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 인터뷰]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백서편찬위원장

'친일 친독재가 어개 펴고 사는 나라' 책 표지
'친일 친독재가 어개 펴고 사는 나라' 책 표지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는 바로 친일 친독재 청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지금도 국립묘지엔 친일파 76명, 12·12 군사반란 연루자 5명 묘가...친일파와 항일독립운동들이 함께 안장, 경악 금치 못할 일”

“나라 운명 좌지우지하는 힘을 가진 정치인들 중 유달리 친일성향이 강한 사람들 많아”

<사람과 언론>은 ‘멀고도 먼 친일 청산, 왜?’를 특별기획으로 마련하였다. 올해는 특히 일제강점기에 창간돼 친일 반민족 행위에 앞장서 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친일세력의 후예들이 여전히 활개 치며 기득권과 주류를 참칭하고 있다. 적폐의 그늘아래 굳건한 뿌리를 내린 채 반복되는 친일세력의 기득권 되물림 현상,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불가역적이고 포괄적인 청산작업이 시급하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여전히 친일 청산은 멀고도 멀다.

이에 <사람과 언론>은 지난 40여년 동안 지역사회에서 친일 청산 운동을 전개해 오자 지난해 ‘친일 ·친독재가 어깨 펴고 사는 나라’란 백서를 발간한 김영만 선생을 초대했다.

‘기억은 잊히지만 기록은 역사가 되며, 역사의 승자는 기록하는 자의 몫’이란 말을 평생 몸소 실천하는 지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운동가이다.

현재 창원시 민주주의 전당 건립추진위원회 상임대표와 민주항쟁 정신계승 시민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경남분부 상임대표 등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김 선생은 올해로 75세.

왕성한 시민사회운동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그는 “이번 총선을 통해 토착왜구세력을 정치계에서 퇴출해야 한다”며 “아직도 친일세력들이 묻혀 있거나 활동내역이 미화된 채 고스란히 존립하고 있는 국립묘지와 각종 친일세력 기념관, 기념비부터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음은 그와 2020년 1월 말부터 2월 초에 전화와 서면으로 이뤄진 인터뷰의 전문이다. 인터뷰는 <사람과 언론> 제8호(2020 봄호)에 게재되었다.  /편집자주

“‘친일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란 해괴한 논리로 기생하며 감염”

Q1. 열린사회희망연대 20주년 기념 백서 <친일 친독재가 어깨 펴고 사는 나라>를 출판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요?

한 시민단체가 일정기간동안 자신들이 했던 일과 그 성과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백서로 출간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저희들도 당연히 그런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 이상의 절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희망연대는 친일 친독재 청산운동을 꾸준히 펼쳐왔고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사실은 청산되어야 할 세력들이 기가 꺾이고 힘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뻔뻔해지고 강해지고 있습니다. 시민들 특히 어린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로 “친독재는 애국”이라는 그들의 해괴한 논리를 끊임없이 감염시키며 세를 확대하여 시시때때로 역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그들의 도전에 이 백서로 경고를 보내며 시민들에게는 지역의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친일 친 독재 청산운동의 기억을 환기시키고 지역사에 관심을 가진 시민이나 학자들에게 객관적인 판단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연구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동안 이런 저런 핑계로 미루고 미루던 백서를 출판하게 된 큰 동기가 되었습니다.

민족 이익보다 미국, 일본 국익에 부역하는 반평화, 반통일주의자들 여전히 기승

Q2.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있으며, 거기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요?

1999년 7월에 창립된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열린사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참세상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연대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입니다. 주요사업으로는 역사바로세우기와 평화운동, 통일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바로세우기의 구체적인 실천사업은 친일 친독재청산운동인데 이 부분은 인터뷰의 주제인 것 같아 따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평화운동의 대표적인 활동사례는 2003년 미국이 대량살상무기를 찾는다며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 희망연대 회원들을 인간방패로 파견한 일입니다.

현지에는 반전평화운동을 하는 국제 평화 운동가들과 함께 조를 나누어 미군폭격기의 목표 지점 중 한 곳인 바그다드 북부변전소에서 인간방패로 활동했습니다. 이어서 한국군 파병반대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 현지에 조사팀을 파견하여 그 결과를 청와대에 직접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희망연대는 한때 전국 언론의 관심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모두 무사히 귀국하기는 했습니다만, 목숨을 걸고 반전평화운동을 몸으로 실천해 주신 세분의 회원들에게 저는 늘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삽니다.

김영만 선생
김영만 선생

통일운동은 북한 바로알기 치원에서 회원들과 함께하는 금강산, 개성, 평양 방문사업을 적극 추진했고 이를 통해 북한 나무심기와 어린이 지원사업 등 남북교류협력사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2002년 부산에서 아시안게임이 개최되었습니다. 희망연대가 각계각층의 시민들에게 제안하여 남한 최초로 북녘 선수들을 응원하는 ‘아리랑 응원단’을 만들었습니다. 마침 아시안게임 제일 첫 경기가 창원운동장에서 열린 북한과 홍콩의 축구경기였고 그곳에서 역사에 기록될 남북공동 응원이 펼쳐졌습니다.

