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교사가 추천하는, 이 시대에 읽어야 할 책

'한국 보수는 제멋대로다'
〔서평〕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 한겨레신문사 | 2008.05.
숲에는 온통 탁류가 흐르고 있다. 그 거대한 탁류는 세 가지 냄새를 뿜어내고 있다. '하나'는 공격성마저 띤 뻔뻔스러움이라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어디에서 수치심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둘'은 약삭빠른 냉소가 묻어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셋'은 절망과 체념의 신음소리가 배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정직하고 청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시당하거나 도태되고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이 대우받는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말깨나 하고 글깨나 쓰는 사람은 대부분이 썩어 있고, 그 보다 더 썩은 자들의 뻔뻔스러움과 공격성이 통하고 있는 사회에서 힘없고 돈 없고 이름도 없는 사람들은 절망하고 체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 말머리 글에서
광기어린 독설과 뻔뻔스러움이 판을 치는 한국사회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프랑스라는 거울을 통해 본 한국 사회의 초상>(한겨레출판 펴냄, 2008년 5월 개정판)의 저자 홍세화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세 가지 냄새가 물씬 나는 탁류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숲엔 맑은 물이 흐르고 흥겨운 새소리 바람소리가 나야 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숲은 광기어린 독설과 뻔뻔스러움이 판을 치고 있는 모습은 저자의 말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목도하고 있다.
쇠고기 수입으로 촉발된 촛불시위에 대해 조중동이라는 언론을 중심으로 집회 참가자들이 빨간 물이 든 사람들로 매도되기도 한다. 또 이들은 끊임없이 배후설을 제기하며 선량한 시민들을 압박한다.
여기에 조중동에 광고를 싣지 말라는 시민들의 행위에 대해 불법성을 강조하며 검·경찰이 수사를 한다. 일부 극우세력들은 방송사를 위협하고 진보당사에 난입하여 당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집기를 부수는 행위들이 백주대낮에 일어난다.
한술 더 떠 보수 성향의 목사들까지 나서 촛불 시위 중단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이들에게선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 힘 있고 권력을 쥔 사람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누구를 위한 목회자의 모습인지 심히 염려스럽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말깨나 하고 글깨나 쓰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에 대해 말하는 모습을 찾기는 얼마나 힘든가. 이름깨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학문을 곡학아세하여 권력의 언저리에 기웃거리거나 침묵하는 게 지식인이라 자처한다.
소설가 이문열씨는 아예 드러내놓고 편협한 자신의 생각을 쓸 만한 것인양하며 독설을 쏟아낸다. 이를 보면서 배운 것도 부족하고 돈도 없는 서민들은 촛불 하나에 마음을 담아 외쳐보지만 돌아오는 건 그저 절망과 체념의 한숨뿐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것뿐일까.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의료 노동 그 어느 것 하나 답답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답답하고 우울한 우리 사회의 초상들을 저자 홍세화는 프랑스라 거울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몇몇 모습을 살펴보자.
비정규직의 반동의 칼, 언제든지 나에게 다가올 수 있어
"알아야 한다. 지금 설령 정규직이라 할지라도 반동의 칼이 언제 나에게 다가올지 알 수 없다는 점을. 오늘의 굴종이 내일 나를 향한 칼날을 가는 행위가 된다는 점을. 지금 비정규직에 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내 자식에게 피눈물 흘리게 하는 내일을 물려주게 된다는 점을. 우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하는 까닭은 자명하다. 노동자들에겐 돈도 없고 권력도 없다."
2007년 비정규직법 통과에 대해 저자의 펜은 자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엔 무관심한 우리 모두의 의식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프랑스의 예를 들면서 말이다.
프랑스에서도 2006년 우리와 비슷한(사실 우리보다 나은) 노동유연성 법안이 통과됐다. 집권 우파세력에 의해서다. 통과된 법안의 핵심 내용 중 문제가 되는 것은 26세 미만의 노동자를 최초로 고용하는 경우 2년 이내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해고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이때 프랑스 정부는 24%에 달하는 청년실업문제를 줄일 수 있다는 방안이라는 말을 하며 통과시켰지만 결국 시민들에 의해 철회됐다.
