동안 <<중용>>이란 책이 어떻게 읽혔고, 당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따져 보았다. 아마 이런 종류의 책으로는 최초의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 책이 나오자 어느 신문사에서 저자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그 결과 장문의 기사가 작성되었는데, 아마 이후로는 이렇게 좋은 기회가 다시 없으리라 생각한다.

5.

나의 역사공부란 군사독재를 청산하는데 자그만 보탬이라도 되고 싶어서 출발한 길이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역동적인 변화에 나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였다. 다만 자신의 지적 관심을 좇아 여러 나라를 출입하며 읽고 싶었던 책을 싫컷 읽으며 지낸 한가한 세월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몇 권의 책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읽어야할만큼 의미 있는 책은 단 한 권도 쓰지 못하였다. 나의 무능을 실감한다.

학구(學究)로 산 지난 사십 여년이었다. 내 삶을 뒤돌아보면 선조들의 모습이 몇 겹으로 중첩된 듯하다. 무례하고 송구한 말씀이 되겠지만 그분들도 실은 나처럼 사셨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약석(藥石)이 되기를 꿈꾸며 책상 물림이 되셨으나 혼란한 세상을 구하지는 못하셨다. 하나 같이 이름 없는 시골 선비로 늙어가셨던 것이니, 나 또한 그 길을 따라가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사과는 나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

백승종 교수
백승종 교수

공부란 나를 위한 것(爲己之學)이 으뜸이다. 남을 위한 공부(爲人之學)는 그 다음이라고 했다. 나를 위하면서 남도 위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나를 외면하고 남을 위한 길을 선택하면 큰 탈이 생길 수 있다. 여러 모로 부족한 나같은 사람은 자신의 분수를 생각하며 조용히 지내는 것이 조금이라도 허물을 줄이는 방법이다. 이는 공자가 후학을 경계한 ‘자획(自劃)’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안분(安分)’일 것이다.

앞으로도 여명(餘命)이 길다면 또 많은 책을 읽고 쓸 작정이다. 시골의 학구에게 이런 기쁨말고 무슨 큰 즐거움이 따로 있을까 싶다. 부질 없는 신변 여담을 경청해주신 경향의 벗님들에게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백승종(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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