역사바로세우기와 평화, 통일 사업이 각각별개의 사업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다 연결되어 있는 사안들 입니다. 이는 친일 친독재 세력들의 사고구조와 행태를 보면 쉽게 이해됩니다. 이들이 바로 반역사, 반민족, 반민주 세력들이며 우리민족의 이익보다 미국과 일본의 국익에 부역하는 반평화, 반통일주의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저희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들이 만들어 놓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고 우리민족이 분단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갈등과 증오 전쟁의 불안 없이 남북이 공존·공영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하나의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희망연대 창립을 시작으로 이후 7년간 상임대표를 맡아 일을 했고 지금은 상임고문이라는 그럴 듯한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하는 일은 대부분 옛날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실무보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규모가 작은 시민단체의 특성상 실무자의 이동이 잦아 업무연결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인데 처음부터 저가 저질러 놓았던 일이라 그냥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실무자들로부터 배우는 것도 많아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아닙니다.

Q3. 백서에서 “친일 문제는 결코 과거사가 아니다. 친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며 역사”라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희망연대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인 경남, 특히 수부도시인 창원에서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밀레니엄 사업이라는 듣기만 해도 거창한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우리지역 출신으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문화예술인들을 선정하여 천년을 두고 후대들과 시민들의 표상으로 삼고자 기념관을 짓겠다고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그런대 하필이면 그들이 친일 친독재 경력을 가진 문인과 음악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의식 있는 시민들 속에서 그들의 친일 친독재 행위가 회자되기는 했지만 그런 문재가 사회적 이슈가 될 정도로 크게 다루어진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2000년 밀레니움 사업이라며 국비, 도비, 시비 즉 시민들의 혈세로 그들에게 기념관을 지어 헌정한다는 사실에 희망연대를 비롯한 민주·진보 시민단체들이 뜻을 같이해 기념관 반대운동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지역의 토호세력과 기득권세력을 뒷배로 둔 문인단체와 이해가 얽힌 관련집단들이 총반격에 나서게 되면서 그동안 지역사회에 잠재되어 있던 친일 친독재 세력과 친일청산 민주시민세력이 충돌하여 지역사회 전체가 찬반으로 나뉘어 수년간 큰 이슈가 되었던 것입니다. 한창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때 친일청산 운동단체의 명의로 발표한 성명서 하나를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친일 문제는 결코 과거사가 아니다>

친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며 역사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는 단 한 번도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을 제대로 처단하고 치욕의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다.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가 강제로 해체된 통한의 역사 속에서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은 반공, 친미주의자로 둔갑하고, 친 독재 세력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면서 우리사회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교육, 법조계 등 사회 전 부분에서 의기양양하고 기세등등하게 행세해 왔다.

바로 이들이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와 사회제도를 왜곡하면서 국가와 각종 사회조직을 운영하고 통치해온 결과, 지금 우리사회가 앓고 있는 수많은 모순과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과 후유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민중들이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고 있다.

특히 지금 현재 각 지방자치단체나 혹은 법인이나 운영위원회 등의 이름을 가진 민간 기구에서 친일반민족 활동경력을 가진 인사들과 친일 문화예술인들을 기념하고 미화하는 각종사업이 경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지금 이 시점에도 그들의 후예들에 의해 친일반민족 행위가 거리낌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명하는 사례의 일부이다.

그 동안 독립애국지사들을 기리고 기념하는 사업보다는 오히려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기념사업이 질적, 양적인 면에서 압도적일 뿐만 아니라, 학교교육과 일상생활 속에서 그들의 친일행위는 감추어지고 미화, 과장된 업적이나 문화예술 작품을 찬양하는 정보를 훨씬 더 많이 접하다보니 국민들의 의식 속에는 "일제시대 친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느냐" "그래도 과보다는 공이 많다" "작품은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소한 친일행위자로 거론되는 인물이 기념사업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에는 어떤 논리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이처럼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의 각종 기념사업은 진실을 감추고 역사를 왜곡하는 차원을 넘어 국민들의 역사관과 가치관에 심한 혼란을 일으키고 친일에 대한 불감증을 계속 조장해 나간다는 것은 민족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최근 여야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과거사 청산 법'과 관련한 논쟁과정에서 한나라당과 일부언론에서 '정치적 음모론'과 '색깔론'을 들먹거리면서 친일청산이라는 국민의 여망과 민족적 과제를 폄하하고 훼손하고 있다.