당시 프랑스의 시민들과 대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여 의회에서 통과된 법을 철회시켜 버렸다. 이 비정규직법안이 결국은 미래의 젊은이들과 내 자식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줄 것임을 프랑스 시민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일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대시위를 했지만 결국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에 대해 정규직 노동자들과 대다수의 젊은 대학생들이 자신들을 옥죄일 법안임에도 어떤 문제의식도 갖지 못한 사실에 대해 저자는 무척 안타까워한다.
사실 쇠고기 수입도 마찬가지지만 비정규직법도 현실의 문제이면서 미래의 모습이다. 지금의 나와 우리 자식들을 위험에 빠트릴 요인이면서 미래의 위험 요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60% 가까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채 20% 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과 우리들의 대응방식은 전혀 달랐다. 홍세화는 그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의식의 차이에서 온다. 시민의식과 노동자의식의 차이에서 온다. 우리에겐 부족한 시민의식과 노동자의식을 프랑스 사회 구성원들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은 가졌는데 우리는 가지지 못했다는 시민의식, 노동자의식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쩌면 잘못된 현상을 보고도 행동하지 못하는 의식이 아닐까. 나만, 내 가정만 잘 살고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 그래서 잘못된 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나 몰라라 하는 의식구조, 이것이 그들과 우리들의 차이이고 그 차이가 행동의 유무로 나타난 건 아닐까 싶다.
그럼 우리나라가 추진하고 추진하려 한 교육 정책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어떨까. 한 마디로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영어몰입교육은 성공할 수 없지만, 설령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을 미국인이나 미국 사회 구성원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영어몰입교육을 발상한 위정자들은 인문적 소양이 경제동물의 수준에 머문 수준이거나 이미 미국인이 돼버린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이거나 둘 다 이거나다. 그들이 광우병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 쇠고기 수입을 완전 개방한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영어몰입교육뿐인가. 학교자율화조치로 인해 학교는 학원화의 위험성에 처해 있다. 모든 게 경쟁, 경쟁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의 신봉자들에게 아이들의 행복이나 기쁨은 도외시된 채 오로지 경쟁, 성적 지상주의만이 전부인양 떠들어댄다.
이들에겐 전체 국민의 건강권이나 행복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부 계층의 행복이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일부 보수우익계층의 말과 생각만 대변하려 한다. 이에 대다수의 서민계층은 체념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
사회 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
책을 읽으면서 유난히 크게 깊게 들어온 단어와 말이 있다. '똘레랑스'라는 단어와 '사회 정의가 질서에 의존한다'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낯선 단어와 문장이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내용은 이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똘레랑스는 우리말의 '관용'이란 말과 비슷하다. 타인을 배려하고 나와 다른 생각도 존중해주는 게 저자가 말하는 똘레랑스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듯한 극우세력들에게 똘레랑스가 있을까 하고 저자는 자문하며 이렇게 자답한다. '한국의 극우세력에게 똘레랑스는 없다'고. 그러면서 한국의 보수세력의 실체를 이렇게 비판한다.
"한국의 보수는 제멋대로여서 극우와 자유민주주의 사이를 마음대로 왔다갔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극우와 자유민주주의자로 구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보수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에서도 극우와 자유민주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사실 우리나라에 진정한 보수가 있는지 의문이다. 그럼 '사회 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는 말은 어떤가. 지금까지 우리는 '정의'보다는 '질서'란 말에 익숙해져 왔다. 이번 촛불 집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촛불시위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사회적 정의'보다는 '사회적 질서'를 강조하며 집회참가자들을 불온시했다.