이들이 이런 저질 논쟁을 되풀이하면서 노리는 것은 국민들에게 친일청산 논쟁에 대한 지겨움과 혐오감을 심어주려는 부도덕하고 반역사적인 대국민 기만 심리작전을 획책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나라당이 다수였던 지난 16대 국회에서 제정된 누더기보다 못한 '친일 진상규명 법'을 이번 국회에서 개정하자는 데 반대하며 자꾸만 딴지를 거는 자들의 이 비열한 음모가 바로 악질적인 친일반민족행위 그 자체라는 사실에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시대, 어떤 경우일지라도 반민족행위자들은 민족과 조국을 배신하고 자신의 입신만을 도모하는 기회주의자들로서 정의보다는 불의를, 진실보다는 거짓의 편이 되어 강자에 빌붙어 약자들의 피눈물을 짜내는 인류 공동의 적이며 역사발전의 암적 존재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인들에게 경고한다.

만일 이번 국회에서 다루어야 할 친일 진상규명 법 개정 과정에서 정치적 타협으로 예외와 성역을 두게 된다면 이는 반민족, 반 역사에 더하여 반인권, 반인류적 행위를 저지른 자들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친일청산 시민행동연대 준비 위원회'는 우리 후대에까지 청산되지 못한 부끄럽고 불행한 역사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각종 기념사업을 끝까지 반대하고 철폐시켜 나갈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금 전국 곳곳에서 이와 같은 반대투쟁을 결연하게 전개하고 있는 모든 시민사회단체들과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함께 힘을 모아 주실 것을 제안 드리고자 한다.

2004년 9월 2일

친일청산 시민행동연대 준비위원회

 

“박근혜 파면한다는 이정미 판사의 선고를 듣는 순간 눈물이 주르르”

Q4. 선생께서는 전국학부모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경남본부, 열린사회희망연대,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6·15공동선언 실천 남측위원회 경남본부, 친일청산시민행동연대 등 직접 창립했거나 대표를 맡고 있는 단체들이 많습니다. 언제부터, 왜 이런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며, 가장 큰 보람과 성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설명이 좀 길어 질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웃음) 거론하신 단체 대부분은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창립 된지 30년이 넘는 단체도 있고 20년, 10년 또는 2, 3년 전에 만들어진 단체도 있습니다.

그 중 많은 단체들은 제가 손을 땐지 한참 되었고 몇몇 단체는 아직도 제가 관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단체를 만들게 된 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사회 곳곳에 변화와 혁신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그만큼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시민운동에 스스로 몸을 담게 된 것은 제 개인의 삶과 경험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사회의식 같은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 4월 혁명을 촉발한 역사적 사건이 마산에서 일어난 3.15의거입니다.

60년 3월 15일은 제 4대 정부통령 선거일 이었습니다. 이날 마산에서 많은 희생자가 생긴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게 된 것은 독재자 이승만의 자유당 부정선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중학교를 막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이었는데 어쩌다 그날 돌멩이와 총탄이 날아다니는 시위대에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마산은 이 날의 사건으로 완전히 빨갱이 도시로 몰려 그 다음 날부터 죽음과 공포의 도시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 3월 15일 밤 행방불명이 된 학생 김주열이 27일 만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끔직한 모습으로 마산 중앙부두 바다에 떠올랐습니다. 김주열의 시신을 목도한 마산시민들의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해 4.11민중항쟁이 일어나 며칠간 계속된 마산항쟁의 불길이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김주열 시신을 목도한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지금도 그 모습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휴교조치 덕분에 밤낮없이 시민항쟁 속에 섞이어 “살인경찰 잡아내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습니다. 김주열과 저는 마산상고 입학 동기였습니다. 그리고 4년 뒤 대학 저학년 시절이었던 1964년 6.3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참여했을 때 마산항쟁의 경험이 시위현장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건은 1966년 해병청룡부대로 베트남 전쟁에 첨전 하여 겪은 참혹한 전쟁 경험입니다. 전쟁은 어떤 이유로든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온 몸으로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재라는 개념조자 없었던 시절 노동을 하다 몸을 크게 다쳤습니다. 몇 년간 병과 가난에 시달리며 삶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다 문득 이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우리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라는 걸 발견하게 되었고 나와 같은 처지의 수많은 우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1980년, 객지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찾아 온 고향 마산에서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노동자들과 등산회, 한자교실, 노래교실 등 이런저런 모임을 만들어 어울리다보니 그들에게 필요한 일들을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 저를 간첩으로 신고하여 안기부(중앙정보부 후신)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5, 6년이 지난 어느 날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탁 치니 억하며 죽었다”는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보도를 보고 몇 년 전 제가 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분노와 슬픔을 달래려고 지은 노래가 “동지여 내가있다”라는 민중가요였습니다. 그 노래가 입에서 입을 통해 알려져 87년 6월 항쟁을 거쳐 7,8월 노동자 대투쟁 때 전국적으로 많이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동안은 작사 작곡자 미상으로 알려졌던 저의 존재가 그만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바람에 지역에서 공식적인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 세상 직업을 크게 나누면 노동자, 도둑놈, 거지 딱 3가지뿐”

그러던 중 우연히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처하는 교사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정부와 교육 관료들을 상대하느라 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학부모들이었습니다. 잘못하면 교사들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들일 수도 있고, 잘하면 제일 든든한 지지자들이 될 수 있는 학부모들을 조직하는 일이 제 몫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교사들이 해직되었을 때 실제 전국적으로 조직화된 학부모들이 그들의 든든한 동지가 되어주었습니다.

해직교사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고 있을 때 저는 그 분들에게 이런 격려사를 해드렸습니다. “이 세상에 직업의 종류는 수만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직업을 크게 나누면 노동자, 도둑놈, 거지 딱 3가지뿐입니다. 대통령은요? 그들도 잘하면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노동자이지만 재벌들에게 삥이나 뜯는 대통령은 다 도둑놈들입니다.

정치인들은요? 그들 대부분은 권력과 재벌들에게 국물이나 얻어먹고 사는 거지들입니다. 물론 국민을 위해 일하고 싸우는 훌륭한 노동자들도 있지요. 교사 여러분들은 대힌민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2세들을 제대로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자랑스러운 노동자들입니다. 학부모 여러분! 교사들이 도둑이나 거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

말이 너무 길어진 것 같습니다. 단 몇 줄의 이력으로도 빛나 보이는 분들도 참 많던데, 저는 제 경력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마다 몇 줄로 정리를 못해 좀 민망스럽습니다. 거기에다 75년을 살아오면서 자랑스러운 것보다 부끄러운 것이 더 많고, 잘한 일보다 어리석은 일을 더 많이 하며 살아왔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여담이지만 가끔은 공식적인 기관에서 저에게 강의를 부탁하고 강사료를 주겠다며 이력서를 적어 달라고 보낸 그쪽 서식을 보면 저 같은 사람이 적을 난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 강사료 안 받겠습니다. 봉사한 걸로 해 주세요”라고 해서 담당 공무원들을 당황하게 만든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분들을 난처하게 만들어 참 미안했습니다.

비슷한 일이 생길 때 마다 하늘이 저에게 겸손하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만들어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을 겪었지만 60년 전, 어린 학생으로 데모하다 경찰에 쫓겨 남의 집 높은 담을 훌쩍 넘어가 그 집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던 일과 김주열시신을 보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얼마 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자유당원들은 도망가고 경찰들은 시민들의 눈치만 보며 기가 팍 죽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신나고 자랑스럽던지 몸이 공중에 붕 떠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릴 때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마 그런 감정이 보람을 느낀 기분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최근의 활동 중에서 가장 보람된 것은, 당연히 1700만명의 국민이 참여한 박근혜 퇴진 촛불시민혁명에 참여한 일입니다.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이정미 판사의 선고를 듣는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동시에 60년 전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4월혁명이 일어났을 때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오버랩 되면서 1년 뒤 5.16쿠데타가 일어나 학생들에게 “반공을 국시의 제 일의로 삼고....”로 시작하는 혁명공약 6개항을 강제로 외우게 하여 다 외우지 못하면 집에도 못 가게 했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촛불집회를 같이 했던 몇몇 인사들과 곧바로 국립 3.15민주묘지로 달려가 민주영령들을 참배하면서 “이제는 두 번 다시 반동세력들이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온힘을 다해 촛불혁명을 지켜내겠습니다”라는 맹세를 했습니다.

촛불혁명은 촛불정권을 탄생시켰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적폐세력들의 완강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오랜 여망이었던 선거법, 공수처법과 검경수사권조정법, 유치원3법 등 각종 개혁법들이 입법화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성과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친일, 친독재 인사들의 기념관을 만들면 안 되는 이유...

Q5. 백서 1부에서 ‘친일 친독재 청산 20년, 수없이 듣고 수없이 답한 11문 11답’을 소개했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과 답변을 다시 한 번 정리해 주세요.

예, 정말 많이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실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제안이라고 해야 할 내용입니다. 저희들과 생각을 함께 하던 많은 분들도 이 말을 듣고 그럴 듯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아주 설득력이 있는 질문입니다.

책에 쓰인 전문 그대로를 소개 하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특정 문인을 예로 들었지만 모든 친일 친독재 인사들의 경우에도 다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질문: 사람에겐 누구나 장, 단점이 있고, 공과 과가 있기 마련이다. 기념관을 만들고 그 안에 공과를 꼭 같이 전시하면 되지 않겠나?>

친일 친독재 역사청산운동을 해온 20년 동안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친일, 친독재 행위를 부정하거나 억지 주장으로는 기념관 건립이나 존립이 어렵겠다는 판단에서 나온 일종의 타협안이다. ‘과’도 인정하고 ‘공’도 인정하는 이 두 가지를 다 수용하는 기념관을 짓자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매우 합리적인 방안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기념관을 짓는 그 자체가 친일 친독재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일이라고 판단한 우리는 이 논리에 반대했다.

결국 우리의 주장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현상이 지금 이원수 문학관과 마산음악관(사실상 조두남 음악관)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기념관들의 기능이 이제는 친일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크게 일조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원수문학관이 매우 심각하다.