온 국민의 건강권과 주권이 걸린 '정의'보다 교통방해 같은 질서를 주장하며 촛불시위를 당장 중지하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의보다 질서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정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말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사회정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정의는 도외시한 채 오로지 사회질서, 법질서만을 들어왔고 그 질서를 어기는 사람들은 사회정의까지 어기는 사람으로 치부되어 왔다.
이에 사회전반의 공공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정부가 쇠고기 개방, 의료·물·전기의 사기업화를 추진하려 하고, 이름만 바꾼 채 눈속임으로 추진하려하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 학교자율화 등과 같은 정책을 추진하려는 일련 행위들을 저자는 사회정의를 망각한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우리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도 드러난다. 정론인 체 하고, 지식인 체 하며 은근히 보신주의를 꾀하는 우리들의 모습도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 한국인의 잘못된 의식을 비판하는 내용도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일방적인 비판만을 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를, 우리 사람들을 사랑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20여 년을 이방인으로 살아온 홍세화 선생의 글줄기에서 느낄 수 있다.
책을 덮기 전에 긴 여백 속에 아주 작게 그러나 내 눈을, 마음을 오랫동안 잡아 둔 글귀를 읽고 또 읽었다. 우리의 현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두 문장, 그 문장을 소개해 본다.
"한강은 서울을 강남과 강북으로 가르며 흐르고, 쎄느강은 파리를 좌안과 우안으로 나누며 흐른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된 지 60년을 넘겼고 프랑스는 좌우가 공존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
======================================================

백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라
〔서평〕 조선의 이노베이터 <이산 정조대왕>
이상각 지음 | 추수밭 | 2007.07.
나에게 용순검이 있으니
번쩍이는 칼날 길이가 삼 척이로세.
황금으로 갈고리를 만들고
녹련(綠蓮)으로 칼끝을 만들었네.
문득 괴이한 빛을 내뿜더니
두우(斗牛)를 서로 다투며 쳐다보도다.
바다에서는 기다란 고래를 베고
뭍에서는 큰 이리를 잡을 수 있네.
북녘으로 픙진의 빛을 돌아보니
연산(燕山)은 아득히 멀기만 한데
장사가 한 번 탄식을 하니
수놓은 칼집에 가을 서리가 어리누나.
정조가 세손일 때 지었다던 '보검행'이라는 시다. 보검을 치켜들어 자신을 괴롭히던 세력들인 고래와 이리를 베고 새로운 조선이라는 원대한 꿈을 실현하겠다는 이산의 포부가 잘 드러나 있다.
실제로 이산은 24살에 조선의 22대 왕에 오른 다음 세손 시절에 꿈꿨던 이상을 현실로 보여준다.
그 첫 행사가 을묘원행이다. 왕 위에 오른 지 19년만이다. 을묘원행은 조선시대 최대의 행차로 1795년 윤 2월 9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사도세자의 묘인 현릉원 참배와 화성행궁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고 16일 창덕궁으로 돌아오기까지 8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된 행사이다.
그렇다면 왜 정조는 이런 행사를 감행했을까. 효심이 지극하기도 소문난 정조지만 단순히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고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축하하기 위해서만 그랬을까. 아니다.
여기엔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노림수가 있었다. 임금의 자리에 올라 많은 개혁을 통해 조선의 체계를 바꾸는 성과를 올렸지만 그의 적들인 노론벽파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세손 시절부터 수없이 그의 목숨을 노리던 노론은 임금이 된 후에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정조는 자신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노론벽파 세력을 견제하려 한 것이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출중한 임금이면서 비극적인 임금을 들라면 정조를 들 것이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을 끔찍이 아끼던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고, 왕에 오르기까지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정조. 임금이 되어서도 자객이 들고 한시도 맘을 놓지 못한 채 신하이면서 적들인 노론벽파 세력과 싸워야 했던 정조. 그가 왕 위에 오른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이 되자마자 이렇게 외친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죄인이 아닌 죄인 사도세자. 그로 인해 죄인의 아들이 되어야 했던 정조 이산. 그런 정조를 죄인의 올가미에 묶어놓고 숨통을 죄려 했던 노론벽파.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세력들에게 정조가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외친 것은 그들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외치곤 이렇게 마음 속으로 다짐한다.
“아버지,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이제 억울하게 돌아가신 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정조는 그를 몰아내고 죽이려 했던 홍인한, 홍계희 등 홍씨 일가와 정후겸 등 일파에게 사약을 내려 죽인다. 그렇다고 노론벽파의 힘이 약해진 건 아니었다. 그들은 더욱 교묘하게 정조에 대항해왔다. 몇 번의 역모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대적은 나라를 위해서도 백성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순전히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득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선 못할 짓이 없었던 것이다.
백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라
백성들이 원하는 군주란 어떤 사람일까? 훌륭한 지도자란 어떤 사람일까? 과거와 현대라는 시대를 뛰어넘어 간지럽고 배고픈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지금 우리도 그 지도자를 뽑기 위한 상황에 있다.
그런데 지금 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나온 그 사람들은 개혁이란 이름의 정책들을 내놓고 들먹이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엔 백성 아니 국민의 목소리는 없다. 아니 있더라도 있는 자들을 위한 것들은 있어도 이 땅에서 그동안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목소린 온데간데없다.
허면 정조는 어땠을까? 그는 왕 위에 오른 뒤 백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때론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정책을 집행할 때 자신의 실적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잘 살게 하는 데 맞춰졌다. 그래서 때론 위험을 무릅쓰고 기득권자들과 싸웠다. 부정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 자들과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조는 수많은 개혁을 펼쳤지만 백성들로부터 저항은 없었다. 왜? 그의 개혁이 가난하고 소외당한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의 힘든 노력의 결과들은 정조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정조가 죽자 정조와 대립각을 세웠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어린 순조가 친정을 펼치기 전까지 전권을 휘둘렀던 정순왕후는 노론벽파인 김관주, 심환지, 서용보 같은 인물을 전면에 배치하여 정조가 25년 동안 해놓았던 개혁의 물줄기를 철저히 파괴하고 정조 즉위 이전 상태로 돌려놓아 버렸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조선이란 나라의 희망의 촛불도 꺼진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흘러갔다고 생각했던 역사의 모습들이 현재성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사를 만들도록 하는 것은 백성 즉 국민들이다. 그들의 올바른 선택이 우리 역사를 진보하게 하기도 하고 퇴보하게 하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눈 감아 본다. 지금 대통령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애민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하고 말이다. 또 생각해본다. 그들에게 정조의 마음과 생각을 배워보라고 말이다.
======================================================

김홍도와 신윤복의 운명적인 만남
〔서평〕 혼을 그린 두 천재의 이야기 <바람의 화원>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08.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그리움을 부르지요. 문득 얼굴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그립고, 산 그림을 보면 그 산이 그리운 까닭입니다.”
생도청에서 처음 만나 홍도와 윤복이 나눈 대화다. 윤복의 답에 홍도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건 자신의 내면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을 윤복이 다시금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능가할 한 천재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그림의 두 천재인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은 이렇게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리고 그 운명의 끈은 스승과 제자의 모습으로, 사랑하지만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 없는 애절함으로, 때론 서로에 대한 경원의 모습으로 엮어진다.
두 명의 천재, 단원과 혜원 그리고 또 한 명의 천재 정조
사랑을 모르는 자가 사랑을 그릴 수는 없다. 아픔과 슬픔을 모르는 자가 아픔과 슬픔을 그릴 수는 없다. 또 쓸 수도 없다. 비록 그리고 썼다 할지라도 그건 영혼이 없는 화려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을 읽는 내내 줄곧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아마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말하는 세 사람(홍도, 윤복, 정조)의 마음에 절절히 동감했기 때문이리라.
정조는 그림을 통해서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얼굴을 찾고 싶어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초상을 그리다 피살당한 화원들의 죽음의 원인을 알고 싶어 한다.