2011년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에서 사회를 보던 모 대학 교수가 이런 발언을 했다. “이원수의 친일은 도도히 흐르는 대하에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을 언론을 통해 전해 듣는 순간 분노보다 먼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기념관이라는 공간에 공과 과가 함께 들어오게 되면 ‘공’은 태산 같이 커지고 ‘과’는 티끌처럼 가벼워 질것”이라며 반대했던 우리의 우려가 사실이라는 것을 그의 입을 통해 확인하게 된 것이다. 실제 자신들이 창원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이원수문학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 곳에는 이원수의 공과 과를 동시에 전시한다면서 ‘지원병을 보내며’라는 동시 한편을 게시해 놓았다.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 높이 군가가 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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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하야 목숨 내놓고

전장으로 가시려는 형님들이여

부대부대 공을 세워주시오.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

굿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이원수는 식민지 조선의 어린 소년들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도록 세뇌하고 있다.

문제는 그곳을 방문하는 시민과 학생들이 그 동시를 읽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이어서 이원수의 변명과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을 비롯한 3명의 문인들이 이원수의 친일은 인정하면서도 은근히 두둔하거나 변호하는 글을 댓글처럼 달아 놓았다. 세 문인들의 글을 문학관측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교묘하게 편집해 놓은 것이다.

즉, 친일은 민족에게 죄를 지은 일이라 생각하고 배운 시민과 학생들에게 이원수의 친일은 당시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였기에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용서해 주고 싶은 측은지심이 일어나도록 유도하는 문학관 측의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이다.

이원수문학관 측의 이런 시도는 아직은 사리분별력이 약한 어린 학생들에게 친일을 마치 길에 껌을 뱉는 정도의 가벼운 경범죄로 인식시키는 짓이다.

여기서 한발만 더 나가면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라 부르고 강제동원 노동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뉴라이트와 반일종족주의를 만나게 된다.

이원수문학관이 큰 문제가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친일, 친독재 인사들의 기념관을 만들면 안 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현재 이원수문학관은 해마다 시로부터 1억 2000만 원이 넘는 보조금과 위탁관리비를 받고 있고 그 금액은 해마다 늘고 있다.

이 돈은 모두 시민의 혈세다. 이런 기념관을 그대로 두는 것은 친일, 친독재가 죄가 되는 것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라는 명분을 만들어 주는 일이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구분 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혼란과 혼돈은 이런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원수문학관은 즉각 폐쇄되어야 한다.

“이원수(아동문학가) 조두남(작곡가) 이은상(시조시인) 장지연(언론인) 남인수(가수) 반야월(작사자) 대표적 친일 친독재자들”

Q6. 책에서 이은상, 조두남, 이원수, 장지연, 남인수, 반야월 등을 친일 인물로 부각시킨 이유는 무엇인지요?

이들은 모두 창원(열린사회희망연대의 소재지)을 중심으로 경남일대의 친일 친독재 문화예술인들이라는 점과 2000년대 들어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시민의 혈세로 그들을 추앙하고 기리는 대규모 기념사업을 경쟁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대상은 이원수(아동문학가,친일) 조두남(작곡가,친일) 이은상(시조시인, 친독재) 장지연(언론인, 친일) 남인수(가수, 친일) 반야월(작사자, 친일) 등이었습니다. 혹시 이름만으로는 잘 모르는 분들이 있다면 그들의 대표작을 들으면 누구라도 “아~ ” 라고 하실 겁니다.

고향의 봄(이원수) 가고파(이은상) 선구자(조두남) 이별의 부산정거장(남인수) 울고 넘는 박달재(반야월) 황성신문皇城新聞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장지연)입니다 이중 몇몇은 교과서에도 실린 이름이고 다른 몇몇은 수없이 많은 대중가요를 불러 인기를 끌었던 국민가수이거나 작사자입니다. 2000년 이전만 해도 이들에 대해 일반 시민들은 이들에 대해 아무른 거부감 없이 그들의 문화예술을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그들의 친일 친독재 행적을 공론화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추앙하는 각종 문화예술단체와 지자체가 하나가 되어 기념관 건립과 대규모 기념행사에 열을 올리는 걸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념반대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동안 숨겨졌던 그들의 반민족, 반민주 행위를 공개적으로 밝히게 된 것입니다.

간추려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원수는 일제 말기 ‘지원병을 보내며’ 와 같은 몇편의 동시와 ‘고도감회古都感懷’와 같은 수필로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찬양하고 일제의 내선일체에 정책에 감화를 받아 일본인 보다 더 일본인이 되고자 하는 그의 글은 일제의 눈으로 보면 최상위 수준이었을 겁니다.