“사람은 죽고 산천은 변하나 그림은 천 년을 간다. 그림을 아는 그대라면 화원들의 죽음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정조의 명을 받은 두 사람은 은밀히 내사를 한다. 추리소설을 방불케 한다. 다만 일반 추리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두 사람이 그림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묘미는 다른 곳에 있다.
윤복을 향한 홍도의 애절한 사랑의 마음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그러나 그건 마음일 뿐 손을 내밀어 잡을 수 없는 사랑이다. 윤복은 윤복 나름대로 자신의 사랑의 감정과 위선에 가득 찬 당시 사대부들에 대한 비판의 송곳들을 그림 속에 집어넣는다. 그것을 단원과 정조는 짚어낸다. 그림으로 세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시대를 풍미한 천재 풍속화가 김홍도와 신윤복
두 사람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상이하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이른바 동제각화다.
신윤복과 김홍도는 동시대에 활동한 화가지만 화풍은 전혀 다르다. 단원이 서민들의 건강한 삶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면, 혜원은 양반들의 위선적인 면을 주로 그렸다. 또 단원이 주로 남자들을 그린 반면, 혜원은 여자들을 그렸다. 그리고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 단순히 갈색 바탕의 배색에 힘 있는 먹선 위주로 그렸다면 혜원 신윤복은 세련되고 섬세한 필치로 화려한 채색화를 그렸다. 당시 채색화는 도화서 양식엔 어긋난 것이었다.
헌데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의 그림 중에는 제목, 배경, 인물의 숫자나 위치, 동작까지 비슷한 그림들이 있다는 것이다. 김홍도의 '빨래터'와 신윤복의 '계변가화', 김홍도의 '우물가'와 신윤복의 '정변야화' 또 김홍도의 ‘씨름과’와 신윤복의 ‘쌍검대무’ 같은 그림들이다.
우리가 단원이나 혜원의 그림들을 종종 접하면서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것을 놀라울 만큼 엄청난 상상력으로 기막히게 잡아낸다.
이뿐 아니다. 소설은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을 두 사람의 그림을 통해 상세하게 묘파하고 있다. 여기에 궁중 도화서의 생도청, 육조거리 대장간, 우물가의 여인들의 모습과 당시 그림을 수집하는 애호가들의 일상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허면 왜 작가 이정명은 이런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그것도 김홍도의 처지에서 쓰게 되었을까? 그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 천재 화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 얼굴에 관한 아주 길고도 비밀스런 이야기를. 가르치려고 했으나 가르치지 못한 얼굴, 뛰어넘으려 했으나 결국 뛰어넘지 못했던 얼굴, 쓰다듬고 싶었으나 쓰다듬지 못한 얼굴, 잊으려 했으나 잊지 못한 얼굴……. 나는 그를 사랑했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단원과 동시대에 살았으면서도 역사 속에서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신윤복. 도화서 화원으로 속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도화서에서 쫒겨났다는 한 화가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이 작가로 하여금 그를 완벽하게 재현시키도록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조의 말처럼 사람은 죽고 산천은 변하나 그림은 천 년을 간다. 두 사람은 가고 산천은 변했으나 두 천재화가의 그림은 지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대해, 그들의 그림에 대해 많이 모른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고흐와 고갱, 피카소는 아는데 김홍도와 신윤복은 모른다. 아니 아는 것 같은데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두 천재화가의 모습을.
작가는 두 사람의 그림을 통해 그들의 만남과 이별을 가슴 떨리게 그려냈다. 그리고 예인으로서 숙명적인 대결을 펼치는 그들과 그 대결 속에 숨은 사랑을 빠른 속도와 아름다운 문장으로 창조해냈다. 해서 책을 집어든 독자는 읽는 순간부터 한 시대를 풍미하고 영원한 예인으로 기억될 두 천재 화가인 김홍도와 신윤복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억할 것이다. 두 사람의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한 편의 글이고, 그들의 뜨거운 혼이 담긴 그릇이라는 것을.
/김현. <사람과 언론> 2018 창간(여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