조두남의 ‘선구자’는 어려운 시절 애국가만큼이나 공·사적 행사에서 많이 불린 노래입니다 그러나 선구자는 완벽한 대국민 사기극이었습니다. 작사자 윤혜영은 만주에서 유명한 친일시인이었고 그 가사도 마치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듯 한 내용으로 바꾸었습니다. 제목으로 단 ‘선구자’라는 단어는 우리말이 아니라 일제가 즐겨 쓴 단어로 당시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던 일제의 주구 간도특설대의 군가에서 자신들을 선구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선구자는 일제침략 정책에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 일제가 부여한 칭호였던 것입니다.

이은상의 친독재 행각은 비교대상이 없을 정도로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 1960년 제4대 정부통령선거당시 이승만을 성웅 이순신으로 치켜 새우며 전국유세를 다녔고 박정희 때는 유신지지성명을 발표했고 유신체제를 강화하는 긴급조치 9호 지지를 위한 ‘총력안보국민협의회’ 의장을 맡아 유신권력의 실세로 문화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두환 시절에는 장충체육관에서 당선된 전두환에게 재빠르게 지지, 찬양하는 글을 발표했습니다(정경문화 80년 9월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 이후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이 되었습니다.

장지연은 오랫동안 연론인들의 표상으로 존경받았던 언론인 이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때 황성신문에 실었던 ‘시일야방성대곡’은 교과서에도 나온 너무나 유명한 글 때문이었지요.

그 후 경남 진주의 경남일보사에서 주필로 재직(1909~1913) 할 때 안중근에 처단당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시를 신문에 게재했고 일왕 메이지의 생일을 축하하는 한시를 게재하고 일장기를 싣는 등 친일 흔적을 뚜렷이 남겼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에 많은 친일시와 논설을 쓴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특히 1916년 신임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3.1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한 인물)를 환영하는 친일시를 쓰는 등 친일 언론인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가수 남인수는 일제 강점기때 식민지 조선청년들을 일제 침략전쟁에 내몰았던 ‘혈서지원’ ‘이천오백만 감격’ 등 군국가요와 내선일체를 선전하는 많은 친일가요를 불렀습니다. 반야월도 마찬가지로 ‘일억총진군’ ‘결전 태평양’ 등의 군국가요를 작사하고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진주 MBC에서 해마다 주관하던 남인수 가요제는 진주시민들이 중단, 그러나 창원의 이원수 문학관은 아직 건재”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들 모두는 각자의 영역에서 거목으로 대접받는 인물들이며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발전에 나름대로 공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후학들이나 팬클럽 회원들이 모여 자비로 공공의 장소가 아닌 사유지 안에 기념물을 세우거나 기념사업을 한다면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가 나서서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위에 거론된 인물들의 기념사업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낸 세금으로 기념사업을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기념관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시민들의 존경과 사랑과 추앙을 받는 위인으로 모셔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빈민족 반민주 행위를 한 그들을 표상으로 삼겠다고 기념관을 찾아오는 어린 학생들이 과연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나라가 어려울 때 친일을 하든 친독재를 하든 몸보신하며 적당하게 살다가 시 몇 편 잘 쓰고 유명한 곡하나만 만들 수 있다면 국가와 시민들로부터 이렇게 대접받고 존경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대한민국을 기회주의자들의 천국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기족은 물론 자신의 몸 하나도 돌보지 않고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일제와 싸우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을 생각하면 시민들의 세금으로 이들의 기념관을 짓는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 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한 반대운동 끝에 이은상 문학관과 조두남 기념관을 마산문학관 마산음악관으로 바꾸었습니다. 물론 명칭뿐 만아니라 내용도 완전히 변경되었습니다. 장지연은 서훈이 치탈되었습니다.

반야월 기념공원과 기념행사도 막아냈습니다. 진주 MBC에서 해마다 주관하던 남인수 가요제는 진주시민들이 중단시켰습니다. 그러나 창원의 이원수 문학관은 아직 건재합니다. 창원시에서 이런저런 명목으로 한해 1억 2천만 원이나 지원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며 지금도 폐관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립묘지엔 76명의 친일파, 5명의 12·12 군사반란 연루자 묘가 지금도...친일파와 항일독립운동들이 함께 안장, 경악 금치 못할 일”

Q7. 마산, 창원 등 경남지역 외에도 친일세력들이 아직 많이 청산되지 않고 있는데, 다른 지역의 대표적 친일세력으로 꼽을 만한 인물은 누구라고 보시는지요?

어느 곳이든 아무래도 기념사업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영구적인 문학관이나 음악관과 같은 기념관 논란이 그만큼 큰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경남을 제외하고 비슷한 경우는 전북 고창에 있는 시인 서정주의 ‘미당시문학관’이 2001년에 개관되면서 전북지역의 역사 관련 시민단체들의 반대가 격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 년간의 반대투쟁 끝에 문학관 안에 서정주의 친일 친독재 시 8편을 게시하는 걸로 합의를 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한 곳도 역시 전북지역인데 군산시에 있는 소설가 ‘채만식문학관’입니다. 역시 2001년 개관했고 그 당시 지역 시민단체들이 문학관 명칭변경과 기념사업 중단을 강하게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 졌습니다.

그 외 몇몇 지역에서 친일파들의 동상이나 기념비 등이 문제가 되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부나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기념관을 짓고 큰 말썽이 된 것은 경남과 전북 정도인 것 같습니다.

아마 앞으로는 어떤 지자체에서도 타 지역에서 일어났던 선례를 보고 비슷한 사업을 선뜻 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그런데 친일파기념관 이상의 문제가 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국립묘지입니다. 국립묘지에는 76명의 친일파와 5명의 12·12 군사반란 연루자의 묘가 있습니다. 친일파와 항일독립운동들이 함께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할 일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창룡입니다. 이 자는 김구선생의 암살자 안두희의 배후인물로 지목받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육군중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특무대( 국군기무사령부의 모태)대장이었습니다.

일제의 관동군 헌병으로 복무하면서 해방 전 2년 동안 적발한 항일조직은 50여 개에 달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고 해방 후에는 각종 공안사건을 조작하고 양민학살을 자행했던 자이다. 같은 시기 일제가 독립군을 때려 잡기위해 만든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송석하 신현준 김석범 등 그 외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물들이 수두룩합니다.

백낙준 이선근 정일권 등등 시민단체에서 이들을 이장하라는 요구와 집회가 해마다 있었고 몇몇 정치인들과 함께 친일 빈민족 행위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고, 강제 이장을 가능케 하는 법안이 20대 국회에 발의 된 것은 지금까지 모두 5번째라고 하는 데 이번에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혼란과 혼돈의 시작은 바로 국립묘지가 아닐까요?

“나라 운명 좌지우지하는 힘을 가진 정치인들 중 유달리 친일성향이 강한 사람들 많아”

Q8.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친일세력들이 포진해 있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는 분야가 있다면 특별히 어느 분야라고 생각하며, 어떤 형태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하나만 꼽으라고 하시면 저는 정치분야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라는 말보다 토착왜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두 단어가 주는 느낌으로는 친일파보다 토착왜구라는 말이 훨씬 더 실감이 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가진 정치인들 중 유달리 친일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정당이나 국회의원들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민특위가 국민을 분열시켰다”고 주장하는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있고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반대”를 명분 중 하나로 내세워 청와대 앞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는 거대정당의 당대표도 있습니다. 이런 정치집단의 존재는 국민들 속에 존재하는 일부 친일매국노들을 고무하고 양산시키고 있습니다.

강제징용 노동자 문제로 일본의 아베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시킨 것에 분노한 대다수 국민들이 불매운동으로 대응하며 한일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베수상님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는 엄마부대 주순옥의 망언과 광화문에서 기도회를 한답시고 떠들어 대는 목사 전광훈의 광언에 열광하는 기독교 교인들의 모습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지요 일본군 위안부는 매춘부이며 강제징용은 없었다는 등 일본 국우들의 주장을 그대로 담은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출간되자마자 친일파와 친일청산 세력을 가리지 않고 양쪽 모두가 관심을 가지는 도서로 떠오른 현상도 지금 이 땅에서 횡행하는 친일문제가 우리사회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친일은 ‘친일인명사전’에만 있는 과거사가 아니라 해방되고 75년이 지난 현재도 진행 중이며 그것도 당당하게 어깨 펴고 큰소리치며 대한민국을 활보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감싸 안고 함께하는 정치판의 토착왜구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다가오는 4.15총선을 통해 토착왜구들을 국민들의 손으로 국회에서 퇴출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민족의 미래가 달려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잘 돼야 할 텐데........

"조선과 동아, 지금도 반성은커녕 민주언론인양 행세하며 이념갈등 부추겨“

Q9. 올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친일행위에 앞장섰던 신문들이 100년을 맞게 됩니다. 이들 신문들이 국내 언론계의 주류임을 참칭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바로 앞에서 저보고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친일세력들이 포진해 있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는 분야가 어디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에 정치 분야 하나만 찍어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은 토착왜구 정치인들과 조선·동아는 쌍두마차입니다. 둘 다 친일 친독재 청산대상 제 1호입니다.

이 둘을 동시에 청산되지 않으면 아마 어느 하나를 청산해도 그 효과가 거의 없을 겁니다. 서로가 수혈을 통해 살려낼 것입니다. 그 둘은 DNA만 같은 게 아니고 혈액형까지도 같은 존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가 조선·동아 100주년이라고 하니 아마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할 것입니다. 평소에도 늘 지신들이 민족지임을 주장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들에게 점잖은 말로 ‘참칭’한다고 하셨지만 일반인들의 일상적 용어로는 그런 걸 “사기”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제강점기에 조선·동아의 친일 반민족 보도 역사는 제가 여기기서 말씀드리지 않아도 많은 분들이 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문제는 지금도 반성은커녕 자신들이 마치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민주언론인양 행세를 하며 자기들과 생각이 조금이라도 다른 이야기만 나오면 바로 색깔론을 들고 나와 국민들에게 이념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언론을 그냥 둔다면 역사의 수레바퀴가 순식간에 뒤로 돌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촛불혁명을 무위로 돌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안티조선 운동이 일어난 일이 있었지요. 당시 희망연대도 지역에서 여러 단체와 연대해서 나름 의미 있는 일들을 했습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 북녘선수를 응원하는 ‘아리랑응원단’에 대한 조선일보 취재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 성과를 평가하기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많은 시민들에게 소위 조·중·동이라고 하는 언론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조선일보가 그래도 이전보다 영향력이 많이 약화되지 않았습니까? 한때는 저들이 ‘밤의 대통령’이라 자처하며 자신들이 정권을 창출했다는 자부심으로 정치권력 위에 군림하려고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다양한 미디어의 출현으로 영항력이 예전만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여름 아베가 경제침략을 했을 때 조선일보와 토착왜구들이 우리나라 경제가 곧 무너질 듯이 호들갑을 떨며 우리 정부를 나무라는 보도를 보면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의 뉴스를 를 검색해보고 ‘아베 규탄, 지소미아 종료 운동’을 자신감 있게 밀고 나갔습니다. 결과는 조선일보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인정은 안하겠지만 말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조국관련 보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일 ‘뉴스공장’과 유시민의 ‘알릴레오’가 없었더라면 저 같은 사람도 깜빡 넘어갈 편파보도가 쏟아져 나왔으니까 일반 국민들이야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언론의 조국관련 보도 행태를 보면서 어쩌면 언론개혁이 검찰개혁 보다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론이 제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검찰이 이렇게 까지 막가는 조직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언론개혁을 위해 어떤 방법들이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언론 관련법, 특히 가짜뉴스 방지법을 만든다든지.... 하기야 있는 법도 별 효용이 없는 것 같던데 하여튼 무슨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또한 시민들이 해야 할 역할이 어떤 것이 있는지 제가 오히려 선생님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영화 '군함도' 홍보 포스터
영화 '군함도' 홍보 포스터

"보수성향 강한 경남지역에서 보통 어려운 일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노력할 것“

Q10. 앞으로 친일 청산과 관련해 특별한 계획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지요.

짐작하시겠지만 친일청산 운동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년 전부터 저희들이 해당 자치단체에 요구해 온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친일 친독재 인사들의 기념사업을 금하는 조례를 제정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반민족행위자와 독재부역자들의 기념사업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문제는 시의원들이 친일 친독재 청산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보수성향이 강한 경남지역에서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어떤 정당이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가 하는 것도 문제이며 또한 정당과 관계없이 의원 개개인의 생각에 편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 지난해가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라서 몇몇 시, 도의원들과 접촉을 해봤는데 성급하게 추진하다가는 자칫 아니함만 못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지금 여러 가지 고민과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 안으로 일을 성사시켜 볼 계획입니다.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는 바로 친일 친독재 청산에서부터"

Q11. 끝으로 정부나 지자체, 국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우리나라 헌법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친일 친독재 행위는 대한민국의 법통과 정통성 그리고 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며 헌법에 반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정부와 국회는 적어도 친일 친독재를 비호하고 기념하는 일은 해서는 안됩니다. 한발 더 나아가 ‘친일 친독재 찬양금지법’ 같은 법이 제정되어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고 두 번 다시 반동세럭들에 의해 역사가 퇴보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합니다.

4월 총선 이후 21대 국회가 들어서면 친일 빈민족 행위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고, 강제 이장을 가능케 하는 법안이 통과되어야 합니다.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는 나름대로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친일 친독재 지원금지 조례’를 제정하면 지금과 같이 불필요한 분란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명분은 헌법전문에 있습니다.

시민들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는 바로 친일 친독재 청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자식들에게 보다 나은 사회를 물려주고 싶다면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람과 언론> 제8호(2020년 봄)에 게재 글.

김영만 선생은

1945년 마산출생

1960년 3.15의거 ,4.11민주항쟁 참여(4.19혁명)

1964년 동아대 6.3 한일회담 반대운동 참여

1966년 해병 청룡부대 베트남 참전

1978년 사무원, 노동자 등 생계 활동

1982년 초록회(마산수출자유지역 노동자 모임)사건 안기부 체포

1988년 민자당 일당독재 분쇄, 민중생존권 쟁취  경남본부장

1989년 참교육학부모회 전국회장

1991년 노태우퇴진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

1993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경남연합 상임대표

1999년 김주열기념사업회 회장

2000년 총선연대 경남 상임대표

2003년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대표 인간방패 이라크파견

2016년 박근혜퇴진 경남본부 상임대표

2017년 적폐청산과 민주사회건설 경남상임대표

현) 창원시 민주주의 전당 건립추진위원회 상임대표

현) 민주항쟁 정신계승 시민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경남분부 상임대표

(저서) ‘친일 친독재가 어깨 펴고 사는 나라’ 외  다수 

/박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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